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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3

SaKuya! 2016. 4. 14. 21:06





13.

리 꼭대기에 떠 있던 해가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하말은 떠나는 그들에게 약초 두 뭉치를 건네주었다. 그중 한 뭉치는 독특한 향이 나는 허브였다. 아쉬워하는 알과 타르프에게 나중에 꼭 편지하겠노라 약속하는 세 사람에게 하말이 웃으며 “어차피 같은 상단에 있는 이상 언젠간 또 볼 텐데 뭘 그러나.”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 오빠가 있어서 불 피울 때 좋았는데.”

“뭐, 내가 유능하긴 했지.”

“몬스터들 잡을 땐 별 도움이 안 됐지만.”

“…아픈 데를 찌르지 말아 줄래?”


타르프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자 오이카와도 미소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 사람은 타르프가 머리가 새집처럼 되었다며 투덜거리는 걸 들으며 짐을 말에 싣고 안장 위에 올랐다. 알이 데리고 있던 새가 짹짹 지저귀었다. 새는 날고 싶은 듯 몇 번 날개를 푸덕거렸으나 알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음에 볼 땐 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


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의 날개깃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말발굽의 쇠로 된 판자가 흰 돌길을 다그닥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는 새와 새가 되고 싶다는 소년과 머리가 새집처럼 된 소녀 하나와 양을 닮은 사내가 손을 흔들고, 도시를 나서는 세 사람은 망토를 두른 걸로도 부족해 후드를 푹 눌러썼다. 거의 눈까지 가릴 정도로 후드로 얼굴을 덮은 탓에 누가 누군지 분간이 힘들 정도였다. 가게를 접고 나서는 인파들 틈에 섞여 성문을 나선 후에도 그들은 한참이나 후드를 벗지 않았다.


“강을 따라 흔적을 지우면서 푸루스까지 갈 거야.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게 항상 조심해야해.”


출발하기 전 이와이즈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유목민들의 뒤를 따라 말을 달리던 그들은 밤이 되자 슬쩍 무리를 벗어났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이와이즈미가 말발굽에 흔적을 지우는 마법을 걸고 나서야 오이카와는 후드를 벗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혹여 후드가 벗겨질까 이마를 흐르는 땀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있던 터라 땀에 젖은 앞머리가 구불거렸다.


“불 피울까?”


오이카와가 손바닥을 쫙 펴며 묻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됐어. 연기를 가리려면 또 마법을 써야 하고. 번거롭잖아.”

“그래?”

“응. 좀 추워도 참아.”


이와이즈미가 던져주는 마른 빵을 카게야마가 깔끔하게 받으며 말했다.


“오늘 불침번은 제가 먼저 서겠습니다.”

“나이스 캐치 카게야마. 그래도 되겠어?”

“두 분 다 피곤하실 테니까요.”


카게야마가 활시위를 당겨보며 대답했다. 어차피 유목민들도 지나다니는 동쪽 사막이니 그리 대단한 몬스터가 나오지도 않을 터였다. 




멀리서 들리던 유목민들의 말소리도 잦아들고, 이와이즈미는 오늘도 제 커다란 대검을 등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잠이 들었다. 


그의 검신에 투명한 별빛이 닿는 걸 보며 카게야마는 활대에 화살을 올려놓고 허공을 한 번 겨냥해보곤 활을 내려놓았다. 불침번을 서겠다고 자원하긴 했으나 피곤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자꾸만 눈이 아파왔다. 눈을 감은 채 눈두덩을 시원해질 때까지 꾹꾹 누르고 눈꺼풀을 여는 카게야마의 눈동자에 기괴한 그림자 같은 것이 포착되었다. 


