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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20(完) 본문

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20(完)

SaKuya! 2016. 5. 27. 18:40



20.

“누구 한 명이라도 허튼 움직임을 보였다간 카게야마는 끝이야.”


켄마가 지팡이를 땅에 내리꽂자 커다란 검은 구가 허공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 카게야마가 쓰러져 있었다.


“토비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직은 안 했어.” 


그가 지팡이를 살짝 휘두르자 구체에서 파지직하고 전기가 튀었다.


“하지만 곧 하게 될지도 모르지. 너희가 협력해주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만둬!”


새파랗게 질린 오이카와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내딛자 켄마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너 미쳤어?!”

“말했잖아. 우마왕이 너희 편인 걸 안 이상 내가 카게야마를 해치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텐도의 경악어린 외침에도 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두가, 심지어는 쿠로오조차도 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 중에서도 스가와라가 가장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 이건 계획이랑 다르잖아! 이제 와서 배신하는 거야?!”


스가와라의 추궁에 쿠로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배신이라니? 켄마 너 설마…?”

“누구도 배신한 적 없어.”


켄마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분노한 스가와라가 소리쳤다.


“오이카와를 쿼크누스로 데려가서 봉인을 풀 방법을 찾기로 했잖아!”

“그건 너희들 계획이었지.”


마법사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켄마도 소매가 손가락을 덮을 정도로 긴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가 소매를 걷었다.


“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드러난 손가락에는 가운데 검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심플하고 세련된 반지일 뿐이다. 


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깨달을 것이다. 반지에 박혀있는 보석은 일반적인 보석처럼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가운데 오로지 쿠로오와 이와이즈미만이 그걸 알아봤다. 그들은 과거에 그 심연에 빠진 자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를 봉인할 때 썼던 반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켄마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는 반지를 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래하자.”

“…무슨 거래를?”

“카게야마를 돌려주는 대신 쿠로의 안전을 보장해줘. 그리고…”


반지 낀 손가락이 오이카와를 가리켰다.


“넌 다시 한 번 이것과 마주해줘야겠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누가 들어줄 줄 알고…!”

“이와쨩.”


오이카와는 팔을 들어 이와이즈미를 저지하고 켄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이카와!”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서서 오이카와를 말렸다. 


왜 지금까지 이 고생을 한 줄 아느냐, 다시 봉인 당했다고 해서 신전이 널 가만둘 것 같으냐, 저들이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하느냐……. 


그러나 오이카와의 결심은 확고했다.


“신전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으니 신전 측도 날 제거하기 위해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 거야. 상쾌군도 신전과 거래할 수 있을 거고. 그럼 괜찮지 않아?”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이제 정말 봉인을 푸는 일만 남았는데!”

“어차피 너희는 봉인을 풀 수 없어.”


켄마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끼어들었다.


“오이카와의 봉인은 우마왕도 못 풀어.”

“웃기지 마! 분명 봉인을 풀 방법이 있을 거라고!”

“물론 있기야 하지. 그래서 나도 도박을 해보는 거야.”

“오이카와, 저 녀석이 하는 말 들을 필요 없어. 풀리지 않는 봉인 같은 건 없어.”


이와이즈미와 스가와라가 붙잡았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흔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손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그는 애써 웃어 보였다.


“네 요구대로 할게. 그런데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난 지금도 봉인된 상태잖아. 봉인당할 힘 같은 거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그럼 기억만 봉인 당하는 거야?”

“뭐…전제가 좀 틀리긴 했지만. 만약 또 도망친다면 기억을 잃겠지.”

“도망?”

“…대답은 여기까지.”


켄마가 더는 답해주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렸기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기억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니 괴로웠다. 과거를 알고 있기에 더더욱.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마침내는 이별하게 되는 걸까. 우울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오이카와는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토비오를 영영 잃는 것보단 낫지 않은가.


그래도 만약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특별히 이거 하나는 알려줄게.”


각오가 끝날 때쯤 켄마가 반지를 발동시키며 오이카와를 마주 보고 말했다.


“이 반지의 이름은 ‘데스페란토’야.”


시커먼 안개가 심연에서 솟아난 괴물처럼 아가리를 쩍 벌렸다. 좌절 어린 외침들 가운데서 데스페란토, 절망이 오이카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




“그럼 나침반이 만들어지기 전엔 어떻게 항해를 했어요?”

“별을 보고 했지.”


겨울. 난롯가의 풍경이다. 


