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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6 본문

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6

SaKuya! 2016. 5. 4. 20:34




16.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하녀들이 그를 보고 급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거동이 불편해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던 두베 공과 마주친 그는 인사를 나눈 뒤 한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의 방은 아니었다. 바로 옆방이었다. 오이카와는 머뭇거리다 문고리를 돌렸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잘 정리된 방의 침대 위엔 사람 대신 검은 망토만이 곱게 접힌 채 놓여 있을 뿐. 오이카와는 망토를 향해 팔을 뻗었으나, 차마 그걸 만지진 못 하고 머뭇거리다 손을 거뒀다. 


두꺼운 벨벳 커튼을 여니 창문 밖에 뽀얗게 성에가 끼어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겨울이 왔음을 인정해야 했다.


“폐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문밖에서 하녀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와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있던 귀족들이 정중하게 인사한다. 

왕이 긴 식탁에 앉자 그들도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공작 다음으론 후작, 후작이 앉은 후엔 백작이 앉았다. 


백작보다 낮은 귀족은 낄 수 없었기에 시미즈 백작이 자리에 앉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인들이 분주히 요리를 날랐다. 전채요리로는 송아지 고기를 곱게 갈아 생크림과 채소와 송로버섯 따위를 넣고 둘둘 만 뒤 스톡에서 익힌 부드러운 갤런틴이 나왔다. 약간 짭조름하게 간이 되어있는 고기는 혀 위에서 녹듯이 허물어졌지만 오이카와는 별 감흥도 없이 음식을 삼켰다. 


알코르 후작이 혼기가 꽉 찬 자신의 딸 이야기를 꺼내자 두베공도 은근슬쩍 자신의 손녀딸도 슬슬 시집갈 때가 되었다며 오이카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오이카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물을 씹었다.


“용사 일행이 트리시드 사막까지 왔다고 하더군요.”


계속 대화에 끼지 않고 있던 시미즈 백작이 그 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여전히 관심 없는 듯 입안의 고기를 씹으며 접시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으나, 포크를 든 손은 접시 위에서 멈춘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하들을 보내 죽일까요?”


시미즈가 그를 보며 높낮이가 거의 없는 억양으로 물었다.


“…맘대로 해.”


오이카와는 입에 든 음식물을 겨우 삼키며 마지막 남은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입 안에 음식이 있을 땐 말하지 않는다는 귀족의 예의는 제법 유용했다. 먹고 있을 땐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곱게 갈린 고기에서 눈물 맛이 났다.


“용사 일행도 불쌍하군요. 다른 곳도 아니고 트리시드 사막 쪽으로 오는 바람에 시미즈 백작께 걸리다니.”

“곱게 죽진 못 하겠죠.”

“네. 곱게 죽이진 않을 겁니다. 괜찮겠죠?”


하인이 깨끗이 비워진 접시를 치우고 수프를 내왔다. 맑은 콘소메 수프는 작은 크루통 외엔 건더기가 없었다. 그는 일부러 이를 사용하지 않고 혀 위에서 크루통을 굴렸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작은 빵 조각은 금세 흐무러져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대답을 원하는 시미즈의 눈빛이 흡사 얼음송곳처럼 그의 신경을 콕콕 찔렀다.


“맘대로 하라고 했잖아!”


투명한 수프 위로 비치는 오이카와의 모습이 흔들렸다. 고요한 표면이 송곳에 깨져버린 탓이다. 귀족들의 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그에게 일제히 쏠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에게서 등을 돌렸다.


“속이 안 좋아서 먼저 실례.”


귀족들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식당을 나와 버린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계단을 올랐다.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떠보는 듯한 시미즈의 눈빛이 짜증 났다. 기어이 겨울이 와버린 것이 짜증 났다. 

용사 일행이 빨리 와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는 짜증 낼 일도, 비참해질 일도 없을 테니.




