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aron
[스가카게] 아이(愛 · I) 본문
※주의사항
- 약 고어 묘사가 있습니다.
- 윤간 암시 장면 있습니다.
-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죽거나 미칩니다.
- 미래조작 요소 있습니다.
- 히카게, 모브카게 요소 있습니다.
길어서 일 별로 나눠서 접어두었습니다.
1일째 ‖ AM 06:00
자명종이 세 번을 채 울리기도 전에 카게야마는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자명종의 알람을 끄고 옷을 갈아입었다. 책상 위에 어제 어머니가 사주신 손목시계가 놓여있었다. 어제 어머니를 따라 영화를 보러 백화점에 갔다가 진열장에서 우연히 본 시계였다. 공학계산기로도 유명한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그 시계는 꼭 공대생들의 계산기처럼 투박한 디자인의 검은색 시계였으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안쪽 부분만큼은 제법 세련된 데다 날짜까지 알려주는 디지털 시계였다.
꼭 장난감 시계처럼 생겨서는. 그렇게 생각한 카게야마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으나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저 시계 가지고 싶어? 사줄까?”라고 말한 어머니가 카게야마에게 계산을 마친 시계를 건네줄 때까지.
배구 할 땐 시계 같은 거 끼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게야마는 책상 위에서 시계를 집어 올렸다. 그래도 로드워크 할 때는 껴도 되겠지. 시간도 알 수 있을 거고.
카게야마는 흰 손목 위에 까만색의 시계를 차고 집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오늘 자의 신문이 도착해 있었다. 그는 그 갱지뭉치를 집어 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읽기 편하도록 신문을 식탁 위에 올려두니 굵은 글씨의 오늘 자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원인불명의 전염병 환자 속출, 격리조치’
매년 여름이나 가을쯤 되면 도는 전염병이리라. 어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로운 독감 바이러스가 되었다든지, 카게야마가 외우기엔 어려운 이름의 무슨 무슨 인플루엔자라든지 하는 것 따위의.
카게야마는 식탁 근처에서 가볍게 몸을 풀며 그 기사를 대충 훑었다. 혹여 감염자와 접촉했거나 이상한 오한이 든다면 지정 병원이나 근처 보건소에서 검진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기사 밑에는 작은 글씨로 지정 병원들의 목록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센다이 종합병원, 나츠 병원, 참사랑 병원…. 스트레칭을 마친 카게야마는 신문에서 눈을 뗐다. 저런 전염병은 어차피 2~3주 정도면 대충 해결이 될 게 뻔했고, 자신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별로 저런 병에 걸릴 일도 없었다.
바깥은 아직 으슬으슬했다. 그는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하 하고 입김을 뿜었다. 새하얀 입김에 손을 비비고 난 뒤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의 로드워크.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른 아침의 도로엔 인적이 드물다. 길을 따라 뛰는 카게야마의 옆으로는 가끔 출근 중인 자동차나 자전거 동호회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갈 뿐이었지만 오늘은 구급차나 경찰차도 간간이 보였다. 멀어지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공원에 들어선 카게야마는 주머니 속의 딱딱한 육포조각을 만지작거렸다. 먹을 걸 주면 길고양이들이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몰래 챙겨온 것이었다.
“오! 카게야마!”
“니시노야 선배,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카게야마는 공원의 갈림길에서 만난 니시노야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마 전 고양이를 쫓아 공원까지 왔다가 우연히 로드워크 중인 니시노야를 만난 이후부터 카게야마는 로드워크 코스를 조금 변경해 니시노야와 함께 공원을 돌고 있었다.
“오늘 추운데 그 차림으로 괜찮겠어?”
“뛰면 열나니까 괜찮습니다.”
“그래도 따뜻하게 챙겨 입고 다녀야 감기에 안 걸리는 거야. 자 이거라도 껴!”
