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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2 본문

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2

SaKuya! 2016. 4. 8. 21:19




12.

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이카와의 눈에 비친 건 햇살이 사막의 모래를 닮은 금색으로 윤곽을 덧그리고 있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이었다.


“일어났으면 깨우지 그랬어.”


그가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켜며 말하자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카게야마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깨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왜?”

“로드워크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플란타에 도착했으니 아침부터 출발할 일도 없으니까요.”

“하긴.”

“이와이즈미상이 저녁때나 출발할 거라 하셨으니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그럼 토비오쨩도 좀 더 자두지그래?”

“전 괜찮습니다.”


오이카와는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카게야마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괜찮기는! 오이카와상이 더 자두라는데 말이야!”


갑작스런 오이카와의 행동에 카게야마는 중심을 잃고 그의 가슴팍에 덥석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침대보 밑에서 바스락대던 밀짚 몇 가닥이 허공에 붕 뜨더니 그들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인상을 쓰며 제 뒷머리에 붙은 밀짚을 털어냈다.


“나도 떼어 줘.”


그의 응석에 카게야마는 손을 뻗어 오이카와의 머리칼에 붙어있는 밀짚을 떼어냈다. 손가락 끝 손톱 흰 부분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인간계에 있었을 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배구에 관계된 거라면 철저하게 관리하던 카게야마였으니까. 


“손톱 좀 길었네.”

“여기 온 이후론 못 깎았으니까요.”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둥근 손톱 끝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말단도 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것 같았다. 활시위를 계속 당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쨩한테 손톱깎이 같은 거 없냐고 물어볼까?”


카게야마도 제 손을 만지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더듬으며 대꾸했다.


“네. 그리고 오이카와상도 손톱 깎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게야마는 이젠 아주 오이카와의 손 구석구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집에서도 자주 오이카와의 손을 주무르곤 했다. 처음엔 “토비오쨩 그런 페티쉬가 있었어?!” 하며 손을 빼던 오이카와도 나중엔 포기하고 얌전히 손을 맡기게 되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집에 돌아온 것 같은데 보이는 풍경은 너무나 달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기억은 많이 돌아오셨습니까?”


카게야마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글쎄…잘 모르겠어.”


오이카와는 턱을 긁적였다.


“아직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현실감이요?”

“응. 기억들을 보고는 있는데 와 닿는 게 부족한? 그런 느낌이야.”


말이 어려운지 카게야마가 미간을 좁히는 걸 본 오이카와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영화를 보는 느낌?”


오이카와는 몸을 약간 뒤척였다. 갈색의 지푸라기들은 그 작은 움직임에도 책이 구겨질 때 나는 것과 비스무리한 소리를 냈다.


“왜, 영화를 보다 보면, 물론 감정 이입도 되고 울거나 웃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와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잖아? 책이 보여주는 건 영화가 아니라 과거고, 나도 저게 내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도 그 한 발짝이 좁혀지질 않는단 말이지. 꼭 투명한 유리 벽이 들어오지 말라고 가로막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토비오쨩은 혹시 뭐 기억난 거 있어?”

“아뇨.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게야마의 낯빛은 조금 어두웠다.


“뭐, 당연하지! 토비오쨩은 바보니까 그리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지! 안 그래? 오이카와상보다 빨리 기억을 되찾는 건 건방지기도 하고 말이야!”

“거, 건방진 겁니까?”

“그럼! 건방지지!”


오이카와가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탓에 카게야마는 순진하게 또 그게 정말인 줄만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놀리는 맛이 쏠쏠하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뺨에 손을 가져가려는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라? 둘이 뭐하는 거예요?”

“타, 타르프?!”


깜짝 놀라 일어나다 카게야마와 이마를 부딪쳐버린 오이카와가 이마를 문지르며 타르프에게 따졌다.


“남의 방에 들어올 땐 노크를 해야지!”

“맞다. 그랬던 것도 같다.”


타르프는 겸연쩍은 듯 헤헤 웃었다.


“노크를 할 일이 잘 없어서요.”


웃는 얼굴에 화를 내기도 뭣해 오이카와는 눈썹만 찡그리고 있는데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라 토비오쨩? 어디 가?”

“실은 타르프와 약속이 있어서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나도 같이 갈래.”

“안됩니다!”


그가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호통이라도 치듯 카게야마가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저도 놀랐는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왜 안 되는데?”

“그건…”


카게야마는 손을 조금씩 내리며 우물쭈물하다,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쾅 닫으며 외쳤다.


