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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7

SaKuya! 2016. 5. 12. 22:04




17.

“좋은 소식이다.”


아침부터 분주히 주변을 살피며 자잘한 마법을 써대던 이와이즈미가 이를 드러내고 씩 웃었다.


“여긴 푸루스 근처인 모양이야. 오늘 점심쯤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밝은 표정으로 운 좋게 던전 입구가 푸루스 근처에 이동했을 때 나온 것 같다고 말하는 이와이즈미와는 대조적으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얼굴은 퀭하기 그지없었다. 


“너희 어제 안 잤냐?”

“네. 좀…잠을 설쳤습니다.”

“왜?”


이와이즈미는 질문을 던지자마자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켜며 의심의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었다.


“설마 너네…내가 자는 동안 정말로 세워본 건…….”

“아니거든?! 날 뭘로 보고!”

“아니냐? 그럼 다행이고.”


이와이즈미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자 카게야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뭘 세운다는 겁니까?”

“아니 왜, 어제 오이카와 거기…”

“아, 거기라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침에 선 거 봤습니다.”

“내가 자는 동안 뭘 한 거야?!”


혹시나 싶어진 오이카와가 다리를 가리며 빨개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지만 카게야마는 태평했다.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그냥 보니까 서 있던데요.”

“그래? 혹시라도 다음에 할 거면 깨 있을 때 해줘.”

“…어제도 말했지만 그런 건 제발 너희 둘만 있을 때 해라. 대화도 마찬가지고.”


낯을 들기 민망한 대화에 이와이즈미는 애꿎은 땅만 발로 퍽퍽 밟으며 짜증을 냈다. 과격한 발놀림에도 흙먼지가 일기는커녕 이슬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이와이즈미는 발을 세워 이슬을 대충 털어내고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근데 너희 왜 망토 바꿔 입었냐?”

“응? 아니 그게…토비오쨩 망토가 너덜너덜해진 건 나 때문이잖아. 그래서 바꿔 입었어.”


오이카와는 난해한 심경으로 엉망이 된 망토 자락을 만지작거렸고, 카게야마는 찢긴 구석이 없는 오이카와의 망토를 더 단단히 여몄다.


“웬일로 믿음직한 일을 했네.”


이와이즈미가 장하다며 오이카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자기는 원래부터 믿음직했다고 주장하는 오이카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그만 출발하자고 엄지손가락으로 등 뒤를 가리켰다.


“이쪽이다.”


동남쪽으로 이십 분쯤 걸었을까. 그들이 계속 따라오던 강이 보였다. 제법 커다란 물줄기가 된 강 옆엔 그럴싸하게 닦인 길까지 나 있었다.


“오가는 사람은 많이 없는데 길은 잘 되어있네.”

“포도 수확 철 땐 제법 많이들 왔다 갔다 해. 원래는 우리도 그쯤 도착하기로 되어있었고.”


그래도 일찍 도착해서 나쁠 건 없을 거라며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어깨 너머 벌판에 드문드문 나무들이 보였다.




그들은 묵묵히 걸었다. 해가 높아질수록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마차가 길을 지나가곤 했기 때문이다. 


마차를 끌고 가는 마부들의 얼굴은 유목민들처럼 햇볕에 그을린 갈색이었으나, 온몸을 알록달록한 천으로 감싸고 짐승의 이빨이나 뼈 따위로 만든 장신구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유목민들과는 달리 짚으로 짠 챙이 넓은 모자를 머리에 얹고 염색하지 않은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이들을 볼 때마다 말을 잃은 게 내심 아쉬워졌다. 


한참을 걷던 오이카와는 흐르는 땀을 망토로 대충 닦아내며 물었다.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어?”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왔다는 건 아직 멀었다는 뜻이라던데.”


이와이즈미는 미심쩍어하는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해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힘들어?”

“아뇨. 아직 걸을만합니다.”

“그래?”


이와이즈미는 이제야 오이카와 쪽을 쳐다봤다. 예상대로 오이카와는 불평하는 대신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카게야마는 괜찮다고 잘만 걷고 있는데 투덜거리면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테니.