선생은 엄격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린 오이카와는 카펫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오른손을 벽에 댄 채로 그녀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난로 옆 가장 따뜻한 자리를 오이카와에게 내어주고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그녀도 손을 늘 바삐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마법진을 그리거나, 수식을 분석하거나, 실험실에서 플라스크를 기울이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뜨개질이었다. 


뜨개질하는 마법을 만드는 거라면 모를까, 마법사씩이나 되어서는 평범한 사람처럼 직접 뜨개질을 하다니 우스운 일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그녀의 뜨개질 솜씨를 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모로 만든 털실을 대바늘에 걸고 고리를 만든 뒤 바늘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어느 순간 한 줄이 완성되어 있고, 신기한 무늬가 생겨난다. 그 동작은 시작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이어졌는데, 한 백 년쯤 뜨개질만 한 사람처럼 매끄러웠다. 그녀는 겨울이면 늘 털실을 손에 달고 살았다. 


“별을 보고 어떻게 항해를 해요? 신관들이 같이 탔어요?”


그녀는 뜨개질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별 말이야.”


그녀의 설명을 들은 오이카와는 더 모르겠다는 듯 갸웃거렸다.


“하늘의 별이요? 그건 안 뜨는 날도 있잖아요. 먹구름이 꼈을 때도 안 뜨고.”

“아니야. 별은 항상 떠 있는 걸.”


그녀는 거의 다 짜 가는 스웨터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정교한 무늬를 짜 넣은 두툼한 회색의 스웨터는 어떤 혹독한 추위가 와도 견딜 수 있을 것처럼 포근해 보였다.


“우리는 어쩌면 나침반을 보기 시작한 후론 진짜 별은 보지 않게 되어버렸는지도 몰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바늘에 실을 감고 스웨터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기억하렴. 별은 항상 떠 있단다. 한낮에는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고 구름이 낀 날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지라도 별은 늘 떠 있는 법이야. 그러니 별이 보이지 않는 날이라도 다시 보게 될 별을 찾으며 항해를 하렴.”


비록 어린 오이카와는 그녀가 하는 말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완성된 스웨터를 오이카와의 몸에 대본다. 오이카와는 스웨터가 맞는지 보기 위해 벽에서 손을 떼고 팔을 활짝 벌린다.




그는 출구를 찾아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혹은 입구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게야마와 이와이즈미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첫날, 오이카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곧 돌아오겠지. 


둘째 날이 되어도 둘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했다. 신전은 늘 그를 노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자신의 측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리고 다음 날, 인간계에서 성검을 뽑은 용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용사 일행에 카게야마와 이와이즈미로 보이는 자들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왜 용사 일행에 들어간단 말인가? 분명 둘과 아주 닮은 인간일 것이다. 그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상관없다. 




상관없다고 넘겨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오이카와는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후, 몰래 용사 일행을 보러 갔다.




차라리 보지 말걸 그랬지. 성으로 돌아온 오이카와는 오른손으로 벽을 짚고 중얼거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의 초점이 흐렸다. 두 사람은 카게야마와 이와이즈미가 틀림없었다. 왜 나를 떠났지? 하고 묻는 분노가 가시자마자 그럴 만도 하다는 체념, 그리고 다시 분노와 비애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날 배신할 수가 있어? 두 사람만큼은 끝까지 내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나는 없어지는 게 나은 존재니까. 나도 두 사람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잖아. 그러니까 용사 일행이 오면 얌전히 죽어주자. 그러면 더는 괴로울 일도 없을 거다.


벽을 짚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결국 괴로워하기만 하다 끝나는 거야? 너무하잖아. 살면서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이대로 죽고 싶진 않단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살 바엔 그냥 죽는 게 나은 것도 맞잖아.




오이카와는 복잡한 심경으로 몸을 웅크렸다. 응어리진 감정들에 가슴 속이 답답했다.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상황에서도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건 이제 진저리나게 싫었다. 


어쩌면 자신은 팔 하나를 잃은 채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팔은 거대한 불행에 붙잡혀 있고, 나머지 한쪽으로만 행복을 움켜쥐려고 드는 거다. 그러니 겨우 잡았다고 생각했던 행복도 전부 놓칠 수밖에 없다. 


난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오이카와는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면 결코 행복해져서는 안 되는 악역이 되자. 그편이 두 사람의 죄책감도 덜어줄 수 있겠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야 덜 억울할 테니까.