밤보다 시커먼 그림자는 강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흐른다’에 가깝게 움직이고 있었다. 낡은 천 옷 같은 끝부분이 강물을 따라 기분 나쁘게 펄럭이는 걸 보며 카게야마는 침을 꼴깍 삼키고 활을 겨누었다. 화살촉이 반짝였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그것과 눈을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퀭한 눈동자 안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림자는 그 몸의 형태만큼은 사람과 비슷했다. 그림자가 끝을 질질 끌며 그에게로 흐르기 시작하자 카게야마는 “칫” 하고 혀를 차며 활시위를 당겼다. 


빠르게 두 발. 각각 머리와 심장 부근이었다. 화살은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그림자에 명중했지만, 그림자는 은색 촉을 몸에 박은 채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거리를 좁혀왔다.


“이와이즈미상! 오이카와상!”


그림자가 보통 마물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은 카게야마가 황급히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속도를 높인 그림자가 손톱을 세우며 그들을 덮쳤다. 


“으윽!”


재빨리 옆으로 구르며 검을 든 이와이즈미와 달리, 누워있던 오이카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림자에게 붙잡혔다. 오이카와의 네 번째 손가락을 빙 두르고 있던 꽃반지가 툭 끊어져 땅 위로 떨어졌다.


“오이카와상!”

“으윽!”


카게야마가 재빨리 또 화살 한 발을 쏘았으나 그림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이카와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소용없어. 저 녀석은 고통을 못 느껴.”

“네? 대체 정체가 뭐길래…….”

“악령이야. 사막의 악령. 유목민들에게 들은 적 있지? 사막에서 길을 잃고 결국엔 자신까지 잃어버리는 자들이 있다고.”


악령은 오이카와의 얼굴을 앙상한 손으로 콱 잡고 그 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시커멓고 텅 빈 눈동자에 오이카와는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아주 잠깐, 그 안에서 어리고 뿔이 달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눈앞이 흐려졌다.


“오이카와! 불!”


그의 멀어져가는 의식을 이와이즈미의 고함이 붙잡았다. 오이카와는 정신을 집중하고 손바닥을 펼쳤다. 뜨거운 기운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그림자는 불꽃에 화들짝 놀라 오이카와에게서 떨어졌다. 불이 두려운 듯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숨으려들자 이와이즈미가 카게야마에게 소리쳤다.


“다리를 노려!”


은색. 두 발의 화살이 다시 밤을 갈랐다. 


다리를 다치자 눈에 띄게 느려진 그림자에 이와이즈미가 칼날을 박아 넣었다. 그는 팔에 힘을 주고 검으로 횡을 그렸다. 썩었으나 단단하게 굳어있던 살덩어리가 반으로 갈라지자 이와이즈미는 시커먼 찌꺼기가 묻은 검을 털어내며 팔찌를 흔들었다. 


허공에 대고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왼 뒤 이와이즈미는,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숨을 헐떡대고 있는 오이카와를 돌아봤다.


“오이카와, 불붙여.”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손에 불을 피웠다. 거무튀튀한 살점에 손을 대는 게 꺼림칙한지 잠시 머뭇거리던 오이카와는 눈을 질끈 감고 악령 토막에 불이 타오르고 있는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불꽃이 화악 피어오르며 까만 덩어리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깜짝이야.”


엉덩방아를 찧은 오이카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투덜거렸다.


“오이카와상! 어깨…어깨는 괜찮으십니까?”


한달음에 달려온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옷자락에 작게 스민 피 얼룩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새하얗게 질려서 입술을 깨무는 카게야마에게 오이카와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괜찮아. 별로 깊이 박힌 것도 아닌걸. 손톱이었잖아.”

“그래도 소독은 해야 할걸.”

“맞습니다! 얼른 상처 보여주세요!”


두 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오이카와는 상의를 벗었다. 맨살에 닿는 찬 공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오이카와가 어깨를 움츠리자 카게야마가 움직이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잡고 상처를 살폈다. 