“아, 아무튼 안 됩니다! 따라오지 마세요!”

“토비오쨩?!”


그는 타르프의 손을 잡고, 혹시라도 오이카와가 쫓아올까 계단을 우다다 내려갔다. 


닫힌 문 뒤로 오이카와가 배신당했다며 “토비오쨩이 날 따돌렸어! 토비오쨩 주제에!” 라고 외치는 것에도 굴하지 않고 단숨에 건물 밖으로 나온 카게야마는 타르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곤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루…상에겐 비밀로 하고 싶어서.”

“왜요? 같이 가면 좋은데.”

“선물로 가져가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거든.”

“근데 그렇게 대단한 건 없는데.”

“그래도.”


타르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쪽이에요. 여기 올 때면 매번 들러요.”


이른 아침 호수 변의 공기는 맑았지만 살짝 찬기가 돌았고, 길 위로 돋아난 풀잎엔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카게야마가 팔을 쓸며 망토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할 때쯤, 타르프가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저 끝을 가리켰다.


“다 왔어요. 바로 저기예요.”


물값을 치르는 장정들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면 베일 같은 옅은 안개가 낀 작은 들판. 

뒤로는 가지런히 심겨 있는 나무들을 등지고, 옆으론 강을 두고 있는 진한 초록색의 들엔 흰 토끼풀이 다닥다닥 피어있었다. 


“정말 꽃이 있네.”

“토끼풀뿐이긴 하지만 좀 더 가면 화원도 있어요. 근데 거긴 함부로 못 들어가서…….”

“이걸로 꽃다발 만들 수 있으려나.”

“그건 좀 힘들 걸요.”

“그렇겠지? 리본도 없고.”

“대신 반지라도 만들어주면 되잖아요.”

“반지를 만들어?”

“토끼풀로 반지 만들 수 있잖아요. 손재주 있으면 왕관도 만들고 그러던데.”


타르프는 풀밭에 자리 잡고 앉아 토끼풀 군락을 헤집더니 그중 줄기가 길고 통통한 놈을 하나 똑 꺾었다. 


그녀는 카게야마에게 손을 내밀게 하더니 검지에 토끼풀 연둣빛 줄기를 대고 한 바퀴 빙 감아 꽃봉오리 부분에 매듭을 지었다.


“반지는 쉬워요. 이러면 끝이에요. 한 손으로도 만들 수 있을 걸요?”


카게야마는 손을 들어 꽃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찬찬히 순서를 되짚어보았다. 손가락에 줄기를 대고 감은 다음 꽃봉오리 부분에서 매듭.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도 타르프는 벌써 저만치에서 토끼풀을 꺾으며 놀고 있었다. 잠시 손을 빌려달라고 할까 싶어 타르프를 부르려던 카게야마는 한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곤 풀밭으로 시선을 내렸다.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 어떤 거로 만드는 게 좋으려나. 꽃이 큰 게 예쁘겠지?


“그건 줄기가 너무 짧지 않아?”


어떤 게 좋을지 몰라 일단 꽃이 크게 올라온 토끼풀에 손을 가져가던 카게야마는 고개를 들어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는 흰 로브를 머리끝까지 푹 눌러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먼저 말을 건 주제에 눈은 다른 손에 든 까만 물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여 들고 있는 직사각형의 게임기를 꾹꾹 누르는 그의 로브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카게야마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고등학교 때 네코마의…”

“코즈메 켄마. 줄기는 긴 걸 고르는 게 좋아.”

“네?”

“토끼풀 말이야. 반지 만들 거 아니야?”


카게야마는 꺾으려던 토끼풀을 살펴보았다. 꽃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것처럼 탐스러웠지만 그의 말대로 아까 타르프가 꺾었던 토끼풀보다 줄기가 짧았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줄기가 너무 가늘어. 너무 두꺼워도 안 좋지만…….”


다른 토끼풀에 손을 가져가자 귀신같이 조언을 하는 켄마를 보고 카게야마는 토끼풀과 켄마를 번갈아 보다 눈을 반짝였다. 


“시선 페이크인가요?!”

“…뭐?”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표정에 큰 변화가 없는 편인 켄마마저 한쪽 눈썹을 눈에 띄게 치켜들며 카게야마를 쳐다봤다. 


카게야마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배구 경기 때도 자주 하시지 않았습니까, 시선 페이크!” 라고 말하자 어처구니가 없는지 켄마는 입을 조금 벌렸다가, 카게야마는 학창 시절에도 늘 이런 배구바보였다는 생각해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냥 공성전을 하다 보니 시야가 좀 넓어져서…”

“공성전? 그걸 하면 시선 페이크를 잘할 수 있게 되는 겁니까?”