잠시 성 안을 배회하던 그는 자신의 방과는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걸음을 멈춘 곳은 어떤 장치도, 마법도 걸려있지 않은 평범한 백색의 나무문 앞. 그 너머엔 그가 인간계에서 납치해온 공주가 머물고 있었다. 

한창 식사 중인 공주는 그를 보고 고개만 가볍게 한번 까딱인 뒤, 다시 먹는 데에 집중했다. 그는 묻지도 않고 맞은편 자리에 앉아 빵 하나를 집어 들고 나이프로 버터를 듬뿍 발랐다.


“용사 일행이 트리시드 사막까지 온 모양이야.”

“그거 내가 먹으려고 했던 건데.”


오이카와가 빵을 크게 베어 물자 공주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대체 왜 자꾸 여기 와서 먹는 건데?”

“귀족들은 불편해서.”

“그럼 혼자 먹어.”

“왕씩이나 돼서 처량하게 혼자 밥 먹기 싫어.”

“왕이 혼자 밥 먹는다고 뭐라 할 간 큰 놈도 없잖아.”

“그래도 싫어.”


그가 남은 빵을 입안에 욱여넣는 걸 보고 있던 그녀가 물었다.


“왜? 외로워서?”


그가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빵만 우물거리고 있었기에 공주는 다시 말을 꺼냈다.


“연인이랑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면서?”

“…안 사라졌어.”


빵을 삼킨 오이카와는 목이 막히는지 공주에게 묻지도 않고 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라 단숨에 마셨다. 입안을 꽉 채우는 바디감의 포도주는 식도로 넘어간 후에도 무거운 침묵 같은 여운을 남겼다. 그는 이번에도 공주가 말을 걸 때까지 여운을 지키고 있었다.


“안 사라졌으면? 어디로 갔는지 알아?”

“…사 일행에.”

“뭐?”

“용사 일행에 합류했다고.”


그녀는 그의 말이 납득가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마족이 용사 일행에?”

“내가 아주 나쁜 마왕이라서? 이렇게 인간계에서 공주까지 납치했고.”


오이카와가 빙긋 웃으며 양팔을 벌리자 공주는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쳤다.


“네가 날 납치한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용사 일행이 마계로 온지는 좀 됐고.”

“아무렴 어때.”


그는 가볍게 하하 웃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으로 보였으나 어깨는 물먹은 솜처럼 쳐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서 미약하나마 체념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 무얼 체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어떤 녀석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그는 그녀의 불평 섞인 말을 듣고도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긴커녕 더 크게 웃었다.


“나도.”




용사 일행이 사막까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나? 나를 떠나간 자들에 대한 배신감인가? 아니면 아직 그들이 살아있어서 안심했나? 어쩌면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였나? 아니면 드디어 내 저주가 막을 내릴 것이라는 안도감이었나?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내면의 감정은 쉽사리 정의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로서는 아직 정의내릴 수 없는 무척 복잡한 집합체(Complex)일지도 모른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뭘 해야 하는지는 알아. 오른손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걸어가는 거야. 그러면 정해진 출구가 나오겠지. 미로는 다 그런 법이니까.”


그러면 된다. 산다는 건 미로를 걷는 것과 같지만 시데라티오 의식이, 별이 말해준 대로 정해진 길을 걷다 보면………. 그러나 공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른손의 법칙 말하는 거야? 너 바보 아냐? 미로라는 게 전부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잖아. 출구가 입구랑 같은 벽면을 공유할 때면 몰라도 출구가…”




“오이카와상!”




오이카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떴다? 언제는 눈을 감고 있었나? 그는 혼란스러워하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카게야마와 이와이즈미가 밑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려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팔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을 내려 보니 나뭇가지 같은 촉수가 온몸을 칭칭 옭아매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당황한 오이카와가 다리에 힘을 주자 촉수는 움찔하더니 그의 다리를 기어올랐다. 소름이 쫙 돋았다.


“으아아아!”