그의 말대로 상처는 깊지 않았다. 다만 악령이 그에게서 떨어지며 손톱으로 피부를 긁었는지, 어깨에 길게 나 있는 붉은 줄엔 아직 피가 방울져있었다. 이와이즈미가 물로 상처를 한 번 씻어내는 동안 카게야마는 제 옷자락 끝부분을 잡고 손아귀에 힘을 줬다. 생각보다 잘 찢기지 않아 초조해진 카게야마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드디어 부욱 소리를 내며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자 카게야마는 한숨 돌렸다는 듯 손에서 힘을 빼고, 천 조각을 오이카와의 어깨에 가져갔다.


“이렇게까지 할 만한 상처는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네, 네. 토비오쨩 맘대로 하세요.”


오이카와는 졌다면서 양 팔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콧잔등을 찡그렸다. 


악령은 불에 바스러지며 매캐한 연기와 고약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불이 바닥까지 불안의 빛으로 비추었다. 형편없이 끊어진 채로 떨어져 버린 꽃반지까지도.


“미안, 토비오쨩. 기껏 만들어줬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냄새 장난 아니네.”

“좀만 기다려봐.”


이와이즈미는 짐 더미를 뒤져 천 주머니를 하나 꺼내왔다. 입구를 단단히 묶어둔 줄을 푸니 독특한 냄새가 공기에 섞였다. 코를 찌르는 알싸한 익숙한 향. 말린 민트였다. 이와이즈미는 그 꽃이 달린 마른 풀을 꼭 한 줌만큼 쥐고, 성난 기세의 불더미에 던졌다. 그러자 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불길이 수그러들더니, 이내 아주 꺼져버렸다. 


그을린 땅 위에는 재만이 남았다.


“이제 끝났어.”

“방금 뭐한 거야?”

“일종의 제령의식 같은 거야. 악령이잖아.”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어깨에 묶어준 천이 혹시라도 흘러내릴까 조심조심 옷을 입으며 물었다.


“근데 그거 민트 아니야? 그런 걸로 제령이 돼?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선 막 성수도 뿌리고 기도도 하고 그러던데.”

“사막의 악령은 원래부터 악령이었던 게 아니라 자신을 잃고 아무것도 못 느끼게 되어버려서 악령이 된 거니까 이걸로 괜찮아.”


이와이즈미는 주머니 입구를 다시 줄로 둘둘 감아 봉하며 말했다.


“민트는 ‘다시 한번 사랑하고 싶습니다.’란 말을 가진 꽃이거든. 이걸 악령이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태우면서 잃어버렸던 마음을 다시 한번 되찾길 비는 거야.” 


이와이즈미는 말린 민트 꽃이 든 작은 자루를 짐 사이에 밀어 넣고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일찍 두 분을 깨웠어야 했는데…….”


카게야마는 찢은 제 옷자락의 올 풀린 것을 만지작거리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잡을 수 있을 줄 알고…”


여태까지 만난 몬스터들은 전부 손쉽게 잡았으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 있게 불침번도 서겠다고 한 거였다. 하지만 이번엔 도움이 되질 못 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동쪽 사막엔 가끔씩 강을 따라 악령이 나온다는 걸 나도 잊고 있었거든. 플란타에서 가까운 이런 곳까지 악령이 나올 줄은 몰랐기도 하고.”


이와이즈미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악령은 불 근처엔 안 오니까 내일부턴 불을 피우면 괜찮을 거야. 흔적을 감추는 건 좀 번거롭겠지만 그렇게 하자.”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말에 “네.”라고 대답하는 카게야마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두 주먹을 꾹 쥐었다 한숨과 함께 펴고, 그는 밤새 손에서 딱딱한 활대를 놓지 않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다.




*   *   *




다음날, 오이카와는 웬일로 이와이즈미보다도 일찍 눈을 떴다. 카게야마가 관목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눈 밑이 거뭇한 게 밤을 꼴딱 새운 모양새였다.


“…설마 밤새 혼자 불침번 선 거야? 깨워서 교대하랬잖아. 그러다 몸 상한다.”