니시노야는 코가 빨개진 후배를 보고는 기어이 제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카게야마의 손에 끼워주면서, 그로서는 드물게 요즘 그 이상한 병도 유행하고 있으니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했다.
“감사합니다. 니시노야 선배.”
유독 ‘선배’라는 말을 좋아하는 니시노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쭉 폈다.
“그래! 선배야! 이 선배님께서 후배님을 위해 뭐든 못하겠어? 점퍼도 벗어줄까? 응?”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도…저…육포를…가져왔는데요….”
“육포? 아! 고양이 때문이구나!”
니시노야는 어째서인지 동물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면서 자신에게 털을 세우는 공원의 고양이를 보고 시무룩해 하던 카게야마를 떠올려내고는 쭉 편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두들겼다.
“걱정마라 카게야마! 이 선배님께서 도와주마! 왜냐면 난 선배니까!”
“감사합니다! 니시노야 선배!”
“오오옷! 그래!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고양이 보러 가자! 아마 저기 있을 거야!”
입이 귀까지 걸릴 지경인 니시노야가 카게야마의 팔을 잡고 근처 수풀로 달려갔다. 공원에는 노숙자들이 많았다. 공원의 고양이는 노숙자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사는지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카게야마만 빼고.
“야옹아~ 어딨니~ 나와보렴~”
근처에 누워있던 노숙자가 하품을 쩍 하며 눈을 비비고 자리를 옮겨주자, 둘은 거기에 아예 풀썩 앉아서 고양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도 카게야마를 보며 털을 곤두세우던 고양이는 니시노야를 보고 부풀렸던 몸을 가라앉히고 야옹거리며 니시노야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역시 니시노야선배는 굉장하네요!”
“뭐 그렇지! 아무래도 선배니까! 이 정도쯤이야!”
니시노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카게야마, 육포 꺼내서 한 번 줘봐. 안 물 거야.”
“그, 그럴까요…?”
주머니 속에 손을 넣는 카게야마의 눈에 불안정한 걸음의 노숙자 한 명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저 사람도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려는 건가? 카게야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는 귀여우니까. 분명 먹이를 주려고 오는 걸 거야.
카게야마는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셨는지 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은 노숙자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 주머니에서 꺼낸 육포를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니시노야의 품 안에서 카게야마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캬르릉대던 고양이는 그가 내민 육포조각의 냄새를 맡더니 이내 크게 부풀렸던 몸을 가라앉히고 얌전히 육포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니, 니시노야 선배!”
카게야마가 얌전해진 고양이를 보고 기쁜 표정으로 니시노야를 바라보자, 니시노야는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오우! 성공했구나, 카게야마!”
“전부 선배 덕입니다!”
“뭘 이 정돌 가지고. 카게야마!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선배에게 상담해라!”
“네! 니시노야 선배!”
소년들은 로드워크 중이라는 것도 잊고 육포를 먹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배구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은 토스 연습을 좀 더 해볼까 하는 데 도와줄래? 물론입니다 니시노야 선배! 오! 고맙다! 네 토스 굉장하니까! 아뇨 선배야말로….
고양이가 육포를 다 먹고 나서도 카게야마에게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그래서 소년들은 자신들 위로 비틀거리던 노숙자가 머리 위에 먹구름처럼 드리울 때까지 아무 이상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라?”
그리고 그가 팔을 휘둘러 그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소년들은 처음으로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으윽!”
“니시노야 선배!”
“뭐야 당신!”
니시노야는 갑자기 얻어맞은 어깨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이상을 먼저 눈치챈 건 카게야마였다. 그 사내는 뭔가 이상하다고 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파리한 안색에 눈동자는 흐렸으며 벌어진 입가에선 가스가 빠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저 남자와 대치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카게야마의 머리가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일단은 자리를 피하자.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고작 1분도 걸리지 않았다.그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왜 갑자기 사람을 치…”
“니시노야 선배! 저 사람 뭔가 이상해요!”
