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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2부-18

SaKuya! 2016. 5. 15. 07:43




18.




∥1월, 쿼크누스




카게야마는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비단처럼 윤이 나는 비늘을 가진 물고기들이 투명한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풀잎을 하나 따 연못에 던지니 물고기들이 모여들어 풀을 툭툭 쳐보더니 다시 흩어져 제각기 지느러미를 흔든다. 그는 민트 잎을 입에 물었다. 어쩐지 그리운 향이 난다.


“역시 여기 있었군.”

“폐하를 뵙습니다.”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카게야마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황급히 격식을 차리며 무릎을 꿇었다.


“편히 있어도 된다.”


우시지마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카게야마는 편하게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보통은 내가 편하게 앉으라고 해도 괜찮다거나 이게 편하다면서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데 말이지.”


그 말에 카게야마는 쭈뼛거리며 다시 무릎을 꿇으려 들었다.


“제가 또 실례를…….”

“아니, 꾸짖으려는 게 아니었다. 괜찮으니 편하게 앉아다오.”


우시지마는 웃음기 옅게 띤 얼굴로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며 커다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년제 준비 때문에 근래 신경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늘 과분할 정도로 신경 써주시는 걸요.”

“과분하지 않다. 넌 하나뿐인 내 가족이지 않느냐.”


비록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시지마는 뒷말을 삼키며 손을 거뒀다. 카게야마는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열리는 연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생각인가?”

“그런 자리는 불편해서…….”

“그런가.”


우시지마의 눈썹이 꿈틀했다.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카게야마가 귀족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기에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폐하! 여기 계셨습니까?”


더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이,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우시지마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비리디아의 사절단이 곧 도착할 거란 소식입니다.”

“알겠다. 곧 가겠다.”


이번 신년제엔 비리디아의 왕도 참가한다고 했던가. 보통 때보다 훨씬 성대한 잔치가 열리겠구나. 그러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괜히 참가했다간 귀족들의 따가운 눈총이나 받을 게 뻔하니 이번에도 그냥 근처 숲에 가서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편이…….


“카게야마.”


생각에 잠겨있던 카게야마는 우시지마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실은 올해도 네가 참가 안 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새 옷을 지어 놓으라고 명했다.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참가해다오.”


우시지마는 그로서는 드물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사냥은 신년제가 끝난 뒤에 함께 가지 않겠나?”


어릴 적엔 아버지와 종종 사냥을 함께 나갔다던 그는, 카게야마와 함께 사냥을 나갈 때면 얼굴에 많이 티는 나지 않아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곤 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차마 그가 실망하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기에, 카게야마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   *




“아직 멀었어? 아, 나무라는 건 아니야. 기왕이면 계속 멀리 있고 싶거든.”

“그거 아쉽게 됐네. 거의 다 왔단다.”

“치이.”


오이카와는 혀를 차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턱을 괬다.


“내가 왜 우시와카쨩 나라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고.”

“나도 별로 가고 싶진 않지만 네놈은 즉위 후에 쿼크누스를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아아~ 싫다 싫어.”


오이카와는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대고 어린아이들이 투정부릴 때 그러는 것처럼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덩치만 빼면 떼쓰는 애가 따로 없었다. 


꼴불견으로 보이겠지만 쿼크누스엔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쿼크누스의 우마왕은 오이카와와 항상 비교되는 상대였다. 그러나 왕이라는 것과 강대한 힘을 가졌다는 점만 빼곤 모든 게 판이했다. 피로 물들인 붉은 카펫을 걸어야 했던 오이카와와는 달리 우시지마는 그 태생부터가 고귀한 우르스 여왕의 하나뿐인 외동아들로, 그야말로 ‘진짜 붉은 카펫’을 걸어온 축복받은 왕이었다. 

정말이지 저한테 친절한 세상에서 사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우시지마가 그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보고 있으면 가끔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한 부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시지마는 그게 뭔지도 모를 놈이었다.


“…짜증나.”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오이카와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이와이즈미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슬슬 생각해두지그래?”

“뭘?”

“뭘 모르는 척이야. 왕비 말이야. 언제까지 네 옆자리를 비워둘 순 없다고. 이번 쿼크누스 방문이 끝나면 신하들이 본격적으로 몰아붙일 거다. 하다못해 첩이라도 들여.”