용사 일행이 마침내 마왕성에 당도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이카와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후련할 정도였다. 드디어 공주를 납치한 못된 마왕이 사라질 때가 온 것이다!

 

“용사 일행은 마계에서도 인간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마왕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날 것이다. 오이카와는 마치 연극 속 배우라도 된 것처럼 팔을 벌리고 중얼거리다, 이내 한숨을 쉬며 팔을 늘어뜨렸다.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그는 카게야마가 두고 간 망토에 손을 가져갔다. 왕가의 문장이 수놓아진 망토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오이카와는 잠시, 아주 잠시 망토를 이마에 대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구겨진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방을 나섰다. 




알현실의 문에서부터 왕좌까지 길게 이어지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다. 오이카와는 마침표처럼 그 끝에 자리한 왕좌에 앉아 용사 일행을 기다렸다. 머리 위에 얹은 왕관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가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왕관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왕! 공주님을 구하러 왔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주홍색 머리의 꼬마가 기세 좋게 외쳤다. 


공주님을 구하러 오긴 무슨. 내가 공주를 납치하기 전부터 마계 원정을 계획 중이었으면서. 그래도 그럴싸한 구실을 붙여줬으니 내 역할은 잘 수행한 거려나. 오이카와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응. 이 건물 지나서 다음번에 나오는 건물 현관에서 보이는 중앙계단으로 2층까지 올라가서 오른쪽 복도를 쭉 따라가다 보면 흰색 문 있어. 거기로 가면 돼.”

“알려주셔서 감사합…이게 아니고 대체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는 딱히 없는데.”

“거짓말!”


제게 검을 겨누는 용사의 외침에 그는 피식 웃었다.


“믿기 싫음 말고. 다들 날 못 믿어서 떠나버렸으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줄곧 어두운 표정이었던 카게야마가 참지 못하고 나서자 이와이즈미도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래. 우리는 널 위해서…!”


갑자기 울컥하고 치미는 감정에 오이카와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듣기 싫어! 날 위했으면 끝까지 같이 있어줬어야지!”

“네 녀석이 정한 망할 끝에 따르라고?!”

“그거 외에 방법이 또 있어?! 아, 있긴 하네! 이렇게 용사 손에 죽는 거!”


이제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건만 낯선 망토를 걸치고 있는 카게야마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주제에 ‘널 위해서’라는 말을 꺼내는 이와이즈미를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다들 내가 준 건 버리고 가버렸으면서.


“저희는 오이카와상을 살릴 방법을 찾으려고 그런 것뿐입니다!”

“웃기지 마! 다들 내가 없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껏 말없이 뒤에 서 있던 흰 로브의 백마법사가 걸어 나오며 끼어들었다.


“…그건 그래.”


그는 입술을 깨문 채 부르르 떨고 있는 오이카와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하는 말도 사실이야. 저 둘은 널 살리려고 온 거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마왕’은 물리치되, ‘오이카와’는 살려주겠다는 거야.”


백마법사가 지팡이를 내리고 로브 소매를 걷었다. 손에 낀 것은 ‘그’도 본 적이 있는 반지다.


“이 반지로 네 힘과 기억을 봉인할 거야. 그러면 ‘오이카와’는 살 수 있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으로. 물론 네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반지의 보석에서 시커먼 안개가 피어오르고, 오이카와를 집어삼키려 든다.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카게야마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는 안타까워하며 카게야마에게 손을 뻗었다.


-그만둬.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성 안의 장면은 어느새 사라져 있고, 캄캄한 어둠 속에 벽과 단 둘뿐이다. 


그는 줄곧 과거의 기억과 지금의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있던 벽을 응시했다. 


-이 이상은 오지 마. 예전으로 돌아가면 괴로워질 뿐이야. 그냥 이대로 등 돌리고 가.

“하지만…….”


마지막으로 본 카게야마의 표정이 눈에서 떠나질 않아 미적거리는 그가 벽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찼다. 




새카맣던 주변이 어그러지며 발바닥에 서늘하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먼지 냄새와 향 피운 냄새. 열다섯 개의 흐리멍덩한 촛불이 켜진다. 벽이 높아졌다. 아니, 그가 작아진 것이다.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눌렀다. 찬 돌바닥에 뺨이 닿았다. 


-목마르고 배고프지 않아?


그 말을 들으니 느닷없이 극심한 허기와 갈증이 밀려왔다. 그는 주린 배를 움켜잡았다.