“전 괜찮습니다. 오이카와상이야말로…괜찮으십니까?”


카게야마는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진짜 괜찮다니까? 누가 보면 엄청 크게 다친 줄 알겠네.”


애초에 지혈씩이나 할 상처도 아니라면서 오이카와는 찢어진 카게야마의 옷 끝부분을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래도 푹 주무시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토비오쨩은 못 잤잖아.”


그는 침낭 밖으로 나오면서 혀를 찼다.


“눈이 빨가네. 토끼도 아니고. 일어나면 책이나 읽고 있으면 되는데 그냥 깨우지.”

“…불침번 서면서 딴짓 할 거라는 소리를 당당하게도 하네.”


어느새 일어난 이와이즈미가 몸을 쭉 펴며 오이카와에게 핀잔을 줬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는 이와이즈미의 옆에서 카게야마는 턱에 손을 대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책…”이라고 중얼거렸다. 다시 출발할 채비를 갖추는 동안에도 카게야마는 턱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짐 더미를 힐끗거리다,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오이카와상.”

“응?”

“어이, 슬슬 출발한다.”

“알았어. 토비오쨩 왜?”


무언가 말하려던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부름에 손을 내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오이카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에 올라타며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나중에라도 괜찮으니 말해줘.”

“네.”


마지막으로 카게야마가 말에 오르고 세 사람은 또 길을 나섰다. 




이와이즈미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오이카와와 카게야마가 나란히 따라왔다. 오이카와는 곁눈질로 카게야마를 슬쩍 바라봤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오한이 드는지 날이 더운데도 가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카게야마는 평소보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토비오쨩 괜찮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와이즈미상, 말 발자국이 그대로 남는 것 같은데요.”

“조금 있으면 지워질 거야. 걸어가는데 발자국이 아예 안 남으면 그것도 이상하잖아.”

“그렇군요.”


이와이즈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카게야마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피곤한 게 틀림없었다. 점심 먹을 시간까진 아직 좀 남아있지만 조금 쉬다 가자고 할까. 오이카와가 그렇게 생각하며 이와이즈미를 부르려고 든 순간, 카게야마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옆쪽에서 흰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몬스터일까 싶어 화살을 활시위에 걸자마자 말을 탄 소년이 흰 것을 몰고 가버린다. 양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괜한 경계를 몇 번씩이나 하고 나자 진이 빠진 카게야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카게야마가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내자 그를 계속 아무 말 않고 지켜보고 있던 오이카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기 이와쨩? 좀 쉬었다 가지 않을래? 슬슬 배도 고프고.”

“넌 뱃속에 뭐가 들었냐.”

“글쎄? 꽃미남?”

“얼씨구.”


어이가 없어진 이와이즈미가 혀를 차며 카게야마를 돌아봤다.


“카게야마, 좀 쉬었다 갈까?”

“네? 아…네.”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와이즈미의 음성에 카게야마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넓고도 낮은 초원엔 잠시 쉬어갈 그늘을 만들어줄 만한 나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다. 겨우 등이나 댈법한 바위 근처에 앉으며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바라봤다.


“토비오쨩, 잠깐이라도 좋으니 눈 좀 붙이지그래?”

“아뇨 전 괜찮습…”

“괜찮으니 쉬어둬. 어차피 초원이라 누가 오면 다 보이니 내가 보고 있는 걸로 충분해.”

“그럼 죄송하지만 조금만 쉬겠습니다.”

“…토비오쨩 내 말은 안 들으면서 이와쨩 말은 묘하게 잘 듣는 것 같은데 이거 내 착각인가? 응?”


카게야마가 이와이즈미의 말은 또 고분고분하게 듣자 오이카와는 투덜대면서도 카게야마의 머리를 제 어깨에 갖다 댔다.


“기대고 있어.”

“…감사합니다.”