“오이카와상은 조금 더 싱글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데~”


그가 능청을 떨자 이와이즈미는 혀를 찼다.


“자유는 무슨. 침대로 끌어들인 여자도 없으면서.”

“그야 당연하지. 신전에서 호시탐탐 내 목을 노리고 있는데 나한테 접근해오는 여자들을 어떻게 믿고?”


오이카와가 여전히 미소짓고 있기에 이와이즈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여자들을 이용해볼 생각은?”

“무서운 소리를 하네. 이와쨩은 그래서 인기가 없는 거예요~.”

“나 농담하는 거 아니다.”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입가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그러다 애라도 생기면?”

“…어?”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이와이즈미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자, 오이카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의 의무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자신의 후손을 남겨 왕실의 혈통을 유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건 비리디아의 왕 오이카와 토오루가 해야 할 일이었다.


“태어났더니 아버지가 마계를 피로 물들일 저주받은 마왕이라면 기분이 어떻겠어.”


그러나 그 의무만큼은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남과 동시에 저주라는 꼬리표가 붙은 삶. 자신의 자식 또한 그런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 것이 뻔했다. 원치 않는 낙인을 달고 사는 게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야, 그냥 울어라.”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차라리 울고불고 난리를 떨라고. 그쪽이 위로하기 더 편하니까.”

“별로 울만 한 일도 아닌걸. 신경 쓰지 마.”


오이카와는 다시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수도 근처의 숲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그렇다. 울만 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체념한 지 오래니까. 어린 시절 그렇게 아팠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한 딱지가 생겨 이제는 건드려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9월쯤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왜?”

“민트 꽃이 필 시기거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젠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 정말이다.




우시지마는 싫지만 파티는 언제나 좋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와 가득 늘어선 와인 잔, 기분이 들뜨는 음악, 모여서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 차가운 돌바닥과는 다른.


“샴페인이 아니네?”


오이카와는 와인 잔을 손에 들고 가볍게 돌렸다. 파티장에서 자주 보던 긴 샴페인 잔이 아닌, 일반 와인 잔보다 입구 부분이 조금 더 각이 져 있는 잔이었다. 


잔 안의 아렴풋한 빛깔의 액체에서 향이 피어올랐다.


“무슨 향이 나시나요?”


화려한 뿔의 귀부인 하나가 그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웃음기 띤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요. 음…빵 같지 않나요?”

“어머나, 그게 대왕님의 첫사랑의 향인가요?”

“첫사랑의 향?”

“네. 이 와인은 비리디아에서 오신 사절단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푸루스의 와인인데, 첫사랑의 향이 난다고들 해요.”


오이카와는 와인을 입에 가져갔다. 달고 풋풋하고, 뒷맛은 길고 쌉싸름했다가, 또 달아졌다.


“어떤가요?”

“달고…아니, 다네요.”


달다는 말 뒤에 뭔가를 더 말하려던 그는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은근슬쩍 기대어오는 레이스 투성이의 아가씨들을 적당히 피해가며 귀족들과 어울리고 있는데, 갑자기 파티장이 술렁였다. 

수군대는 그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그 끝엔 결이 좋아 보이는 까만 머리칼의 사내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뿔이 없는 걸로 보건대 고위 마족은 아닌 것 같았다. 대귀족이나 우시와카쨩이 끔찍이 아끼는 애첩이라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 팡파르가 요란하게 울렸다.


“우마왕 우시지마 와카토시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오이카와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위로 올라간 눈매, 깊은 색의 파란 눈. 

기억 속의 누군가와 지나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토비오?”




*   *   *




“…차라리 꼭 나오라고 했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카게야마는 그 말을 뱉은 후에 가슴에서 찌르르 올라오는 영문 모를 통증에 잠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 준비한 와인 말이에요, 첫사랑의 향기라는 별명이 있다면서요?’


한 쌍의 연인이 정원을 거닐며 정답게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카게야마는 연못의 물고기를 빤히 쳐다봤다.


“첫사랑이라.”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일까. 물고기 한 마리가 첨벙거리며 꼬리를 수면 위로 들었다 내렸다.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사랑이란 대체 뭘까.”