“조금만 참아! 곧 구해줄 테니!”


이와이즈미는 촉수의 밑동을 베어내려 했으나, 여러 개의 촉수가 단단하게 꼬여있는 밑동에 겨우 작은 흠집을 내는 게 고작이었다. 


허나 그게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촉수는 잠시 휘청거렸다. 흔들리는 촉수 안쪽에서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이즈미가 다시 칼을 치켜들자 촉수는 기둥 가운데를 벌리며 틈을 만들었다. “히히잉!” 또 울음소리. 아까보다 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그 소리는 말 우는 소리와 비슷했다. 틈새 안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가 긴장하며 한 발짝 물러나자 틈새에서 또 다른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닥. 다그닥. 다그닥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

“네.”


이와이즈미가 그들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빛 하나를 촉수 쪽으로 보내자 카게야마는 언제든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활시위를 당겼다. 잡혀있는 오이카와도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키고 부자유한 상체를 최대한 숙여 아래를 바라봤다. 


촉수 안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근육질의 갈색 몸에 검은 갈기를 가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말이었다. 또한 오이카와가 타고 온 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앗! 내가 타고 온 말! 무사했구나!”

“아닐걸.”


반가운 기색까지 느껴지는 오이카와의 말을 단박에 잘라내며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카게야마가 당긴 활줄을 놓았다. 제게로 화살이 날아오자 말은 번쩍 뛰어올라 피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뛰어올랐다 내려오는 말의 몸체가 천천히 푸른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도약하며 위를 향해 너울거린 검은 갈기는 중력을 무시하고 위로 솟은 채 투명하게 바뀌었다. 

땅에 다시 발이 닿을 때쯤엔, 평범했던 말은 푸른색의 철갑을 두르고 가시 같은 수정 갈기를 가진 평범하지 않은 생물체로 변해있었다.


“나이트메어인가.”


번거롭게 되었다며 이와이즈미가 혀를 찼다. 


나이트메어라고 불린 그것은 시퍼런 안광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콧김을 내뿜었다. 나이트메어는 두어 번 발을 구르더니 앞발을 크게 들며 “히히잉!” 하고 크게 울었다. 그러자 기둥을 이루고 있던 촉수들이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촉수는 내가 처리할 테니 나이트메어를 맡아!”


어두운 색의 촉수들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다. 아까 촉수 밑동이 잘리지 않던 걸 기억해낸 이와이즈미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력을 전부 개방한 뒤 단숨에 끝내버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신전 놈들이 뭔가를 감지할지도 모르니 신중해야 했다. 


조금 더 개방한 마력으로 검신에 검기를 둘러 촉수를 베며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에게 외쳤다.


“다리! 오른쪽 다리가 약점이야!”


이와이즈미의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이번엔 나이트메어의 오른쪽 다리를 노려 활을 쏘았다. 그러나 나이트메어는 또 폴짝 뛰며 화살을 피하곤, 성이 났는지 주둥이에서 커다란 바늘 같은 얼음 조각을 뿜어냈다. 카게야마는 몸을 구르며 얼음 조각을 간신히 피하긴 했으나 이와이즈미가 벤 촉수 파편에 걸린 망토 끝부분이 북 찢겨나갔다. 


“괜찮아?!”

“걱정 마십시오! 금방 구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며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완전히 짐만 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두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제 몸을 꽁꽁 묶고 있던 촉수의 절반 정도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이 촉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얌전히 구조를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몸에 힘을 주고 조금씩 비틀었다. 


하지만 촉수는 이와이즈미와 카게야마를 공격하는 와중에도 그가 빠져나가려는 걸 눈치채고 느슨해져 있던 줄기를 콱 조였다.


“컥!”


오도 가도 못 하게 꽉 묶여버린 오이카와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아무래도 상황이 악화되어버린 것 같다. 