“글쎄…아니 그보다도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켄마의 눈이 번뜩였다. 마치 먹잇감을 살피려는 고양이 같은 눈이었다.


“기억은 돌아왔어?”

“아뇨 아직…잠깐…코즈메상이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제야 이상한 점을 깨닫고 카게야마가 몸을 뒤로 뺐다. 재빨리 등 뒤로 손을 가져갔지만 늘 가지고 다니던 활을 두고 온지라 잡히는 게 없었다. 낭패였다. 오이카와상 곁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혹시 마족이십니까?”

“…시선 페이크보다 그 질문을 먼저 했어야 하는 거 아냐?”


카게야마가 자신을 경계하는데도 켄마는 그 옆에 앉아 높낮이 없는 태평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족은 아니야.”

“그런데 왜 여기 계신 겁니까?”

“사정이 있어서…….”


켄마가 특유의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나라고 좋아서 이런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 곳에 있는 게 아니라고.”라고 중얼거리자, 시퍼렇게 잔뜩 날이 선 카게야마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켄마는 다시 게임기 화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기억, 아마 당분간 안 돌아올 거야. 오이카와가 기억을 되찾기 전까진 말이지.”

“어째서입니까?”

“기억이 봉인된 이유가 오이카와랑 비슷하다면 비슷해서 같이 묶여있거든. 아, 이건 비밀이었는데. 뭐, 상관없나…? 우마왕도 슬슬 눈치챈 것 같고……. 그래도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말아줘. 날 만났다는 것도.”


거의 혼자 떠드는 수준인 켄마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끄덕였다. 그러자 켄마는 게임기를 내려놓고 그에게 손등을 내밀었다.


“…반지 만드는 연습. 손 빌려줄게.”

“혼자서도…”

“처음 만드는 거면 한 손으론 힘들걸.”


켄마의 작은 손을 보고 있던 카게야마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잠시 손 좀 만져 봐도 되겠습…!”

“…반지 만드는 연습만 도와줄 거야.”


항상 말끝을 질질 끄는 켄마답지 않게 똑 부러지는 거절에 카게야마는 기가 죽었지만 그도 잠깐, 그는 곧 의욕적으로 적당한 풀을 찾기 시작했다. 


켄마의 말대로 줄기가 길고 적당한 굵기의 토끼풀을 찾은 카게야마는, 그 줄기를 손가락에 대고 조심스레 돌렸다. 


거기까진 쉬웠으나 매듭이 문제였다. 카게야마는 쉬이 매듭을 지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긴 손톱이 익숙지 않은 탓이었다. 초조해져 손끝에 힘을 주자 꽃봉오리가 뚝하고 떨어져 버린다. 다시 토끼풀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괜찮으니 다시 해봐.”


의외였다. 평소 켄마의 성격으로 봤을 때 무척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귀찮아 하기는커녕 “처음이니 서툴 수도 있지. 괜찮아. 초조해할 거 없어.”라고 답지 않게 카게야마를 북돋아주기까지 했다. 카게야마는 끄덕이고 신중하게 토끼풀 꽃을 받치고 있는 줄기가 알맞게 뻗은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켄마가 고개를 젓지 않는 토끼풀을 꺾어 그의 손가락에 한 바퀴 돌렸다. 


이제 매듭을 지을 차례였다. 


초조해하지 말고, 신중하게.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니까.


“됐다!”


고리를 만들어 그 사이로 줄기를 넣어 조심조심 빼내고 살살 잡아당기니 마침내 반지가 완성되었다. 손톱으로 잡고 있던 줄기 끝이 좀 너덜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합격이었다. 켄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괜찮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어서…….”


켄마는 흰 로브에 흙이 묻은 부분을 툭툭 털어내고 카게야마를 돌아봤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처음 보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카게야마.”

“네?”

“초조해하지 마.”

“아, 네! 괜히 서두르면 줄기가 끊어져 버리니까…”

“그것도 그건데…….”

“꽃반지 얘기가 아니었습니까?”

“글쎄…….”


켄마는 애매하게 답했다. 확실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또 보자.”


이젠 거의 걷혔던 안개가 일순 짙어지더니, 그가 미처 인사를 하기도 전에 켄마의 모습이 희뿌연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안개가 걷힌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 눈만 끔뻑이고 있으니 타르프가 쪼르르 달려와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배고픈데.”

“…잠시만. 반지 만들 것 좀 찾고…….”