“점심도 아마 도착한 이후에나 먹을 것 같은데 괜찮지? 대신 오늘은 마른 빵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다.”


제대로 된 식사라는 말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사막에 온 뒤론 햇볕에 말린 빵이나 발효를 하지 않아 납작한 빵만 먹다 보니 잔뜩 부풀린 뒤 달콤한 크림을 가득 넣은 빵이 여간 그리운 게 아니었다. 옘스에서 빵이랑 케이크 좀 실컷 먹어둘 걸 그랬지-라고 후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먹은 단 음식이 플란타를 떠나기 전 마셨던 설탕을 넣은 커피였으니 말 다 했다.


“…설탕 두 개 넣은 커피라도 좋으니 단것 좀 먹고 싶다.”


오이카와의 혼잣말을 들은 카게야마가 그를 쳐다봤다.


“원래는 하나만 넣어 드시잖아요.”

“그만큼 단 게 먹고 싶다고.”


오이카와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꾸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슬슬 배가 고파왔다. 배고픈 건 싫은데 언제쯤 도착하려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앞서 걷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만 지나면 푸루스야.”


나무는 꽤 높아 보이는 녹색 언덕 위에 있었다. 그래도 목적지가 눈에 보이니 기운이 좀 났다. 발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지자 가만히 걷고 있던 카게야마가 말했다.


“가볍게 뛰어서 가면 안 됩니까?”

“내내 걷느라 힘들지 않아?”

“힘들긴한데…그래도 뛰면 더 빨리 도착할 거고, 로드워크 하는 기분도 나지 않을까요?”

“로드워크라…….”


오이카와는 가죽으로 된 수통에서 입을 떼며 작게 웃었다. 


로드워크라니. 이런 곳에서 들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다. 이와이즈미도 그 단어가 반가웠는지 평소처럼 위험한 짓은 금물이라고 핀잔을 주는 대신 웃음기 띤 목소리로 카게야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저 나무까지 ‘로드워크’ 해볼까?”


혹시라도 누가 볼까,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에 제자리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이와이즈미가 “출발!”이라고 외치자마자 세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처음엔 이와이즈미를 따라 잘 달리나 싶더니, 카게야마가 조금 앞서자 오이카와는 눈에 불을 켜고 후다닥 달려 카게야마를 앞지르곤 히죽 웃었다.


“날 앞지르기엔 십년은 일러.”


오이카와의 비웃음에 약이 오른 카게야마는 이를 갈며 오이카와 앞으로 나섰다. 카게야마가 또 앞으로 나서자 오이카와의 이마에 빠직하고 핏대가 섰다.


“…건방지게.”

“어이, 너희 둘 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사태를 파악한 이와이즈미가 둘을 말렸으나, 이미 두 사람의 경쟁심엔 불이 붙어버린 뒤였다. 


이를 악 문 카게야마가 앞지르면 오이카와가 이를 갈며 카게야마를 제치고, 카게야마는 기를 쓰고 오이카와를 추월한다. 이미 가볍게 뛰는 정도가 아니라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쫓으며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하여간 둘 다 애가 따로 없다.


맹렬한 눈빛으로 서로를 좇던 두 사람은 순식간에 오르막길을 오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조금만 더…!


“골인!” “도착!”


두 사람의 입에서 도착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거친 숨을 고르며 눈이 마주치자 둘 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먼저 도착했어.”

“제가 먼저였습니다.” 

“내가 먼저라니까?!”

“아닙니다!”

“동시 도착.”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무승부 판정을 내리며 논란을 종식시키곤, 무릎에 손을 댄 채 헥헥대는 그들을 한심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로드워크 잘들 한다 아주.”

“이 건방진 꼬맹이가 자꾸 앞지르려 들잖아!”

“꼬맹이 아닙니다!”

“토비오쨩은 아직도 꼬맹이거든? 바-보!”

“너희 둘 다 바보다.”


결국 이와이즈미에게 꿀밤을 한 대씩 얻어맞고야 유치한 말 꼬리 잡기를 끝낸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입을 댓발은 내밀고 서로를 흘겼다.


“그만들 하고 얼른 움직여.”

