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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에필로그

SaKuya! 2016. 5. 30. 07:26



“그리하여 쿠로오와 신전의 음모는 막을 내렸습니다아아-.”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쓰지 마.”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장황한 나레이션이라도 해볼까 생각하던 쿠로오는 곧 그만두고 따분한 듯 하품하며 TV채널을 돌렸다.


「프랑스 보르도에선 와이너리를 샤토(Chateau)라고 부르는데, 성이라는 뜻이죠.」

「성이라니 낭만적이네요. 왠지 왕도 있을 것 같고.」


“에이, 재밌는 거 안 하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대던 그는 결국 마지막 채널에서 리모컨을 내려놓고 마룻바닥 위에 엎어졌다. 


마지막 채널인 교양 채널에선 와인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다. ‘구세계 와인의 대표적인 산지 프랑스 편’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다. 신문의 칼럼에서 본 적 있는 유명한 와인 평론가가 리포터와 시청자들에게 와인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 설명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려했다.




“그러고 보니 신전이랑 스가와라는 이제 어떻게 되려나.”


인간계로 쫓겨난 이후로 그들은 마계에 대한 건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손에서 게임기를 놓지 않은 채로 켄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왕위 탈환을 돕는 대신 트라스 지방의 소금 산업 권리를 받아오기로 했다던데, 이거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 아니려나…….”


혼잣말로 치부해버려도 될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쿠로오는 별 흥미도 없는 TV프로그램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입을 열었다.


“…지금 신전 꼴로 봐선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걸.”

“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잖아. 물론 기부금도 많으니 소금 사업이 망한다고 해서 당장 망하진 않겠지만, 우리 아버지가 날 살려주는 댓가로 대왕님 편에 서기로 했으니 아마 최대한 빨리 망하도록 신전을 부추길 거야.”


사업이 망할 때쯤 슬슬 본격적인 거래에 들어가겠지. 말을 마친 쿠로오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쿠션 솜이 그의 얼굴을 따라 밑으로 푹 꺼졌다.


「AOC제도라는 걸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 들어본 적 있어요! 와인의 품질관리를 위해 원산지 명칭을 관리하는 제도죠?」

「맞습니다. 프랑스의 AOC제도를 시작으로 다른 나라들도 와인의 등급을 나누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죠. 그럼 프랑스 와인의 경쟁력과 세계화에 기여한 이 AOC제도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건지도 아시나요?」

「그것까지는….」

「‘필록세라’라는 진딧물 때문이에요. 이 진딧물 때문에 하마터면 유럽에서 와인이 사라질 뻔했죠.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뿌리를 썩게 했고 유럽의 포도밭을 황폐화시켰거든요. 포도 생산량은 급감했고, 와인이 귀해지자 원산지를 속인 와인이 기승을 부리게 되는데……」


“켄마.”


여전히 쿠션에 얼굴을 묻은 채로 쿠로오가 웅얼거렸다. 말도 반쯤은 쿠션에 묻혔다.


“…왜 배신했어?”


인간계로 유배 아닌 유배를 오게 된 이후로 계속 물어보려 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언젠가 묻는다면 좀 더 진중한 분위기에서 묻게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째서인지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배신한 적 없는데.”


나름대로 심각한 질문이었건만 켄마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 질문 자체를 부정했다. 왜냐하면 그게 곧 사실이었으므로.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됐잖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쿠션에서 얼굴을 떼고 인상을 쓰던 쿠로오는, 그러나 곧 찌푸렸던 인상을 풀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더니.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 열렸던 쿠로오의 입에선 말 대신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바람 빠지는 것 같던 웃음소리는 곧 유쾌하고도 홀가분하게 바뀌고, 그는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이제야 후련했다. 


이제야 계속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어리가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필록세라를 박멸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죠.」

「무슨 방법이었는데요?」

「바로 필록세라에 저항력이 있는 미국 포도나무와 접붙이는 거예요.」


한참을 시원하게 웃고 난 쿠로오는 벌떡 일어나 켄마의 게임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거 전에 하던 거 아니야? 아직 못 깼어?”

“아니. 엔딩 봤는데 한번 더 하는 거야.”

“왜 했던 걸 또 해?”

“진엔딩 보려고.”


세이브 포인트를 찾았는지 세이브를 한 뒤 켄마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설명했다.


“가끔 있어. 1회 차에선 진엔딩을 볼 수 없고 2회 차 이후부터 진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이. 얼핏 보기엔 1회 차랑 별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숨겨진 장소가 드러나거나 감춰져 있던 진실이 밝혀지기도 하고, 전에는 얻지 못했던 아이템을 얻기도 해.”