다시 몸이 결박된 건 괜찮다. 제 무능함에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 거시기한 부분의 통증은 아무리 그라도 해도 참기 힘든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거시기한 고통에 파들파들 떨면서도 어떻게든 촉수를 민망한 부분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꼼지락거렸지만 촉수는 야속하게도 그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배려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압력에 입에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으아아악!”

“오이카와상?!”


처절한 비명소리에 나이트메어와 고전 중이던 카게야마가 그를 돌아봤다. 멀리서 보기에도 오이카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 나 좀 빨리 구해줘!”


카게야마를 노리고 덤벼드는 촉수 하나를 베어내며 이와이즈미가 소리쳤다.


“지금 구해주려고 이러고 있잖아!”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끄아악!”


오이카와는 괴로움에 괴성을 지르며 그나마 자유로운 머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왜 그러는 건데 대체?!”

“그게…그게…촉수가…!”


발버둥 칠수록 촉수가 조여 왔다. 말 못 할 부분이 말도 못 하게 아팠지만 오이카와는 필사적으로 말해야만 했다.


“이, 이 녀석이 거, 거기를…이러다가 터지겠다고!”

“어디 말입니까?”

“거기!”

“그니까 그게 어딘데!”


아파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왜 자꾸 못 알아듣고 계속 물어보는 거야! 


오이카와는 눈물을 머금고 빼액 소리쳤다.




“거시기! 나 이러다 고자 되겠다고!!”




잠시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긴 한데.”


마침내 김이 팍 빠져버린 목소리로 입을 연 이와이즈미를 카게야마는 어쩜 그럴 수 있냐는 얼굴로 돌아보며 소리쳤다.


“전 완전 알 바인데요!”

“아무래도좋으니까빨리구해줘제발요부탁입니다아악!”


마음이 급한 나머지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로 내뱉는 구조요청의 마지막은 흡사 단말마의 외침 같았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진 카게야마는 활 끝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나이트메어는 말의 모습답게 재빠른 것이 상대하기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가만히 있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경로를 예측해 조준하기도 어렵거니와, 화살을 쏴도 신속하게 피해버린다. 거기에다 입에선 무른 살쯤은 단박에 베어버릴 얼음송곳을 쏘아대기까지 하고. 


제게 날아오는 날카로운 얼음을 피해 몇 번이고 땅을 구르던 카게야마의 망토는 이미 더러워져 있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가만히 있으면…….’


이와이즈미가 미처 쳐내지 못한 촉수와 나이트메어의 얼음 공격을 피하면서도 시선을 끈질기게 나이트메어에 두고 있던 카게야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상!”


화살 통에 화살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화살 하나를 활시위에 걸고 이와이즈미의 곁까지 달렸다. 달리던 그가 멈춰 서자 나이트메어가 앞발을 크게 들며 포효했다. 

울부짖는 괴물의 입가로 창백한 마력이 모여들었다. 냉기가 소용돌이치며 날카로운 얼음의 형상으로 변하자 카게야마가 등 뒤의 이와이즈미에게 말했다.


“딱 한번만 막아주십시오.”


촉수들은 카게야마가 말하는 그 순간에도 계속 사납게 달려들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막아달라는 건 지금 상대하고 있는 촉수뿐만은 아닐 터였다. 이와이즈미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이트메어가 주둥이를 흔들며 괴성을 내지르고 얼음송곳을 뱉어냈다. 그들을 조준하기 위해 잠시 멈춘 그 짧은 찰나를 카게야마는 놓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얼음 밑을 지나갔다. 촉수를 잘라낸 이와이즈미는 검을 세운 채 카게야마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돌았다. 그의 몸을 따라 검신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었다.


카앙! 


뾰족한 얼음이 검기로 감싼 검에 부딪혀 고막을 때리는 파열음과 무수한 조각으로 깨져간다. 


그리고 뒤이어 나이트메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쳐들고 울며 나이트메어는 비틀거렸다. 오른쪽 다리 근육을 뚫은 화살대를 따라 붉은 피가 흘렀다. 얼음 바닥 위로 더운 피가 번진다. 