“더 가야 합니까? 푸루스니까 다 온 거 아닙니까?”

“응.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이와이즈미는 지쳐서 밍기적대는 두 사람의 엉덩이를 발로 가볍게 차준 뒤 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오이카와가 작게 투덜댔다.


“힘든데.”

“그러게 누가 그렇게 생각 없이 달리면서 힘 빼래?”

“그게 다 요 망할 꼬맹이가…”

“2절 시작하면 죽인다.”


이와이즈미가 으름장을 놓자 두 사람 모두 합죽이가 된 것처럼 입을 합 다물었다. 이와이즈미는 그제야 인상을 쓰고 있던 얼굴을 풀고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저기 나무들 보이지? 저기까지만 가면 돼. 이제 진짜 다 왔어.”


쓸데없이 격렬했던 달리기 때문에 기운이 빠진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가 말하는 곳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언덕 위에서 본 것이니 생각보단 거리가 있었지만, 내리막길이니 별로 힘들 것도 없었다. 




나무가 제법 우거져 하늘을 가리는 곳에 작은 마차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 손에 든 종이를 팔랑거리던 마부가 그들을 보고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스크롤을 한 장 더 찢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오셨네요.”


다른 마부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그을린 구릿빛의 사내는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는 이와이즈미에겐 반갑게 인사했으나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를 보곤 쭈뼛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제 나름대론 격식을 차린 인사였다.


“이런 인사는 할 일이 잘 없어서…….”


그는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마차 뒤편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아침에 연락을 받고 급하게 마차를 구하느라 이런 것밖에 구하지 못했다면서 그는 미안한지 연신 허리를 숙였다.


“아니 괜찮아. 이 정도면 훌륭하지.”


이와이즈미는 마차를 휘휘 둘러보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록 일꾼이나 짐을 실어 나를 때 쓰는 마차이긴 했지만, 햇볕을 막아줄 천 지붕까지 달려 있는 제법 괜찮은 마차였다. 


거창한 마법을 준비할 시간 따윈 없었을 테니 최소한의 추적방지 마법만 가지고 이 시기에 돌아다녀도 의심받을 위험이 적은 짐마차 중 하나를 골라온 것이리라.


“지푸라기…?”


마차에 오르자마자 발밑에서 나는 바스락 소리에 카게야마는 발을 떼고 바닥을 확인해보았다. 나무로 된 마차 바닥에 지푸라기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아, 얼마 전에 대규모로 밀짚들을 날랐거든요. 이 마차로도 날랐습니다.”

“대규모? 누가 어디에 쓰려는 건지 들었어?”

“물을 필요가 있습니까? 사리아님께서 뭐라도 만들 생각인가 보죠. 그러는 게 하루 이틀 일입니까.”

“또 이상한 걸 만드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일전에 사리아가 짚으로 만든 저주인형 부대나 괴상망측한 모자, 마력이 깃든 허수아비 같은 것을 떠올리며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쉬었다. 


세 사람이 모두 마차에 오르자 사내는 풀 하나를 뽑아 입에 물고 마부석에 앉았다. 그가 모자를 눌러쓰고 고삐를 잡자마자 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닦인 길이라곤 해도 잔돌이 많은 길이기에 마차는 끊임없이 덜컹거렸다. 녹음이 점점 짙어지며 나무들이 높아져 갔다. 




사막의 경계를 따라 형성된 숲을 강을 따라 빠져나오니 마을이 대신 싱그러운 향을 풍기는 과수원이 펼쳐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도원이었다. 


기름진 푸루스 내부의 평야가 아닌, 모래와 자갈이 섞인 척박한 땅에서 금빛 청포도들이 곧 다가올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름이 1cm쯤 되어 보이는 알들이 다닥다닥 달린 포도의 풋풋한 향은 상쾌한 아침의 허브 향과 비슷했다.


“이쪽 포도들은 늦어도 3주 후엔 수확에 들어갈 겁니다. 저쪽 포도들은 좀 더 기다려야 하고요.”