정신을 차린 카게야마는 적당한 토끼풀을 몇 개 골라 꺾어 손에 곱게 쥐고 걸음을 옮겼다. 




아침잠에서 거의 깨어난 길을 걸어 돌아오니 숙소 건물 벽에 기대 쪽지를 읽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그를 눈치채고 손을 흔든다.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냐?”

“근처에 꽃밭이 있다길래 다녀왔습니다. 한 송이 드릴까요?”

“마음만 받을게. 진짜로 받았다간 안 그래도 지금 심통 나 있는 오…아니 루 녀석이 울고불고 난리를 떨게 뻔하니까.”


하마터면 타르프 앞에서 오이카와의 이름을 답을 뻔한 이와이즈미는 혀를 살짝 깨물며 말을 바꾸고 카게야마에게 충고했다.


“아침에 자기만 두고 갔다고 엄청 삐져있으니까 잘 좀 달래줘라.”


‘엄청’이란 단어를 엄청 강조하는 걸 보니 정말 삐져도 엄청 삐진 게 정말 맞나 보다. 


알과 하말에게 꺾어온 꽃을 줄 거라는 타르프와도 헤어져 혼자 방문 앞에 선 카게야마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무겁게만 보이는 방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이카와상만 혼자 두고 가버린 토비오쨩 아니야~?”

“…화 많이 나셨습니까?”

“화? 누가? 내가? 내가 왜? 오이카와상은 하~나도 화 안 났네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결국 오이카와는 폭발해버렸다.


“그게 아니지!! 이건 아무리 봐도 화났는데 말만 이렇게 하는 거잖아! 토비오쨩 바보!!”

“그, 그런 거였습니까? 죄송합니다…….”


이미 사과해봐도 늦었다. 오이카와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일부러 등을 돌리고 누운 걸로 봐서는 안 그래도 엄청 삐진 상태에서 더 삐져도 단단히 더 삐진 게 틀림없었다.


“저…오이카와상 드리려고 꽃 꺾어왔는데…….”

“오이카와상만 빼고 가서 꺾은 꽃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선물은 원래 선물 줄 사람 몰래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팀원들이…”


카게야마는 쭈뼛거리며 가져온 토끼풀을 내밀었다. 끝부분이 조금 말라있었지만 아직 싱싱했다. 아직도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오이카와가 “이번 한번만 봐주는 거야.” 라고 말하며 몸을 돌려 카게야마와 마주했다. 천만 다행히 삐진 게 금방 풀렸나 보다. 카게야마는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걸로 반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반지? 아, 꽃반지?”

“네! 배웠습니다!”


카게야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한 것과는 달리 막상 오이카와가 “그럼 해봐.”하고 손을 내밀자 머뭇거렸다.


“뭐 해? 반지 안 만들어줄 거야?”

“아니…그게…”


카게야마는 쭈뼛거리면서 바닥에 눈을 고정한 채 물었다.


“…약지에 해도 되나요?”

“그, 그러던가.”


오이카와는 고개를 홱 돌리며 대답했다. 귀가 붉었다. 


카게야마는 줄기를 오이카와의 길고 쭉 뻗은, 살짝 굳은살이 박인 네 번째 손가락에 가져가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라도 줄기가 상하거나 꽃이 떨어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고리를 만들고, 매듭을 지어 마무리한다. 


반지가 완성되자 오이카와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카게야마만큼이나 오이카와도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다 됐습니다!”


오이카와는 반지 낀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붉어진 뺨으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꽤 괜찮게 만들었네.”

“그렇죠? 연습했습니다!”


뿌듯한 표정의 카게야마를 보니 장난기가 발동한 오이카와가 입꼬리를 싸악 끌어올렸다. 


아무리 선물을 위해서라지만 날 혼자 두고 간 건 토비오쨩이 잘못한 거니까 여기서 좀 놀려도 돼.


“요리는 연습해도 꽝인데 말이야.”

“그, 그것도 곧…!”

“네~ 달걀 프라이도 제대로 못하는 토비오쨩~.”

“요리도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원래 다 서툰 거니 계속하다 보면…!”


-된다고 코즈메상이 그랬습니다! 라고 하마터면 다 불어버릴 뻔한 카게야마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이카와가 왜 말을 하다 마냐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말아줘. 날 만났다는 것도.




“왜 그래?”


오이카와에겐 코즈메를 만났다고 솔직하게 털어놔도 될지 고민하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재촉하는 말에 당황해 당장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사, 사실 왕관도 만들고 싶었는데!”