“번거롭네. 처음부터 그런 요소들을 집어넣어 두면 되잖아.”

“귀찮긴 하지. 그래도 난 이런 방식도 꽤 좋아해.”


켄마는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모양이다.


“1회 차가 끝났다고 포기하는 사람은 영영 진엔딩을 볼 수 없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플레이하면 볼 수 있게 되는 거야.”


켄마가 고개를 돌려 쿠로오와 눈을 마주했다. 어쩌면 그 너머에 있는 누군가와도.


“-진짜 해피엔딩을.”

“…그런 것도 나쁘지 않네.”




TV에선 아직도 와인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필록세라 이후로 술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설명하는 평론가 뒤로 포도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화면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옛날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 뒤로 보이는 포도나무는 다 미국산 포도나무와 접붙인 겁니다. 오늘날 유럽의 포도나무들은 신세계와 구세계를 접목시킨 나무인 거예요.」 


그들은 다시 게임기를 들었다. 1회 차에선 보지 못했던 진엔딩을 보기 위해서. 


평론가는 시청자들에게 계속 말한다.


「필록세라는 이젠 처방법이 생겨 전보다 나아졌습니다만, 완전히 박멸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나무들은 이제 필록세라의 고통도 견디고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   *   *




비리디아의 사절단이 기어이 도착해버렸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우시지마도 이렇게까지 저기압일 이유는 없었다.


“대왕님이 쿼크누스를 방문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 맞지? 어째 올 때마다 카게야마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네. 물론 첫 번째 방문은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지만.”


텐도의 조잘거림에 우시지마의 걸음이 거칠어진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지금 우시지마가 무척이나 심통이 나 있다는 걸 텐도는 알 수 있었다.


“서로 좋다는데 그냥 허락해주지그래? 카게야마가 어린 애도 아니고. 자꾸 그렇게 연애에 간섭하다간 동생한테 미움받는다?”


미움받는다는 말에 우시지마의 굵은 눈썹이 씰룩거렸다. 허나 그 정도로는 그의 고집을 꺾기엔 한참 역부족이다.


“싫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시지마의 어깨가 살짝 처진 걸 본 텐도는 킬킬대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축 처져있지 마. 원래 형제끼리는 늘 싸우는 법이라고!”

“…음.”


실은 우시지마의 고집을 꺾기보단 이렇게 놀려먹으려고 꺼낸 말이었기에, 목적을 달성한 텐도는 한층 무거워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시지마 옆에서 발걸음도 경쾌하게 걸었다.




“엇.”

“이와이즈미?”


녹색 카펫이 깔린 복도의 끝에서 두 사람은 사절로 온 이와이즈미와 마주치고 말았다. 예복은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걷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우시지마와 마주치자 밥 먹다 돌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인상을 팍 구기고 건성으로 허리를 숙였다.


“…비리디아의 총사령관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우시와카 폐하를 뵙습니다.”

“우시와카라고 부르지 마라. 이와이즈미.”

“그럼 얼른 오이카와 녀석이랑 카게야마의 약혼이나 허락해줘. 그래야 너랑 볼 일도 없어지고 내가 널 우시와카라고 부를 일도 없을 거 아냐.”

“싫다.”


우시지마의 대답은 여전히 굵고 짧았다. 


텐도가 옆에서 “근데 너 우리 마왕님한테 너무 예의 없이 구는 거 아냐?” 하고 딴지를 걸었으나, 이와이즈미는 “새삼 뭘 그런 걸 따지고 있냐.”며 맞받아쳤다.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며 히죽거리는 텐도와 기분 나빠하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우시지마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카게야마는 널 제법 잘 따르지?”

“어? 그야 선배였으니까.”

“나도 대학 선배였던 데다 형제이기까지 한데 왜 나보다 널 더 잘 따르는 것 같지?”

“네가 재수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

“재수 없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만.”

“바로 너의 그런 점이 재수 없다는 거야.”


텐도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이와이즈미는 이를 박박 갈자 우시지마는 턱을 괴며 심각하게 고민했다.


“잘 모르겠군.”

“그게 재수 없다고! 바로 그런 게!”


옆에서 보기엔 이건 뭐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텐도는 벽에 기대 아주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정말 재수 없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마계에선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굴어서 날 멀리하고 엇나간 건가 싶어서 인간계에선 일부러 거리를 두고 엄격하게 대하기까지 했단 말이다.”


우시지마는 갑자기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위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필요 없다.”