사내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포도원은 십여 년 전에 상회에서 매입한 곳인데, 규모는 작아도 근방 포도원 중 제일 가는 곳입죠. 비리디아에서 제일 유명한 정도는 아니지만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귀부와인을 만드는 곳이거든요. 쿼크누스와 관계가 악화되기 전엔 쿼크누스의 신년제에 와인을 납품한 적도 있는 대단한 곳입니다 여기가.”


그의 목소리에선 자부심이 넘쳤으나, 마차에 타고 있는 이들의 신분을 떠올린 그는 입이 방정이라며 껄껄 웃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은 더 좋은 술도 많이 마셔보셨을 텐데.”

“아직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니라서 기억나는 좋은 술이 없네요.”

“그럼 저희 술을 마시면 기억이 돌아오시기 전까진 저희 술이 제일 좋은 술이 되겠군요.”


처음 봤을 때 쭈뼛거리던 게 무색할 정도로 사내는 넉살 좋게 말했다. 포도 이야기를 하며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쪽 포도들은 왜 더 늦게 수확합니까?”


가만히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카게야마가 묻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포도 품종이 다릅니다. 그리고 저쪽 포도는 수분이 충분히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


사내가 말하는 ‘저쪽’ 포도는 강에서 더 가까운 곳에 열려 있었다. 마차가 강가 쪽으로 다가갈수록 단내가 강해졌다. 강가 쪽의 포도나무를 살펴보던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인상을 구겼다. 


나무에 매달린 알이 굵은 포도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해 있었다. 


“포도에 곰팡이 펴 있는데?”


오이카와가 포도가 못 쓰게 되어버린 거 아니냐며 걱정하자 이와이즈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귀부와인을 만들 포도니까. 귀하게 부패한 포도알을 써서 만든 와인이라 귀부와인이야.”


이와이즈미의 심드렁한 설명에 사내가 보충 설명을 하려는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긴 강가에서 가깝다 보니 새벽이면 물안개가 올라오거든요. 그 물안개 때문에 수확 철쯤이면 포도에 귀부 곰팡이가 핍니다. 언뜻 보면 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상한 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아, 혹시 일찍 일어나시는 편이면 새벽에 근처를 구경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물안개가 쫙 끼는 게 아주 장관이에요.”


사내는 수다스러운 이들이 그렇듯 설명이 끝났다고 입을 다무는 대신, 포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포도원의 귀부와인은 무척 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시큼한 맛이 있는 흐릿한 금빛 와인인데 첫사랑의 추억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다른 귀부와인에 비해 풋풋한 향과 아련한 색이 첫사랑과 닮았기 때문이란다.




마차는 이윽고 2층짜리 낡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도착하는 바람에 포도 얘기가 끊기자 사내는 아쉬워하면서도 열쇠로 문을 열었다. 


“어머나? 이와이즈미 도련님? 그리고 뒤에 계신 분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 여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녀는 문가에 서 있는 이와이즈미를 보고 반색하며 다가오다, 그의 등 뒤에 있는 오이카와를 보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오이카와 도련님?”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연신 어머, 세상에라는 말을 반복했다.


“마계로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늘 오신다던 분이 설마 오이카와 도련님일 줄은…….”


그녀는 오이카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오이카와는 불안해졌다. 자신을 싫어하는 자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기우였는지 그녀는 반가워하며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시장하시죠? 어머 근데 어떡하지. 우유가 떨어졌는데. 오이카와 도련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우유도 사두고 우유 크림도 좀 만들어두는 건데.”


막 식사 준비가 끝나긴 했지만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달콤한 크림은 없다면서 그녀는 아쉬워했다.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한 식탁 위엔 얇게 저며 소금을 친 빵이며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수프, 베이컨이 들어간 파스타가 담긴 대접이나 삶은 달걀 등이 차려져 있었다. 크림만 없을 뿐, 점심식사치곤 푸짐한 식탁이었다. 오늘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지라 눈 깜짝할 새에 접시들을 깨끗이 비우고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으려니 사내가 양손에 술병을 들고 나타났다.


“다들 한잔씩 맛보셔야죠. 이모한테 들었는데 오이카와님께선 단걸 좋아하신다면서요? 꿀처럼 달 겁니다.”