“…왕관?”

“네! 토끼풀로 왕관도 만들 수 있다고…근데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서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이카와는 더는 캐묻지 않았으나 그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이카와상?”

“응? 아, 그래. 확실히 왕관은…무리지.”

“그래도 만들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반지로 충분해. 지금은 딱히 왕관 같은 거 쓰고 싶지도 않고…….”

“왜요? 오이카와상은 왕관 같은 거 되게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보통 때 같았으면 오이카와상정도 되는 미남이면 왕관도 종류별로 다 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오늘의 오이카와는 어째 가라앉아있었다.


“뭐, 평소였음 그랬겠지만…”


오이카와는 제 목을 쓸어보았다. 붙어있었다. 책에서 본 금발의 사내와는 달리.


“어제 본 기억에서 왕관이 나왔는데…찜찜한 기억이었거든.”

“책에서 본 기억은 영화 같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영화 같아도 꺼림칙하다고! 아무리 그래도 내 얼굴로 피 칠갑을 하고 있으면 신경 쓰이지!”

“그건 그렇겠네요.”


카게야마는 오이카와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피 칠갑을 하고 있던 겁니까?”

“…전대 마왕을 죽여서.”


공기가 무거워졌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카게야마는 제 나름대로 골똘히 머리를 굴리더니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입술을 닫고 두 주먹을 꼭 쥐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결의에 찬 눈으로 오이카와를 마주하며 외쳤다.


“오이카와상!”

“으응?”

“섹스할까요!”

“…네?”


묵직했던 분위기에 쩍하고 금이 갔다. 오이카와의 입도 쩍 벌어졌다.


놀라서 순간적으로 존댓말을 뱉어버린 오이카와가 “저기…토비오쨩? 미안한데 내가 방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다시 말해줄래?”라고 묻자, 카게야마는 여전히 쓸데없이 비장한 얼굴로 “섹스하지 않으시겠냐고 말했는데요.”라 대답한다.


“혹시 싫으십니까?”

“아니! 아니 싫은 건 아닌데…아니긴 한데…좋고 싫고를 떠나서 너무 뜬금없잖아!”

“뜬금없습니까? 영화에선 이러던데…….”

“영화? 토비오쨩은 영화만 보면 자면서 무슨 소리야?!”

“자다 깨서 본 적도 있습니다!”

“자랑스럽게 얘기하지 말아 줄래?! 그거 자랑 아니거든! 그보다 대체 무슨 영화를 본 거야?!”

“음…카라스노에서 합숙 갔을 때 후배가 몰래 가져왔던 건데, 거기서 위로해주겠다면서 갑자기 섹스를…”

“카라스노 왜 이리 불건전해?! 애한테 그런 걸 보여주면 어떡해!”

“애 아닙니다! 애였으면 오이카와상한테 섹스하자는 말도 안 했습니다!”

“으아아아아!”


오이카와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얼굴을 침대 시트에 묻었다. 토비오쨩 분위기 파악 진짜 못 해! 오이카와의 행동에 놀란 카게야마가 그의 어깨를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아픈 건 아니지만 안 괜찮아! 그리고 토비오쨩 전엔 내가 아무리 하자고 노래를 불러도 안 한다고 하더니!”

“그, 그렇긴 한데…너무 기운 없어 보이셔서…….”

“섹스하면 기운이 나?”


한심하다는 투로 말하며 오이카와가 눈을 치켜떴지만 카게야마는 진지했다.


“그건 모르겠는데 일단 서지 않나요?”

“서다니?”

“거기가 서잖아요.”

“…부탁이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런 엄청난 말을 내뱉는 건 그만둬.”


오이카와가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다시 이동해 다녀야 하는데 괜찮겠어?…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나 아직 잘 못 해서 아플 텐데?”

“앗, 맞다.”

“…진짜 바보네.”


오이카와는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웃으며 손가락을 쫙 펼쳐보았다. 네 번째 손가락의, 흰 풀꽃 같은 웃음이었다.


“됐어. 나중에 왕관이나 만들어줘.”


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야 원, 두 번 정도만 더 기운 없었다간 토비오쨩 입에서 별의별 소리를 다 듣게 생겼다.


“네? 왕관은 좀 그렇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카게야마가 먼저 하자고 말한 건 처음이니 다음에 하고 싶어지면 한번 정도는 기운 없는 척을 해보리라 생각하며 또 피식 웃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마치 산들바람처럼 유쾌했다.


“그렇긴 한데 토비오쨩 같은 바보가 만들어주는 왕관은 꼭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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