까만 속눈썹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머리 위로 따가운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고 길이 없는 초원 멀리로는 양 떼가 거친 풀을 뜯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더운지 물을 연신 들이켜 가며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마른 빵 부스러기가 탐이 나는지 머리는 희고 등은 검은 딱새가 주변을 통통 뛰어다녔다. 그는 마지막 남은 빵 조각을 작게 부숴 새에게 던져주고 몸을 일으켰다.


“잠깐 물 떠올게. 금방 다녀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이와쨩은 오이카와상이 5살 어린이인 줄 알아요?”

“비슷하지 않냐?”

“아니!…거든.”


하마터면 큰소리를 낼 뻔한 오이카와는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다행히 카게야마는 미동도 않고 졸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강 쪽으로 걸어가는 이와이즈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제 옆을 바라봤다.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운 카게야마가 두 눈을 뜨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안 자고 있었어?”

“잠깐 잤습니다.”

“더 자지 왜.”

“괜찮습니다. 그보다도 오이카와상.”


카게야마는 눈을 내리깔며 오이카와의 옷자락을 잡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도 그…책을 읽어봐도 될까요?”

“책? 포르투나의 책 말이야?”

“네.”


오이카와는 짐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던 책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봐도 기억이 돌아온다는 느낌은 없으니 하루 정도는 토비오쨩이 대신 봐도 괜찮아. 근데 갑자기 왜?”

“혹시라도 오이카와상에게 도움이 되는 기억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오이카와는 여전히 밑을 향하고 있는 카게야마의 속눈썹을 내려다보다 손을 뻗었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내 걱정은 말고 토비오쨩 기억이나 찾을 생각 하세요.”

“하지만 제 기억은 어차피…”


마침 이와이즈미가 수통을 채우고 돌아왔기에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조금 더 쉬고 세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쉬어간 만큼 속도를 좀 더 높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와이즈미의 판단에 그들은 쉴 새 없이 초원을 가로질러갔다. 




저녁 무렵엔 말도 그들도 지쳐버렸다. 이와이즈미가 입가에 거품이 날 지경인 말들을 토닥여주며 불을 피워도 발각되지 않도록 주변에 마법을 쓰는 동안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에게 책을 내밀었다. 


책은 카게야마의 손에 들어가자 책장이 푸르게 빛났다.


“근처에서 불 붙일만한 마른 나뭇가지를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와이즈미는 손가락 끝에서 불을 피워내더니 그걸 입가에 대고 훅 불었다. 그러자 불덩어리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며 빛났다.


“없으니 마법이라도 써야지.”

“앗! 반칙!”

“뭐가?”

“불 피우는 건 오이카와상 역할이거든요?”

“내가 하는 게 더 편한데.”

“안돼! 그러면 내 의미가 없잖아!”


그 말에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했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며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굳은 표정으로 표지를 천천히 넘겼다.





‖10월 아쿠벤스




비리디아에서 가장 찬란한 곳은 어디인가? 바로 왕이 있는 아쿠벤스이다.

그런 아쿠벤스의 왕궁쯤 되는 곳에 있다 보면, 비록 그걸 원치 않더라도 무성한 소문에 휩싸이곤 하는 법이다. 


비유하자면 오이카와는 태풍의 눈이었다. 주변에서 대놓고 말하는 이는 없을지언정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면 사정없는 소문에 당장에라도 중심을 잃을 것만 같은.

그래서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곁에 아예 붙어있거나, 아니면 아주 떨어져 있는 걸 마음 편해 했다. 부하들도 자신을 영 기꺼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뿔 달린 이들이 휘두르는 비단부채보단 나았다. 


허나 매년 이맘때면 곡창지대를 습격해오는 하피들의 토벌도 끝난 이상 더는 수도 밖에서 머물 핑곗거리가 없었다.


밖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망토를 두르고 천막 밖으로 나가자 부하들이 경례를 하면서도 시선을 피했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망토 깃을 세우던 카게야마는 그들이 왜 자신의 눈을 피하는지를 눈치채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가 두르고 있는 망토 끝자락마다 금사로 왕가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오이카와가 직접 둘러준 망토였다. 