카게야마가 다가오자 나이트메어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도망치려 했으나 제대로 서지도 못 하고 무너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얼음을 뿜어내던 주둥이가 쉭쉭거리며 더운 숨을 뱉었다. 


카게야마는 얼음 갈기의 나이트메어를 앞에 두고 두 눈을 부릅뜨며 활을 들어 올렸다. 악몽에서 깨기 위해선 눈을 떠야하는 법이다. 


예리한 화살촉이 나이트메어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았다. 


말이 목에 화살을 박은 채 쓰러지자 오이카와를 옴짝달싹 못 하게 잡아매고 있던 촉수가 그 시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엔 한 가닥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나이트메어가 끝난 것이다.


“으악! 아야야…….”


붕 떠 있다 갑자기 촉수가 사라지는 바람에 내동댕이쳐진 오이카와는 바닥을 구르며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딪힌 등과 어깨가 고통을 호소했지만 민망한 거기가 아픈 것보단 훨씬 나았다.


“오이카와상! 괜찮으십니까?!”

“으…어디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으니 괜찮아.”

“거시기도 괜찮으십니까?!”


헐레벌떡 달려온 카게야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바람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다리 사이를 더듬어보며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괘, 괜찮은 것 같아.”

“정말입니까? 섭니까?”

“크흠!”


당장에라도 세워볼 기세인 카게야마를 말린 건 이와이즈미의 헛기침 소리였다.


“그런 건 둘이 있을 때 해라.”


이와이즈미는 민망한지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하며 주변을 휘둘러봤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아. 소란을 피웠으니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올 거야.”

“근처에 출구가 있지 않을까? 보스로 보이는 놈도 여기 있었으니까.”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나이트메어를 가리키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저게 보스라고 단정 지을 순 없어. 입구가 이동해 다닐 정도인 던전이 이렇게 짧을 리도 없고. 출구를 찾으려면 몇 날 며칠은 걸릴걸.”


며칠씩이나 걸린다는 말에 오이카와는 입을 떡 벌렸다.


“이런 곳에 며칠씩이나 있어야 해?!”

“아니, 그러니까 그건 던전을 공략한 뒤 출구로 나갈 때의 얘기고…….”


이와이즈미는 그들이 걸어온 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던전 공략은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서 입구 쪽으로 나갈 거야.”


길에 표식을 해두었다며 이와이즈미가 앞장섰다. 




되돌아가는 길 벽면의 수정이 빛을 품는 것을 보며 오이카와는 쓰러진 나이트메어를 힐끔거렸다.


“나이트메어는 어떤 몬스터야?”

“말 그대로 악몽을 보여주는 몬스터. 가장 괴로웠던 시절의 악몽을 보여주고 그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촉수를 통해 빨아들여서 양분으로 삼아.”


오이카와는 무언가를 고민하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괴로웠던 시절 말인데……”

“크르르르…….”


그가 다시 운을 떼려 할 때, 모퉁이를 돌아오던 몬스터가 그들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냈다. 동료를 부르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며 이와이즈미가 단숨에 도약해 몬스터의 가슴팍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짧은 비명만을 남기고 몬스터가 쓰러졌는데도 이와이즈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뒤에서도 따라올 테니 얼른 가자.”


아무래도 느긋하게 이야기나 할 시간은 없는 것 같다. 이와이즈미가 시동어를 입에 담자 바닥에 꽃문양 같은 것이 떠오르며 은은하게 빛났다. 그것을 밟자 문양의 빛이 꺼지고 앞쪽에 똑같은 문양이 떠올랐다. 남겨두었다는 표식이 바로 이 문양인 것 같다.

 

갈림길에 서자 왼쪽 길에서 꽃문양이 빛났다. 바닥의 불빛을 따라 빛이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비추어주고, 나아가야 했던 등 뒤는 다시 새카만 어둠이다.