-이제 가. 가버려. 힘들잖아.


꿈틀거리던 그가 고개를 흔들자 벽은 한숨으로 촛불을 하나하나 껐다. 열다섯 번이나 한숨을 쉬고 나자 또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너한텐 이게 더 와 닿으려나?


삐익-하는 휘슬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얼굴을 들자 점수판이 보였다. 


키타가와 제일 22:25 시라토리자와. 


방금 울린 휘슬 소리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그는 파란 유니폼을 입고 코트 위에 주저앉아 있다. 이번에도 시라토리자와의 우승으로 미야기 예선전이 끝났다. 경기가 끝났으니 이제 악수를 할 시간이었다. 그는 이 시간이 싫었다. 승자와 패자가 손을 잡아야하는 순간이, 마침내 승자는 패자를 힐끗 보고 가버리는 순간이. 이번에도 패자는 그였다. 


네트에서 등을 돌리자 숨이 턱 막혀왔다.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벽에 가로막힌 것 같은 기분. 여러 가지가 뒤섞인 감정이 그의 목을 조르고, 절망과 공포에 눈앞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오이카와상.”


카게야마가 공을 들고 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카게야마의 모습도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만해.”

-말해야지. ‘오지마’라고.

“그만해.”


눈앞까지 온 일그러진 카게야마가, 아니 일그러뜨려 버린 카게야마가 공을 내밀었다.


“서브 가르쳐주세요.”

-이제 손을 들어야지. 때리려고 했잖아. 안 그래?


벽의 속삭임에 팔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내리고 싶은데 말을 듣지 않는다. 놀라는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기괴하게 얼룩진 모습. 


일그러져 있던 건 카게야마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그만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괜찮을 거다. 이와이즈미가 그를 말려줄 터였다. 


그러나 이와이즈미가 오질 않았다. 손이 카게야마의 뺨에 닿기 직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만하라고!”


거짓말처럼 또 전부 사라졌다. 대신 점수판이 계속해서 눈앞을 지나갔다. 


시라토리자와 승. 시라토리자와 승. 시라토리자와 승………. 


그러나 곧 그것들마저 전부 사라진다. 남은 것은 견고한 벽뿐이다.




-전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어.


벽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실패했던 일도, 괴로움도.


그리고 그의 눈을 가리고 얼굴을 돌린다.


-자, 이렇게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외면해버리면 모르는 일이 되는 거야. 그리고 이대로 도망치면 전부 없던 일로 할 수 있어. 편하지? 이제 더는 상처받지 않아도 돼.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도, 벽도 지쳐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가쁜 숨을 고르던 그가 문득 떠오르는 걸 물었다.


“전부 없던 일이 되면…추억들도?”

-그런 거 너한테는 없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아?


벽의 음성엔 확신의 가시가 돋쳐 있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어느새 다시 촛불만이 켜져 있는 예배당이었다.


-이게 네 생일이었어. 보통은 축하할 날이지만 넌 아니야.


그의 발치로 둥근 물체가 굴러왔다. 피로 범벅이 된 금발의 머리에서 왕관이 떨어졌다.


-예배당을 벗어난 다음엔 매해 이 악몽에 시달렸지.

“…그래. 죄책감을 잊고 싶어서 성대한 파티를 열고, 나도 이만큼 누리지 못할 이유가 뭐냐는 생각도 했지. 결국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돌아가면 또 매해 끔찍한 환영에 시달려야 할 거야.

“…그럴지도 몰라.”

-그럴 바엔 전부 없던 일로 하자니까?!


벽은 화가 나 있었다. 그가 조금 허물어지고 뒤의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칼을 가는 군사들, 어떻게든 흠을 잡으려 드는 신관들, 수군거리던 하인들, 독이 들어있던 초콜릿, 홍역에 걸린 이와이즈미, 토비오를 기다리며 혼자 앉아있던 나무 밑, 피로 적힌 저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들 하나하나가 벽돌이 되고, 벽은 점점 높아져 그를 짓눌렀다. 그것들은 그를 으스러뜨릴 정도로 무거웠으며 벗어나올 수 없는 늪처럼 끈질기고 깊었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더 무거워지고 더 깊어진 그것은 그의 팔다리를 묶고 눈을 가리려 들었다. 




또, 또. 다시 예배당이었다. 