그는 와인 병 입구를 막고 있는 코르크를 뽑고 와인 잔에 금빛 술을 반쯤 따라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잔을 이렇게 돌리면서 향을 한번 맡아보세요.”


사내가 직접 잔을 돌리며 시범을 보이자 둘은 어설프게 흉내 내며 잔에 코를 가져갔다.


“무슨 향이 나냐?”


자기는 이쪽이 더 취향이라며 다른 병의 와인을 따르면서 이와이즈미가 묻자, 코를 킁킁대던 카게야마가 먼저 대답했다.


“저는…민트 향?”


카게야마의 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오이카와도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빵 냄새 같은데?”

“와인에서 빵 냄새가 납니까?”


오이카와상은 빵을 좋아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와인의 향을 맡아보려던 카게야마는 자기가 내뱉은 말에 놀라 소리쳤다.


“설마 오이카와상의 첫사랑은 빵인 겁니까?!”

“그럴 리가 있냐!”


눈을 흘기며 엉뚱한 소리 좀 그만하라고 투덜대고, 오이카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빵인지 아주 모르겠는 건 아닌데…….’


카게야마는 진지한 표정으로 와인 향을 몇 번 더 맡아보다, 코가 피곤해졌는지 이와이즈미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와이즈미상은 무슨 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술.”


낭만이라곤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대답이 불만인지 카게야마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닙니까?”

“술 냄새 맞잖아?”


그는 킥킥대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같은 와인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향으로 느끼는 건 흔한 일이야. 거기다 이 와인의 별명이 첫사랑의 추억이라고 들었으니 맡자마자 각자 첫사랑부터 떠올렸겠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알기 쉬운 거 아니냐면서 이와이즈미가 키득대자 카게야마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덩달아 귀까지 빨개진 오이카와가 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꿀처럼 달콤한 맛과 풋풋한 산미가 서로를 강조하고, 아몬드를 씹었을 때와 비슷한 뒷맛이 길게 남았다.


“괜찮지? 아니면 설탕 두 개 넣은 커피도 준비해줄까?”


이와이즈미가 던진 농담에 피식 웃으며 오이카와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들이키고 대답했다.


“이걸로 충분해.”


두 사람을 번갈아 힐끔대던 카게야마도 잔에 입을 가져갔다.


“달다.”

“그치?”

“네. 달고 맛있습니다.”


카게야마가 눈을 반짝이자 이와이즈미는 제가 다 뿌듯해졌다. 그는 와인병을 들어 라벨을 확인하고 뒤에서 흡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를 돌아봤다.


“이거 7년 전 거네. 귀한 거 아니야?”

“귀한 분들이 오셨으니까요.”


여인이 창고에서 가져왔다며 치즈 한 덩어리와 배를 들고 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은으로 된 빗을 꺼내 머리를 틀어 올리고 배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기억나세요? 이 빗 오이카와 도련님이 사주신 건데. 제 빗을 부러뜨려서 미안하다면서.”


그녀가 배와 치즈를 얇게 슬라이스 한 것을 포개 접시 위에 올려두는 걸 보며 오이카와는 책에서 봤던 하녀의 부러진 빗을 기억해냈다.


“아…혹시 앓고 난 다음에 머리 빗다가…….”

“어머나, 기억나세요?”

“아뇨. 기억나는 건 아니고…….”


대답을 얼버무리며 오이카와는 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삭하고 달달한 배에 치즈의 짠맛이 살짝 베어 나왔다. 달고 짠 건 최고야. 그가 치즈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비운 잔에 와인을 따르려 들자 이와이즈미가 실실 웃으며 장난으로 오이카와를 구박했다.


“그거 비싼 거니까 아껴 먹어라.”


때마침 잔을 비운 카게야마는 움찔거렸으나 오이카와는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카게야마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비싼 거면 더 마셔야지. 자 토비오쨩도 팍팍 마셔.”


이와이즈미의 말이 농담인 줄도 모르고 정말 아껴 먹어야하나 고민하며 와인 잔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의 잔을 쳐다봤다. 색이 좀 더 진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이와이즈미가 잔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마셔볼래?”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와이즈미의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색이 더 진하니 더 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단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안 다네요. 다른 포도로 만든 겁니까?”