카게야마가 니시노야를 황급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으나, 겨우 그 정도로는 앞으로 다가올 사태를 완전히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카게야마에게 어깨를 잡힌 채 끌려가던 니시노야가 반사적으로 팔을 내밀자마자 그 사내가 니시노야의 손을,
“으아악!!”
누런 이를 세워 힘껏 물어버렸다. 피부가 찢기는 고통에 니시노야가 비명을 지르자 카게야마는 잡았던 그의 어깨를 놓고 니시노야의 손을 물고 있는 사내를 밀쳐냈다. 카게야마는 다시 달려드려는 그의 무릎 뒤쪽을 힘껏 걷어찬 뒤 니시노야의 팔을 잡고 공원에서 도망쳐 나왔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했다.
“서, 선배…헉…허억…손은….”
카게야마가 차마 숨을 고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니시노야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후배에게 애써 웃어주며 상처 입은 손을 등 뒤로 가렸다. 엄청 아프긴 했지만, 후배 앞에선 언제나 멋진 선배이고 싶었다.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병원에…지금 당장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그럴 것 같네. 지금 가볼게. 아마 응급실은 열려 있을 테니까.”
“그럼 저도 같이…!”
선배가 나에게 장갑을 주지만 않으셨어도 손을 저렇게 피부가 찢길 정도로 물리진 않았을 텐데. 카게야마가 미안함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니시노야는 웃는 낯으로 카게야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병원정도는 혼자 다녀올 수 있으니 넌 걱정 말고 등교해. 뼈까지 다치진 않은 것 같으니 아마 다 나으면 배구하는 데 무리도 없을 거고.”
“그래도….”
카게야마가 입술을 깨물며 못내 안타까워하는 걸 본 니시노야는 카게야마의 어깨에 올려둔 손을 내려 그의 등을 팡 쳤다.
“괜찮다니까? 이 선배를 못 믿는 거야 지금? 신뢰의 세터가?”
“아뇨! 미, 믿어요!”
“그래! 그럼 선배를 믿고 등교해라! 나도 병원에 갔다가 괜찮다고 하면 바로 학교로 갈 테니까!”
“…그러면 믿고 등교하겠습니다.”
세터라는 말에 약한 카게야마답게 아까까지 니시노야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떨어지지 않던 카게야마가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끝끝내 미련이 남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후배를 뒤로 한 채 니시노야도 근처의 외과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후배 앞에선 멋진 척했지만 사실 조금 힘들었다. 상처부위에서 시작된 미열이 점점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니시노야는 흐려지려는 시야에 눈을 깜빡이며 어지러움을 떨쳐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병원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가서 치료를 받고, 해열제를 먹고 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다.
1일째 ‖ PM 12:30
카게야마는 “너 웬일로 점심시간까지 안자고 깨어있어?” 라며 놀라는 같은 반 아이들의 경악을 뒤로 한 채 교실을 나왔다. 그야 언제나처럼 수업은 지루했고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손을 다친 니시노야에 대한 걱정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병원은 다녀오셨을까? 이제 괜찮으신 걸까? 배구하는데 지장은 없는 거겠지? 혹시라도 심각한 부상이면 어쩌지? 수업시간 내내 그런 생각에 혼자 초조해하던 카게야마는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나와서 2학년 교실로 향했다.
하지만 기세 좋게 계단을 오르던 카게야마는 2학년 교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마자 난관에 마주쳤다.
“…니시노야 선배 몇 반이시더라…?”
카게야마는 니시노야가 몇 반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2학년들의 교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와 버린 것이었다. 바보 히나타에게 바보라고 놀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 카게야마 아니냐?”
그런 카게야마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처럼 구원자가 나타났다.
“타나카 선배!”
“뭐야, 날 만난 게 그렇게 기쁘냐?”
“네!”
자기를 보자마자 갑자기 얼굴이 환해진 카게야마가 자신의 농담에 정말로 고개를 끄덕이자 타나카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조금 돌렸다.