그는 제 목을 잡고 돌바닥을 굴렀다. 딱딱한 바닥에 스미는 깊은 절망. 고통스럽고 끝이 없는 그것이 할퀴고 간 자리마다 뜨거운 피가 흘렀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냥 포기해. 포기하고 어디로든 도망 가버려.


칠흑같이 어두운 시야에 축축한 눈물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떨어지자, 그 물방울은 반짝하고 빛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위엔 암흑뿐인데.


눈물이 한 방울 더 떨어졌다. 눈물방울에 어렴풋하게 빛나는 작은 점들이 비쳤다. 그는 그것이 예배당 제단의 촛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떠올려 보면 제단엔 늘 촛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바닥을 기어 제단으로 팔을 뻗었다. 입으로 훅 불면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들 근처에 차가운 손을 가져갔다. 아주 따뜻하진 않았으나 아주 싸늘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예배당엔 왜 항상 촛불이 켜져 있던 것일까?


여태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누가 켜놓은 지는 안다. 레이 아저씨다. 


레이 아저씨는 하녀들에게 그 일을 맡기는 대신 손수 예배당 제단의 촛불을 켰다.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 년이 지날 때마다 초 하나를 더 두는 것을 잊지 않으며 촛불 하나하나 일일이 불을 붙였다. 그는 유리 갓을 씌운 램프를 들고 촛불을 켜는 레이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려낼 수 있었다. 


촛불 안에서 레이 아저씨가 손을 뻗었다. 그는 환영인 걸 알면서도 손을 잡았다. 촛불에서 조금 떨어진 허공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무 것도 잡히지는 않는 것 같았으나 불의 온기만은 손바닥에 남아있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지는 한 조각 따스함과 비슷했다. 피부 밑으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손 말이다.



그는 문득 숨쉬기가 한결 편해진 것을 느꼈다. 또, 오른손으로 제 목을 쥐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는 오른손도 떼 보았다. 그러자 목을 죄고 있던 것들이 사라지고, 호흡하는 것이 아까처럼 많이 괴롭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의 목을 죄고 있던 것은 그의 손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손에는 목걸이를 쥔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가 보고 있던 눈물 얼룩진 세계가 또렷해진다. 


지워낸 얼룩 밑에 케이크가 있었다.


“저 케이크는…”


포근한 빵 사이엔 달콤한 크림이 가득하고 위에 돌돌말린 얇은 초콜릿을 잔뜩 뿌린데다 가운데를 체리로 장식한 케이크였다. 어린 시절의 그가 허기를 참아가며 예배당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한 케이크는 레이 아저씨가 그 해 신년에 준비해준 것이었다.


-저 케이크가 왜?

“왜, 예배당에 갇혀있던 다음날 레이 아저씨한테 졸랐잖아. 다음 신년에는 안에 크림이 많이 들어간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위에 얇게 돌돌 말린 초콜릿도 얹어져 있으면 더 좋다고. 그러니까 신년에 정말로 안에 크림이 이만큼이나 들어가고 표면을 아예 초콜릿으로 뒤덮은 케이크를 준비해주셨잖아. 저거 엄청 맛있었는데.”

-…그랬지. 저 때는 매일 저 케이크를 먹을 수만 있으면 항상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손에 길게 남은 줄처럼, 얼룩을 닦아낸 자리마다 기억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었다. 그는 커다란 얼룩들이 가리고 있던 곳에서 아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냈다. 


카게야마와 푸루스에 와서 보냈던 날, 피아노를 치다가 흰 레이스 덮개를 카게야마의 머리에 씌우고 면사포라고 농담을 했던 것, 정원을 산책하다 나무 위에 둥지를 튼 새를 발견했던 날, 카게야마와 성을 빠져나가려다 이와이즈미에게 들켜서 결국 셋이 같이 마을을 구경했던 밤, 몰래 춘화집을 사 와서 연구해보다 이와이즈미에게 들켜서 경멸의 눈빛을 받고 변명해야 했던 일. 


얼룩졌던 기억들이 점점 선명해졌다. 


마침내 이와이즈미에게 처음으로 토스를 올려줬던 날, 처음으로 주전에 들어갔던 날, 유리창 너머의 카게야마가 창을 열었던 것, 처음 동거하기로 했던 날 요리해보겠다던 카게야마를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보다 결국 까맣게 탄 프라이팬을 씻었던 일, 하품하며 로드워크를 하던 아침. 


뒷부분은 그의 기억이었다. 선물 받았던 은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체인처럼 그에게로 이어지는.