물고기들이 대답해 줄 수 있을 리 없는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카게야마는 풀숲 위로 드러누웠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비가 그치면 보자고 했던가.”


왜 지금 느닷없이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카게야마는 손을 위로 쭉 뻗어보았다. 


자신은 결국 그때 약속했던 장소에 나가지 못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카게야마가 살던 곳은 푸루스 외곽의 작은 마을이었고, 의원을 부르려면 말을 타고 큰 옆 마을까지 나가야했다. 어린 그가 할 수 있던 거라곤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괜찮다. 곧 나을 거다. 네가 있으니 괜찮아질 거다. 그러니 계속 옆에 있어다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지만 결국 비가 그치기도 전에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때 비가 와도 의원을 부르러 갈 걸 그랬지. 카게야마는 펼친 손을 꽉 쥐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시지마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자신은 꽤나 망설였다고 한다. 비가 그치면 만나기로 했는데…라면서.




바람이 불었다. 마법으로 일 년 내내 따뜻한 정원의 민트 향이 바람을 타고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았다. 아찔한 바람이었다.


“연회…나가볼까.”


그 마음속에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카게야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   *   *




시녀들은 카게야마의 까마귀 깃 같은 머리칼을 한껏 매만지고 흰 연회복 위에 금색 장식 술이 달린 망토까지 두르고 나서야 물러나는가 싶더니, 커다란 거울을 들고 다시 다가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충분하지 않습니다.”


카게야마의 말을 단호하게 자른 그녀는 결국 그의 얼굴에 진주가루까지 문지르고 나서야 흡족하게 웃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우마왕님의 체면에 흠집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되도록 머리 만지지 마세요.”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치장에 그가 머리에 손을 가져가자마자 시녀가 그를 나무랐다. 카게야마는 머리칼 대신 어깨를 덮은 보랏빛 망토를 만지작거렸다.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조명과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그를 따갑게 내리쬐었다. 


그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우시지마의 부탁 때문에 참가한 것이니 우시지마를 본 후엔 되도록 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다.

주눅이 든 그를 응원이라도 하듯 우시지마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렸다. 그 소리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시선의 중심에 있던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쨍그랑


사내가 들고 있던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금빛 액체가 바닥에서 물결친다. 


이번에 준비한 와인 말이에요, 첫사랑의 향기라는 별명이 있다면서요?


그의 발치에서 민트 향이 선명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와줘서 기쁘다.”


우시지마가 카게야마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카게야마의 시선은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사내의 모습 위로 추억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카게야마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우시지마가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아아, 오이카와인가.”


그 순간, 카게야마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물을 떨어뜨린 수채화처럼 번져있던 추억이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오이카와. 그래.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다. 오이카와상.


“비리디아의 대왕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우시지마의 말이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비리디아의 대왕이라면…저주받았다던?”

“그래. 나쁜 녀석은 아니다만, 너는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저주. 대왕. 카게야마는 입안에서 두 단어를 되뇌었다. 오이카와는 저주 받은 대왕이다. 우시지마처럼 강대한 힘을 가지지 않은 자신은 그와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다. 또, 자신은 뿔도 없는 중급마족에 불과하다. 왕에겐 어울리지 않는. 오이카와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인물로, 추억으로 묻어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물 밖으로 나와 버린 물고기처럼.


“폐하,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그러지. 카게야마, 금방 돌아오마.”


무슨 용무인지는 몰라도 대공이 우시지마와 함께 자리를 뜨자마자 카게야마는 도망치듯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파티장 안은 그리운 향으로 가득해서, 당장에라도 울어버릴 만큼 괴로웠으므로.


정원, 정원으로 갈까?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연못이 있는 그곳. 아니지. 거기도 민트가 그득하다. 그럼 어디로 가면 좋을까.


“토비오.”


카게야마의 어깨가 움찔했다. 기껏 그 향기를 피해 밖으로 나왔건만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이,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등을 보여주던 그가 이번엔 카게야마의 등을 잡았다.


“토비오.”


한번 더 이름이 불리자 카게야마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울먹이고 있었으니까. 울면서 자신에게 매달렸으니까. 뒤를 돌기가 무섭게 오이카와의 입술이 덮쳐왔다. 흐느끼는 떨림과, 그리운 향이 입술 사이로 전해져왔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필사적으로 그를 밀쳤다.