“여기네.”


문양이 더는 떠오르지 않는 지점에 멈춰 서서 이와이즈미는 위를 바라보았다. 아직 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이 자신들이 들어온 입구임은 알았다.


이와이즈미는 검을 집어넣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 그들의 발이 땅에서 조금씩 떨어지고, 주문을 읊는 단조로운 음성에 바람 소리가 섞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빛이었다. 던전 안을 헤매는 동안 날이 저물었나 보다. 머리 위로 별빛과 나무 이파리가 쏟아진다.


“무사히 나온 것 같네.”


잠시간의 비행이 끝나고 땅에 다시 발이 닿자 뺨에 닿았던 나뭇가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숲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여기 아까 우리가 있던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보던 이와이즈미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등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날이 밝으면 다시 길을 찾아보는 수밖엔.”


그래도 초원인 걸 보니 동쪽 사막이긴 한 모양이라면서 그는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던전에 들어가면서 말들도 놔줘 버렸는데 푸루스까진 얼마나 더 걸릴까. 꼬여버린 일정에 골치가 아팠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침낭을 꺼내 그 위에 누웠다. 생각보다 마력을 많이 쓴 탓에 마력제어 팔찌가 델 듯이 뜨거웠다. 간단하게 추적방지 주문을 걸고 이와이즈미는 자리에 앉았다.


“나 오늘은 불침번 맨 마지막으로 해주라.”

“네. 그럼 제가 먼저 서겠습니다.”

“고맙다.”


짧은 감사인사 후에 이와이즈미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계속 몸을 뒤척였다. 지치긴 했으나 던전에서 만났던 나이트메어가 신경 쓰여서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나이트메어가 보여준 게 ‘나’의 가장 괴로웠던 기억이라고?


오이카와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지금까지는 무슨 말을 들어도, 책을 읽어도, 투명한 유리 벽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다. 자신의 과거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인지도 대충은 가늠할 수 있다. 그것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것도 알고, 스가와라와 거래할 때엔 막연한 책임감도 느꼈다. 그렇지만 그 무게감은 생각보다 빨리 옅어지고, 모든 것은 아직은 벽 밖의 일에 가까웠다. 아직 힘과 기억이 봉인된 채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던전에서, 나이트메어가 보여준 악몽 속에선 어떠했나? 자신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나? 마치 봉인 따윈 없었다는 듯이.


애초에 어디까지가 현실이었고 어디서부터가 꿈이었는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서 밥을 먹는 건 싫다던 왕을 떠올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보았다. 오이카와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인지 왕이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나도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하는데.”


이유는 모른다. 언제부터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싫었다. 만약 그 이유가…….


“안 주무십니까?”


카게야마의 나직한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상념을 깨뜨렸다.


“그냥 좀…잠이 안 오네.”


오이카와의 대답을 들은 카게야마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가 아직도 아프신 겁니까?”

“…거기가 아직까지 아프면 그건 정말 큰일이지. 고자 확정이라고.”

“확정인겁니까?!”

“지금은 안 아프니 확정 아니라고!”


오이카와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삿대질하자 카게야마는 다행이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 한 번밖에 못 써봤는데 불길한 소리 하지 좀 마.”


그가 투덜거림에 카게야마는 뺨을 긁적였다.


“아, 저흰 아직 한 번밖에 안 해봤네요. 책에서 보니 예전엔 꽤 자주 하던 것 같던데.”


오이카와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혼자 좋은 구경했겠네.”

“좋은 구경입니까?”

“그럼 아니야?”

“찜찜한 것도 같이 봐버려서…….”


음흉한 질문이었음에도 카게야마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찜찜한 것은 배신을 말하는 것이겠지. 의도치 않은 반응에 오이카와는 모포를 몸에 둘둘 말고 카게야마 곁에 앉았다.


“배신하는 부분은 아직 안 봤다고 했지?”

“네.”