그는 바닥에 쓰러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무겁게 짓누르던 벽은 사라지긴 커녕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은 채였다. 그럼에도 그는 일어나서 깊게 호흡할 수 있었다.

 

그가 잡을 수 있는 것은 저주라는 이름의 동앗줄 뿐만이 아니었다. 


손이 닿는 거리에,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그를 지탱해줄 것들이 사슬처럼 계속 이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쭉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언제든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도록. 그동안은 눈치채지 못했던 것뿐이다.


“넌 좋았던 추억 같은 건 없다고 했지만…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물론 남들이 보기엔 별거 없는 시시한 추억일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텐 행복한 기억이니까.”

-……….


그는 다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또 쓰러지더라도 일어날 수 있도록 그가, 그리고 다른 이들이 함께 쌓아올린 기억, 유대, 감정을 손에 꼭 쥐었다. 촛불 같은 온기가 그를 지탱했다.


그는 온기를 꼭 쥔 채, 손에 닿기 직전에 사라진 카게야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젠가 민트 꽃이 피어있던 그 들판을 보여주기로 했다. 계속 여기 쓰러진 채로 있는다면 약속은 영영 지키지 못할 거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나아가야 했다.


“난 이제 추억도, 쌓아 올린 관계도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아.”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오이카와 토오루!


벽이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래서 봉인 당하지 않겠다고? 그 알량한 행복 때문에 마계를 피로 물들이고 모두를 불행하게 할 셈이야?! 네가 사라지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자꾸 거짓말하지 마.”


오이카와는 울부짖고 있는 벽의 어두운 눈동자를 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것은 계속 외면해왔던 것이었다.


“모두를 위한 적 없잖아. 심지어는 나를 위한 적도. 그저 그렇게 변명하는 게 편해서 그랬을 뿐이지. 안 그래?”


그리고 벽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


줄곧 그를 과거와 단절시키고 있던 벽, 그를 봉인하고 있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다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은 깊고 뾰족한 어둠을 붙잡고 있었다. 긁힌 손바닥이 아파 왔다. 마치 고통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오이카와는 울부짖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항상 울고 있었다. 얼룩진 시선으로 오이카와가 멱살을 잡았다.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지, 나는 뭘 하고 대체 싶은 건지, 차라리 죽고 싶은 건지, 그래도 살고 싶은 건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넌 알아?!

“다는 몰라.”


모든 것이 뚜렷하게 정의된다면 얼마나 편할까. 비리디아의 귀족들이 모두 시데라티오 의식을 받는다. 제가 나아갈 길을 정의하기 위해. 그들이 가야할 길을 처음부터 정의내리고 홀가분하게 시작하기 위해. 


-난 결국 파멸하고, 파멸시킬 운명이야. 너도 알잖아? 결코 바꿀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래서 전에도 도망친 거라고.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도망 안 칠 거야.”


물론 도망친 건 사실이다. 그를 짓누르는 게 너무 버거워서, 너무 괴로워서 도망쳤다.

고통으로부터. 그가 짊어지고 나아가야할 삶의 버거운 무게로부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도망친 곳에서 도망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또 다른 삶에서도 그는 벽에 부딪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배구를 했다는 것이다. 배구는 결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를 믿는 동료, 라이벌. 그는 손을 뻗어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뛰는 법을 배웠다. 


-결국 벽을 넘지도 못했으면서. 6년씩이나.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벽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배구가 끝난 건 아니었어.”


그러나 이제는 맥없이 꺾이지 않으리라. 오히려 상대를 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 운명은 배구 같은 놀이도 아니고, 승패도 다 정해져 있어.


오이카와가 어둠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의 법칙은 너도 알지? 미로에서 오른손을 벽에 대고 가다 보면 반드시 출구에 도착한다는 법칙. 시데라티오 의식은 나침반이고, 오른손의 법칙이야. 올바른 출구에 도착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고 내 출구는 파멸이야. 거기에 도착할 바엔 아예 미로에 들어서지 않는 편이 나아.


그럴지도 몰라. 


그러나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린 시절 난롯가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렸다.


“우리는 나침반을 보기 시작한 후론 진짜 별을 보지 않게 되었는지도 몰라.” 


나침반은 물론 유용한 물건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침반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그는 선생에게 배운 게 하나 더 있었다. 나침반을 보지 않고도 길을 찾는 법을.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대신 진짜 별을 보고 가면 돼.”