도망치듯 천막 안으로 돌아온 카게야마는 제 어깨 위에 걸쳐진 망토를 거칠게 잡아 뜯듯 벗어던졌다. 털썩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던 그는, 곧 한숨을 쉬며 일어나 내팽개쳐둔 망토를 곱게 개키고 다짐했다. 아쿠벤스에 도착할 때까지 걸치지 않으리라.




이윽고 아쿠벤스로의 귀환일, 축제를 좋아하는 왕은 망토도 걸치지 않고 돌아온 개선장군을 위해 또 파티를 열었다. 

카게야마는 생글생글 웃으며 저에게 다가오는 왕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뒤통수에 날아드는 시선들이 술에 비치는 불빛과도 같이 맹렬하게 싸늘했다.


“수고했어, 토비오쨩.”

“별거 아니었습니다.”


오이카와는 시끄러운 걸 썩 좋아하지 않는 카게야마를 능숙하게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이끌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시선의 중심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카게야마는 제 양 뺨을 잡고 눈을 마주치는 오이카와의 손을 슬쩍 밀어냈다.


“보는 눈이 많은데요.”

“그럼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선 더한 짓 해도 괜찮아?”


기가 막힌 카게야마가 오이카와를 흘겨봤으나 오이카와는 그 잘난 얼굴로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이래선 맘대로 화도 못 낸다.


“맘대로 하십시오.”


카게야마가 한숨 섞인 체념의 말을 내뱉자 오이카와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희고 긴 손가락으로 카게야마의 목덜미를 훑어 내렸다. 오싹해질 만큼 성적인 의도를 담고 있는 손짓이었다.


“피곤하지? 먼저 가 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오이카와의 손이 목덜미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카게야마는 찌르는 듯한 눈길들을 피해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등 뒤의 샹들리에가 수군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적이 없는 어두운 정원까지 나와서야 카게야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옅게 칠한 분이 손바닥에 묻어나왔다. 어울리지 않는 흰 가루를 보자 짜증이 나서 카게야마는 신경질적으로 옷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명색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데 이렇게 나와 있어도 괜찮아?”


느닷없이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인영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사내가 옅은 비웃음을 띤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는 언뜻 보면 제복처럼도 보이는 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파티장 안의 귀족들이 입은 요란한 옷과 비교하면 장식도 적고 화려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가장자리를 수놓은 금사는 달빛을 머금은 금이라 하여 최상으로 치는 반딧불이족들이 만든 형화금(螢火金)을 얇게 뽑아 만든 것인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소매 단추로 쓰인 진주는 물살이 거세 인어들만 겨우 오갈 수 있다는 흑옥해(黑玉海) 바닥의 수정진주가 틀림없었다. 가장 작은 단추만 하여도 연회장의 귀부인들이 입고 있는 보석 장식과 은사 레이스가 가득 달린 드레스를 족히 두벌은 사고도 남을 물건이었다. 


허나 카게야마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형화금사도, 수정진주도 아닌, 사내의 가슴팍에 달린 고양이 모양의 브로치였다. 


카투스 기사단원의 증표였다.


신전과 오이카와는 빈말로도 결코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다. 카게야마가 경계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사내가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늘어졌다. 


“생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르네?”

“뭐가 말입니까?”

“아니 뭐라고 할까, 대왕님의 하나뿐인 애첩이라길래 톡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금발의 미인을 상상했거든.”

“…전 첩이 아니라 수호군단의 군단장입니다. 무례하시군요.”


카게야마는 인상을 팍 구기며 그를 지나쳐갔다. 아니,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고 했다. 


“에이~ 뭘 그걸 가지고 그래? 진짜 무례한 말은 따로 있지.”


그가 다음에 내뱉은 말만 아니었다면.




“이 나라에서 제일 비싼 창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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