카게야마가 그에게 책을 돌려주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며 책을 카게야마 쪽으로 밀었다.


“안 읽으십니까?”

“오늘은 됐어. 그보다도…그거 토비오쨩이 마저 읽지그래?”

“네? 하지만 뒤는 오이카와상을 배신하는 부분인데…….”


카게야마는 책을 들고 안절부절 못 하며 책장을 넘겨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그런 카게야마를 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여기저기 찢기고 엉망이 된 카게야마의 망토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악몽에서 그랬던 것처럼 망설이긴 했으나 이내 망토를 손안에 쥐어보았다. 올이 굵고 거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새 망토가 필요하겠네.”

“네? 아, 그렇겠네요.”


오이카와는 계속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뒷부분 말이야, 나도 같이 봐도 될까?”


네가 어떤 녀석인지 모르겠어. 머릿속에서 공주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그는 대답했다. 


나도.





∥10월 26일 아쿠벤스




“…방금 뭐라고…?”

“대왕님을 배신해주지 않겠냐고 말했어.”


농담하지 말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은데 쿠로오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래서 그는 바보처럼 말만 더듬었다.


“왜, 왜…….”

“안 그러면 대왕님은 죽을 테니까.”

“웃기지 마! 신전 놈들이 오이카와상을 해치게 둘 것 같아?!”

“가만두지 않으면?”


멱살이 잡혔는데도 쿠로오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가만두지 않으면 어쩔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나, 나는 아쿠벤스의 수호군단…군단장이고…또…….”

“또 우마왕의 동생이고, 이 나라에서 제일 비싼 창녀이기도 하지.”


쿠로오는 카게야마를 대신해 뒷말을 이으며, 제 멱살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괜한 전쟁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


카게야마의 어깨가 순간 크게 움찔했다.


“뭐, 두 왕 모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나랏일이라는 게 왕 마음대로만 되는 건 아니잖아?”

“오, 오이카와상은 그걸 막으려고…”

“나름대론 노력하고 있지. 신전은 여전히 가장 좋은 방법은 대왕을 제거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야.”


쿠로오는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덧붙였다.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싹은 미리 잘라버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니까.”


카게야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면 오이카와상을 배신하고 신전 편에 서도 오이카와상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니지.”


쿠로오는 고개를 저었다.


“대왕님을 배신하긴 하지만 신전 편에 서라는 건 아니야.”

“똑같은 거잖아요.”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러면?”


카게야마가 얼굴을 들자 쿠로오는 그의 이마에 검지를 갖다 대며 미소 지었다.


“용사.”


그 짧은 단어를 들은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었다.


“마족이 용사 편에 서라고?!”

“쉿! 목소리가 너무 크잖아.”


쿠로오가 카게야마의 어깨를 잡으며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다행히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안도하며 상체를 숙이고 소곤소곤 말했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셈이야?”

“당신이 어이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카게야마가 입술을 삐죽이며 그의 손을 쳐냈다.


“어이없을지도 모르지만 방법은 이것뿐이라니까?”

“왜 그것뿐입니까? 신전을 이길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아니. 다른 방법은 없어.”


쿠로오는 카게야마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부정했다.


“대왕님은 이길 생각이 없다고.”




복도를 걷는 내내 카게야마는 그 말의 의미를 고민했다. 


오이카와상이 이길 생각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던 카게야마는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손을 멈췄다.


“그러니까 돌려보내라고 하잖아!”


이와이즈미의 목소리 같았다.


“싫어.”

“그럼 어떡할 건데? 전쟁이라도 하게?”

“전쟁은 안 해.”


이와이즈미의 한숨 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왔다.


“신전에 꼬투리 잡힐 짓은 제발 하지 말라고. 너도 저주가 완성되는 건 싫을 거 아니야.”

“그래서 상회까지 만들었잖아.”