말을 마친 그는 아주 약간 시무룩해 보이는 얼굴로 다시 턱을 매만졌다.


“대충 이런 식으로 말했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거지.”

“…그냥 네 존재 자체가 문제 같다.”

“으하하하하!”


텐도는 한 손으론 배를 움켜잡고 한 손으론 벽을 팡팡 쳐가며 눈물까지 흘렸다. 텐도가 왜 저렇게 웃어대는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시지마를 보고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엄격한 거랑 너무한 것도 구분 못 하나.


“됐고 그냥 둘 약혼이나 허락하는 게 카게야마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 너 오이카와 별로 안 싫어하잖아. 오히려 꽤 좋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이다.”

“그럼 허락…”

“그래도 약혼은 허락 못 한다.”

“아니 왜?!”


고집도 이런 황소고집이 따로 없다. 도무지 꺾일 줄 모르는 ‘안 돼’에 이와이즈미가 한숨 쉬자 우시지마는 그에게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넌 오이카와를 어떻게 생각하지?”

“그야 뭐…시끄럽고 손도 많이 가고 짜증 나고 뺀질대고 유치한 면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놈이고 믿을 수 있는 친구 놈이라고 생각한다만, 갑자기 그건 왜?”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우시지마가 이번엔 다른 걸 묻는다.


“네 사촌 동생의 이름이 사리아였나?”

“…사리아는 왜?”


우시지마의 입에서 사촌 여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이와이즈미는 경계하며 우시지마를 흘겨봤다. 


비록 왜 자신에겐 계획의 자세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냐는 물음에 “가주님도 맨날 말없이 인간계에 가시면서 쩨쩨하게 굴지 마세요.”라고 얄밉게 대답해 속을 박박 긁어놓긴 했지만 어쨌든 동생은 동생이었다. 혹시 눈독이라도 들였다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눈빛을 팍팍 쏘아 보내고 있으니 우시지마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또 내놓았다.


“만약 그 여동생이 결혼하겠다며 데려온 놈이 오이카와 같은 녀석이라면 어떨 것 같나.”



“좋은 놈이고 믿을 수 있는 친구긴 하지만 얼굴만 번지르르해서 여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꼬이는데 거절도 애매하게 해서 문제만 생기고, 시끄러운 데다 손도 많이 가고 짜증 나고 뺀질대고 유치하기까지 한 놈이랑?!”



사촌동생이 오이카와 같은 놈을 결혼상대로 데려오는 걸 그려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우다다 내뱉어버린 이와이즈미는 놀라서 헉하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그 말을 다 들어버린 우시지마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젠장.”


미안하다 오이카와. 순간적으로 우시와카 놈을 이해해버렸어! 

우시지마는 그래도 좋은 친구인 오이카와에 대한 미안함과 그래도 만약 동생이 그런 놈을 데려오면 허락 못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다 이해한다는 듯 자애로운 음색으로 말했다.


“원래 오빠들은 다 그런 법이다.”

“어? 근데 카게야마는 여동생 아니잖아.”

“그런 건가…….”

“아니, 그러니까 여동생 아니라니까?”


대화에 끼는 대신 계속 낄낄대고만 있던 텐도만이 이상한 점을 깨닫고 지적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에겐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다. 


어찌 됐건, 형이나 오빠들은 동생이 데려오는 애인이 항상 맘에 들지 않는 법이다.




그 무렵, 카게야마는 방 안에서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푸루스에서 켄마와 마주친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쿼크누스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오이카와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2주나 지나있었다. 


오이카와가 봉인을 풀고 비어있던 비리디아의 왕좌에 다시 앉은 지도 2주나 지났다는 뜻이다. 오이카와에 대한 소문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하나도 모른다. 자신도 궁정 생활에 적응하느라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었고. 




그런데 오늘 비리디아에서 도착한 사절단에 오이카와도 끼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오이카와를 만나러 가고 싶었으나, “웬만하면 방 밖으론 나오지 마라.”는 우시지마의 만류와 지금의 자신이 대왕인 오이카와를 만나러 가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질 않았기에 그는 아침부터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방 안을 서성이던 카게야마는 이내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똑똑


바로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문이 아니라 창문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창문 너머에 오이카와가 서 있었다.


“오이카와상?! 여긴 어떻게…”


놀란 카게야마가 얼른 창문을 열려고 들자 오이카와는 창틀에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부드럽게 저었다.


“토비오.”


유리창 너머의 오이카와가 심호흡을 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긴장한 모양이다.


“중학교 졸업식 날, 내가 너한테 창문 너머로 키스했던 거 기억해?”