“그만…오이카와상…!”


밀쳐진 오이카와는 울음에 일그러진 채로 웃었다.


“…잊지 않고 있었구나.”


오이카와의 말에 카게야마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렇구나. 잊지 않고 있었구나.


그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희미한 민트 향과 자신보다 조금 더 커 보이던 뒷모습만이 떠오를 뿐. 틈이 날 때마다 생각해봐도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나는 잊지 않고 있었구나. 

잊었다 생각했지만 계속 사랑하고 있었구나. 

계속 사랑하며 살아왔구나. 그래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구나. 


그게 숨 쉬듯 당연한 거라서.


그렇게 계속, 당연하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서.



목구멍이 뜨거웠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뺨을 잡고 다시 한번 키스했다. 


그러자 과거의 추억은 지금 이 순간이 되었다.




*   *   *




“으음…….”


잠들어 있는 카게야마가 몸을 뒤척였다. 오이카와는 책을 덮고 흘러내린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준 뒤,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라도 카게야마가 푹 쉬지 못할까봐 등불조차 켜지 않은 채 책을 읽었더니 눈이 피로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눈두덩을 꾹 눌렀다.


“…오이카와상.”

“깼어?”

“배고파서요.”

“본능에 충실하네.”


카게야마는 하품을 쩍 하고 입맛을 다시다 탁자 위의 책을 보고 물었다.


“다 읽으셨습니까?”

“대충은.”


오이카와는 빈 와인 잔을 코에 가져가 보았다. 잔 밑바닥에서 희미하게나마 아직 향기가 올라왔다.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향기를 곱씹었다. 비록 책은 재회하는 장면에서 끝났지만 그는 어렵지 않게 그 뒤를 그려볼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이 가자고 했겠지. 


“토비오.”


일어나 침대 위를 정돈하던 카게야마가 손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오이카와의 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다.


“만약 내가…나랑 같이 가자고 하면 토비오는 어떡할 거야?”

“어딜 가는데요?”

“글쎄…….”


오이카와의 눈꺼풀이 작게 떨렸다. 카게야마가 돌려줄 때부터 빛이 나고 있었던 책은 그와 카게야마의 심정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덕분에 두 배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때 대왕님은 뭐라고 말했으려나. 함께 비리디아로 가자고 했을까. 무슨 심정이었을까. 외로워서 마냥 붙잡고 싶었을까, 아님 처음부터 반쯤 체념한 상태였을까. 


“가죠, 뭐.”


예상 외로 시원한 대답에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날 어떻게 믿고?”

“네?”

“너도 책을 봤으니 알 거 아냐. 괜히 날 따라왔다가 모욕이나 당하고…….”

“아…하긴. 그 오이카와상은 좀 못 미덥긴 했죠. 의욕도 없어 보이고.”

“그렇지?”


오이카와는 기운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제가 생각해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녀석이었으니.


둘이 비리디아에 간 뒤에 어떤 일들이 벌어진지 알고 있는 만큼 더 씁쓸했다. 겨우 다시 만났으면서. 착잡한 심정으로 바닥만 뚫어지라 보고 있는 오이카와의 귓가에 카게야마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오이카와상이 가자고 하면 가겠습니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예전의 대왕님은 잘 모르겠지만…그래도 지금의 오이카와상은 믿을 수 있으니까요.”


오이카와는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왜?”

“그거야 뭐…오이카와상도 팀원들한테 자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카게야마는 티 없는 눈동자로 오이카와를 응시했다.


“‘믿는다. 너희들.’이라고.”

“그건…”

“지금 저희는 같은 팀 맞죠?”


오이카와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잠시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윽고 그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저도 믿습니다.”


창밖은 벌써부터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름보다 밤이 빨리 온다는 것은 곧 수확의 계절이 온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창문을 활짝 열고 기지개를 켰다. 어스름한 하늘에선 곧 별들이 반짝일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일찍, 밤을 밝히는 빛이 있었다.


“오이카와상, 이리 와보십시오.”

“응? 왜?”


카게야마가 부르는 소리에 오이카와는 그의 옆에, 열린 창 앞에 섰다. 그 자리에 서자 보이기 시작한 광경이 있었다.