상회란 아마 폴룩스 상회를 말하는 거겠지. 신전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상회라고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어진 이와이즈미의 말은 카게야마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네 자살도구? 그딴 거 말고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비아냥거리는 게 역력한 어조였다. 자살도구라니? 상회는 오이카와상을 지키기 위한 게 아니었나?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설마 카게야마가 밖에서 듣고 있는 줄은 몰랐던 이와이즈미는 당황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먼저 정신을 차린 카게야마가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키자 이와이즈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떴다.


“들었어?”


방 안에서 오이카와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평소 같았으면 끄덕이고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흘려 넘겨버릴 수 없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안으로 들어간 카게야마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동안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오이카와상.”

“응?”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카게야마는 심호흡을 하고 오이카와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상의 저주 말인데요, 분명히 마계를 피로 물들인다는 거였죠?”


그에게 직접 저주에 관해 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설마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오이카와는 잠시 놀라긴 했으나, 곧 밝게 대답했다.


“응.”

“하지만 오이카와상은 그러지 않으실 거죠?”

“물론이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오이카와는 웃음을 거두진 않고 있었으나 이 주제에 대해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카게야마는 집요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되면요?”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웃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어쩔 수 없게 되면 뭐……내가 없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척이나 가벼운 농담처럼 들렸지만 눈치 없는 카게야마라도 그게 꼭 농담만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날 카게야마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을 꼴딱 새고 방을 나오는 그의 옆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무언가를 결심한 모양이다. 

쿠로오는 오늘도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쿠로오에게 걸어갔다.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   *   *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꼼꼼하게. 모든 걸 눈에 새겨두려는 듯이.


한참을 방 안을 둘러보던 그는 벽에 세워둔 활을 집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가 사르륵, 밑으로 떨어졌다. 망토를 줍기 위해 손을 뻗던 카게야마가 멈칫했다. 


검은 망토에 선명하게 금빛으로 수놓아진 왕가의 문장.


“…이건 가지고 가면 안 되겠지.”


카게야마는 망토를 집어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잠시 망토를 이마에 대고 있던 그는 이내 망토를 펼친 뒤 접기 시작했다. 


곱게 접은 그것을 들고 또 고민하던 그는 이내 그것을 침대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마침내 방을 나가며 카게야마는 보는 이가 없을 인사를 했다. 아마 다음번엔 느긋하게 인사를 나눌 시간 따윈 없을 것이므로. 


문이 닫힌다.


“안녕히 계십시오.”


가을도 이제 끝물이구나. 곧 겨울이 오겠구나.




그는 셔츠 깃을 세우며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쿠로오가 말한 협력자가 또 한명, 자신을 안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카게야마?”


그 협력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다.


“이와이즈미상?”

“설마 네가 나올 줄은…….”

“저도 이와이즈미상을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잘 부탁한다.”


이와이즈미가 먼저 침묵을 깨며 손을 내밀었다. 항상 못마땅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보던 이와이즈미건만, 카게야마가 손을 잡자 처음으로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힘든 결정이었을 텐데 고맙다.”

“이와이즈미상이야말로…….”

“나? 나야 뭐……. 그 녀석은 늘 손이 많이 갔으니까.”


이와이즈미가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들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카게야마의 안색은 어두웠다.


“이와이즈미상도 알고 계십니까? 이 계획이 성공하면 오이카와상은…”

“기억을 잃겠지. 전부.”

“이와이즈미상은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져야지.”


이제 슬슬 출발하자며 이와이즈미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발을 뗐다. 나무 위에서 낙엽이 툭 떨어졌다. 발을 옮기자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곱게 물들어 있었건만. 이렇게 떨어지면 나뭇잎은 그대로 끝나는 걸까.


“…저도…”


저도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응?”


이와이즈미가 뒤를 돌아 그를 쳐다봤다. 끝이 날카로운 가을바람이 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카게야마는 망토를 걸치지 않은 제 어깨를 쓸어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새 망토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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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plex: 복잡한, 집합체, (정신분석학적 개념의)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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