“아니.”

“그런데도 맛이 이렇게 다릅니까?”

“같은 품종이라도 뭘 섞느냐,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달라지거든. 그리고 같은 와인이도 만든 해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고.”

“그럼 7년 전에는 풍작이었나 보네.”


와인을 홀짝이던 오이카와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깊은 단맛이 나는 걸 보니 그 해엔 포도 농사가 아주 잘 된 모양이라는 오이카와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비가 안 와도 너무 안 와서 흉작이었어. 어린 포도나무들은 말라죽었고.”

“끔찍한 시데라티오였죠.”


사내가 입에 담은 말에 오이카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시데라티오요?”

“아, 어린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가 말라죽는 병을 저희는 그렇게 부릅니다. 천체의 영향으로 말라버리는 거라고 믿거든요. 신전의 의식도 별을 피우는 의식이니 아주 다른 단어는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사내의 말을 들으며 오이카와는 손에 든 와인 잔을 돌려보았다. 아련한 빛의 액체가 투명한 잔 표면을 타고 흐르며 구운 빵 같은 냄새를 풍겼다.


“어린나무가 말라죽을 정도로 가문 해였는데도 용케 이런 술이 나왔네요.”

“흉년이라고 해서 그 해 만든 포도주도 별로라는 법은 없습니다요. 만들어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저희는 그저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작년에 드디어 와인을 내놓을 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초가을까지 가물었던지라 물안개가 짙게 끼질 않아 귀부병에 걸리지 않은 포도도 많았고, 수확시기 쯔음에야 비가 오는 바람에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열려있던 포도알도 많이 떨어지고 수확시기도 평소보다 늦어져 버렸다. 


그렇게 겨우 수확한 포도를 오크통에서 몇 년간 숙성시킨 다음엔 병에 담아 지하에서 저장하며 준비기간을 가진다. 형편없는 포도주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오크통을 갈아줘 가며 만든 와인이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끝까지 정성을 들였으니 이런 훌륭한 놈도 나올 수 있던 거 아니겠습니까.”


식사를 끝내고 올라온 방엔 계절에 맞지 않게 침대 위엔 솜이불이, 창문엔 두꺼운 벨벳 커튼이 쳐져 있었다. 


수확이 끝난 뒤 생산량을 체크하기 위해 온 상회 분들이 주로 묵는 방이라 그렇다며, 그녀는 이불이며 커튼을 둘둘 말아 들고 나갔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너머로 한낮의 뙤약볕이 쏟아졌다. 


오이카와는 창문을 열었다. 봄, 여름에 부지런히 잎을 따고 포도송이를 솎아가며 키운 포도가 송이송이 영글어 가고 있는 포도밭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   *   *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이 정도인가.”


열댓 명 정도 되는 기사들이 그의 앞에 정렬해 있었다. 하나같이 가슴엔 고양이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는, 신전파 고위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준비라면 충분히 해뒀으니 이 인원으로도 괜찮을 거야.”


켄마가 지팡이를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하자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대부분이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위 귀족의 자제씩이나 되어서 뿔도 없는 인간의 계획에 따라야 한다는 게 썩 유쾌하진 않은가보다. 거기다 우두머리라는 놈은 마력도 변변찮은 낙하산이고. 


그러나 그 저주받은 대왕을 처단하러 가는 길이다. 이번 일에 성공하면 신전의 명예는 물론 신전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도 올라갈 것이다. 켄마와 쿠로오의 대화를 들으며 기사들은 손안의 마력석을 꾹 쥐었다. 


쿠로오는 곧바로 일어나 마력석을 쥐는 대신 책상 위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지도 위의 흰 비둘기 표시가 3일째 쿼크누스와 비리디아의 국경지대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콜룸바 기사단의 현재 위치를 갱신해주는 두루마리를 다시 둘둘 말아 넣고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 쿠로오가 입을 열었다.


“포탈을 열라고 전해.”


체크메이트를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목적지는 푸루스의 신전이다. 대왕 일행이 금혈지역인 유니콘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한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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