끄덕끄덕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 때 네가 창문을 열어줬지.”


오이카와는 창문에 이마를 가져갔다. 

차가운 유리창에 서서히 그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이젠 내가 열어도 될까?”


창문에 서린 안개 같은 그의 입김이 걷히는 걸 보며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창문을 활짝 열고 환하게 웃으며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주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같이 가자.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카게야마는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한때는 가로막혔던 온기가 마침내 닿는 순간이었다.




*   *   *




왕이 돌아온 이후로 왕의 지지 기반 중 하나인 상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어리긴 해도 알과 타르프 또한 상회의 일원이었기에 예외가 아니었다. 

오늘도 오전 내내 짐을 정리하는 걸 도와야 했지만 다행히 오늘은 짐 정리 외에 다른 일은 없어 오후엔 쉴 수 있었다. 둘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짚더미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몸이 축축 쳐졌다.


“알, 타르프, 너희한테 편지가 온 모양인데?”


그러나 누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하말이 방 안으로 들어왔기에 반쯤 졸고 있던 둘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켜야 했다.


“누구한테요?”

“글쎄다. 보내는 사람 이름이 안 적혀있어서.”


하말에게 편지를 건네받은 타르프는 편지봉투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수신인 알 타르프*.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은 봉투는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자기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며 하말이 나가자 두 아이는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창가에 앉아있던 새를 데려왔다.


“누가 보낸 걸까?”


알은 자기도 모르겠는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테이블 위에 앉아있던 새가 ‘삐이-’하고 울자 타르프는 조심조심 편지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엔 곱게 접힌 크림색의 종이 한 장이 들어있는데, 편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종이엔 글씨 대신 기하학적인 무늬만 가득했다.


“이거…마법 스크롤 맞지?”


타르프는 미간에 힘을 주며 스크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스크롤이니 비싼 거긴 할 텐데 도대체 누가 무슨 스크롤을 보낸 건지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녀는 스크롤을 알에게 넘겼다.


“네가 찢어봐.”


얼떨결에 스크롤을 받아 든 알은 꺼림칙해 하며 창문 너머 공터를 가리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밖에서 찢는 게 낫지 않겠냔 뜻이었다.




곧바로 이 시간엔 사람이 적은 상회 뒤편 공터로 나온 알과 타르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타르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은 어깨 위의 새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심호흡을 한 뒤 비장한 얼굴로 스크롤을 찢었다. 찌익 하고 종이 찢어지는 소리에 타르프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도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종이였나? 그녀는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알?”


알이 날고 있었다.


날고 있다곤 해도 아직까진 공중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팔다리를 내두르는 알의 어깨에서 새가 떨어진다. 화들짝 놀란 알은 손을 뻗었다. 새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겨우 잡은 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새를 감쌌다. 하마터면 다칠 뻔한 새는 손아귀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경기 중 심판이 부는 휘슬처럼 삐익삐익 울었다.


알이 내려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려 할 때였다. 손안의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리기 시작했다. 


새는 뛰며 부지런히 날개를 움직였다. 나려고 드는 것이었다. 다친 날개로는 날 수 없을 텐데도. 



몇 번이고 뛰던 새가 알을 보며 삐이-하고 울었다. 

알이 결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알은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내려가기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높이, 더 높이.


입을 쩍 벌리고 그 비상을 지켜보고 있는 타르프의 눈에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알의 등 뒤에서 또 구름 뒤에, 아주 희미하지만 빛이 하나 있었다. 그 빛은 한낮을 채우는 태양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타르프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별이었다.



별은 한낮에도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다. 다만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는 전에도 딱 한번뿐이지만 한낮의 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타르프는 지금 또다시 별을 발견했다.


제법 높이까지 올라온 알이 타르프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다리에서 푸드덕대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는 지금 정말로 날고 있는 것이다.




별이 보이는 하늘에서 오랜만에 활짝 웃는 알을 마주 보며 타르프도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신관들은 말했다. 운명은 원하는 자를 인도하나, 거스르는 자는 끌고 간다고.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다고. 


타르프는 생각했다. 그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신관은 알에게 그가 원치 않는 벙어리가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알은 그가 원하는 대로 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는 알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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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타르프(Al Tarf): 오이카와의 별자리인 게자리는 황도 12성좌 중 가장 어두운 별자리이기에 자세히 봐야만 찾을 수 있다. 게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은 아쿠벤스로, 게의 집게발에 해당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집게발에 위치하고 있는 게자리에서 두번째로 밝은 베타별, 그게 바로 알 타르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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