-그렇다고 한들 다른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흘러가는 기억의 어느 날 속에서 공주가 말했다. 



‘오른손의 법칙 말하는 거야? 바보 아냐? 미로라는 게 전부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잖아. 출구가 입구랑 같은 벽면을 공유할 때면 몰라도 출구가 미로 내부에 있을 땐 그 법칙으론 못 찾아.’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을 수 있어.”


-그 다른 출구란 게 대체 있길래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해?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도 빛은 흘러들어온다.


“내 안에.”


오이카와는 눈을 뜨고 줄곧 붙잡고 있던 어둠을 손에서 놓았다.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펼쳐 마침내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여기로 가시오.’ 방향을 가리키던 나침반은 이제 없었다.


“아마 의식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찾아야겠지. 엄청 헤맬 거고. 그래도 찾을 수 있어.”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오이카와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오이카와는 사라질 뻔한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시합 전에 동료들에게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료들이 그에게 말했다. 믿는다.

 

분명 운명은 쉽게 꺾일 상대가 아니다. 삶은 계속 고통스럽게 그를 짓누르고, 어쩌면 비극은 꺾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운명보단 자신을 믿어주는 동료들을 믿기로 했다.


“믿으니까.”


그는 저주 받은 마왕 오이카와 토오루이기도 했지만, 주장인 오이카와 토오루이기도 했으므로. 




그렇기에 그는 미로 속으로 한 발 내디뎠다. 컴컴한 미로 속에서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벽에 갖다 댄 오이카와는 피식 웃고는 아주 조심스레 손을 뗐다. 



줄곧 오른손을 벽에 댄 채로 살아왔다. 

항상 불행을 더듬으며 한쪽 팔로만 행복을 찾는다고 허우적댔다. 그리하여 기껏 잡은 행복마저 완전히 붙잡지 못하고, 그 끄트머리만을 잡은 채 의심했다. 


늘 불행해 하는 습관을 들였다. 

오로지 불행만을 의지해 발밑도 믿지 못하고 벽을 확인하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야 오이카와는 온전한 양손으로 길 위에 선다.


미로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으며 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마법으로 손안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눈부신 광경이 펼쳐졌다. 그의 오른손에 긁힌 상처를 냈던 수정이 먼저 푸른색으로 반짝이며 옆에 붙은 수정을 비췄다. 벽의 수정은 빛을 받자 주홍색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옆의 수정으로, 옆의 수정은 또 그 근처로. 제각기 다른 빛이 섞여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이윽고 그의 주변은 눈부시게 밝은 하나의 빛 덩어리가 된다. 


가슴이 벅찰 만큼 아름다웠다. 자신이 꼭 별이 된 것만 같았다. 


그는 이전에도 이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왔던 길로 도망쳐야만 했던 때에. 


오이카와는 제 목에 건 목걸이를 더듬어보았다. 그것은 그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하나의 증표였으며, 가야할 길의 이정표이기도 했다. 그가 저주라는 이름의 동앗줄 대신 잡고 갈 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도망치지 않으리라.




목걸이를 쥔 채 수많은 광휘에 둘러싸인 오이카와는 봉인 당했던 자신이 어떻게 불꽃만큼은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마침내 깨닫는다.


별이 해에 가려 보이지 않더라도, 먹구름에 가리더라도, 빛이라곤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가 좌절하지 않고 길을 찾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불씨가 없더라도, 그래서 희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가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되어 마침내 길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며 촛불에 불을 붙여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이카와는 이번엔 두 손을 꼭 쥐어보았다. 빛을 쥐고 있는 손의 피부가 빨갛게 보였다. 피부 밑에 촛불처럼 붉고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삶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고통을 느끼고 피가 흐를 것이다. 불을 피우기 위해선 포기하지 않고 부싯돌을 몇 번이고 부딪쳐야 한다. 삶과 몇 번이고 부딪치며, 그리하여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도 불티와도 같은 온기를 간직한 핏방울로부터 불꽃은 태어난다. 


자신을 위해, 다른 이들을 위해 촛불을 켤 수 있는 불꽃이다.




출구를 찾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고 있는 그의 머리엔 뿔이 돋아나 있고 눈동자는 태양처럼 붉게 빛난다. 


아직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도록 하자. 다시 한번 모두와 마주하기 위해. 




이번엔 그가 모두를 위해 촛불을 켤 차례이다.





-2부 밀과 소금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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