관리인들이며 상주하는 일꾼들이 건물마다 불을 밝히고 있었다. 포도나무를 살피던 일꾼들도 제각기 등불을 손에 들었다. 어둑하던 땅 위로 점점 빛이 번져나갔다. 어떤 빛은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으며, 어떤 빛은 왔다 갔다 흔들린다. 그 모두가 지상의 별이었다.




*   *   *




새벽 공기가 이젠 제법 차가웠다. 

해 뜨기 직전의 포도원은 고요하고 잔잔한 물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꼭 베일을 쓴 것처럼 아름다웠다. 직접 만져도 베일처럼 부드러울까? 엉뚱한 생각이었으나 카게야마는 오이카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2층의 창문으로는 손을 내밀어도 안개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새벽부터 분주히 오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하녀는 카게야마를 보고 쑥스러운 얼굴로 치맛자락을 잡고 한쪽 발을 뒤로 했다. 


"이런 인사는 오랜만이라 너무 어색하네요."

"평범하게 하세요. 저도 여기 예법은 몰라서……."

"그래요?"


그럼 제가 방금 얼마나 어설펐는지도 모를 테니 다행이라며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식사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지 그래요? 맞다,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요?”

“온천 달걀을 얹은 카레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나온 대답에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뭔지 모르겠네. 달걀은 있으니까 그걸로 뭐라도 해줄게요.”

“감사합니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그녀는 예의도 바르다며 그를 칭찬하곤, 나무잔에 따끈한 우유를 담아왔다. 배고프죠? 산책하면서 마셔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밤새 켜두었던 현관 램프의 불을 후 불어 껐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카게야마는 잔을 들지 않은 팔을 쭉 뻗어보았다. 비록 베일처럼 부드럽지는 않지만, 촉촉한 안개가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그는 물기가 남은 손을 거두고 우유를 홀짝였다. 우유는 조금 비리긴 했으나, 설탕을 탔는지 달착지근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빨대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카게야마는 우유를 찔끔찔끔 삼키며 자갈이 밟히는 거친 길을 걸었다.


동이 트려는지 희뿌연 안개가 분홍색으로, 그리고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슬슬 돌아갈까. 카게야마는 어느새 다 마셔버린 잔을 흔들며 발걸음을 뗐다.


“여기 나와 있었어?”


붉은 안개 너머에서 한 인영이 카게야마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오이카와상?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날엔 일찍 일어나야지.”

“오이카와상도 포도밭을 구경하러 오신 겁니까? 하긴, 이와이즈미상이 내일 출발한다고 했으니 구경하려면 오늘밖에 없죠.”

“맞아. 오늘이 기회지.”


오늘은 운이 좋네,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곤 카게야마의 팔을 덥석 잡았다.


“오이카와상?”

“저쪽에 가보지 않을래? 굉장한 걸 발견했거든.”

“굉장한 거요?”

“응. 얼른 가자.”


그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자신을 잡아끌었기에, 카게야마는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걸으면 걸을수록 붉은 안개가 진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새벽이면 짙게 끼는 물안개는 동이 트면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카게야마는 곧 그 의심을 지워버렸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은 모양이지.


“어디 가는지 안 물어봐?”


별말없이 웃기만 하던 그가 물었다.


“오이카와상이니까요.”


어제도 말했지만 오이카와상이 가자고 하면 갑니다. 카게야마가 그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웃고 있는 얼굴에서 어째서인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야~그것 참 고맙네, 카게야마.”


그를 따라가고 있던 카게야마가 우뚝 멈춰 섰다. 머릿속에서 적신호가 울리고 있다.


“…너 누구야.”

“응? 그야 오이카…”

“누구냐고!”


카게야마는 습관적으로 등 뒤를 더듬었다. 그러나 매고 오지 않은 활이 생길 리가 없었다. 낭패다. 여기선 일단 도망쳐야 했다. 카게야마는 상체를 숙이고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다, 들고 있던 잔을 그에게 힘껏 던졌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미안한데 두 번씩이나 놓칠 생각은 없어서.”


오이카와의 것이 아닌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검은 구체들이 카게야마를 덮쳤다.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강한 충격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눈꺼풀이 닫혔다. 암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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