“뭐, 나…나도 기쁜 걸로 해주마!”
“저 타나카 선배, 혹시 니시노야 선배가 몇 반인지 아십니까?”
“노야? 아~오늘 아침에 손 다친 게 걱정되어서 찾아온 거구나?”
“네…. 저한테 장갑을 주시지만 않았어도….”
카게야마가 죄책감에 말끝을 흐리자 타나카가 호통을 쳤다.
“얌마! 걔는 나름대로 후배를 생각해서 건네준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쓴다? 그리고 그렇게 심각한 상처도 아니고 약간 찢어진 정도라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정말요?”
“암! 의사가 한 일주일정도면 다 아물 거라고 말했다더라! 피곤했는지 지금은 자고 있으니 굳이 찾아가 볼 거 없어.”
“다행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타나카 선배!”
“그래! 그럼 가서 얼른 점심이나 챙겨먹어라. 보아하니 점심시간 되자마자 온 것 같은데.”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카게야마!”
타나카는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는 후배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너 점심은 히나타랑 먹냐? 아니면 반 친구들이랑?”
“혼자 먹는데요?”
타나카는 카게야마가 혼자 점심을 먹는다는 말에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그거 잘됐다며 웃어 보였다.
“그럼 오늘은 나랑 먹자! 노야가 저래서 오늘 점심은 혼자 먹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마침 너도 왔겠다, 카게야마 너랑 같이 먹음 되겠네!”
“네? 저랑요?”
“그래 임마! 밥은 같이 먹을 때 더 맛있는 거다 짜샤!”
타나카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아 멀뚱멀뚱 서 있는 카게야마의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 팔을 잡아끌었다.
“뭐해? 빨리 안 가면 야키소바빵 다 팔린다?”
잡은 팔을 흔들면서 지금 안 뛰어가면 단팥빵만 먹어야할걸? 하며 협박하는 것처럼 얼굴을 험상궂게 구기는 타나카를 보며 카게야마는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빨리 뛰겠습니다!”
“어? 어어?! 얌마! 같이 가야지! 나 지금 네 팔 잡고 있어서 끌려가고 있거든? 얌마! 속력 좀만 줄여!”
* * *
“크으- 아슬아슬했어! 딱 하나 남은 야키소바빵 획득! 카게야마! 이것이 바로 사나이의 의지가 만든 결과라는 거다!”
“머, 멋집니다!”
자기가 반쯤 장난삼아 던진 말에 이번에도 눈까지 반짝이며 호응하는 카게야마를 보고 있으니 조금 머쓱해진 타나카가 그답지 않게 얌전히 자리에 앉고 빵 봉지를 뜯었다.
“근데 넌 야키소바빵 못 사서 어떡하냐.”
“저는 단팥빵이랑 슈크림빵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래?”
“네. 어차피 그냥 영양보충하려고 먹는 거니까요.”
그 말에 타나카는 빵을 입에 넣으려던 걸 멈추고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조금 화난 표정으로 후배의 등을 두들겼다.
“그건 아니지 짜샤! 아니 물론 그게 식사의 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맛있는 걸 맛있게 먹는 게 좋은 거 아니겠냐!”
타나카는 야키소바빵을 반으로 갈라 카게야마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 많이 먹고 쑥쑥 커라! 지금도 큰 편이지만 아오바조사이의 그 재수 없는 꽃미남보다 커져서 그자식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려!”
“네, 네?! 하지만 이걸 저에게 주시면 타나카 선배 몫이 줄어드는데요….”
“그럼 네 슈크림빵 반만 나 주든가. 같이 먹을 땐 이렇게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게 좋은 점 아니겠냐?”
“그…런건가요…?”
“그럼, 그럼!”
“그렇군요! 그러면…!”
카게야마는 잽싸게 슈크림빵 봉지를 뜯어 빵 절반을 타나카에게 내밀었다. 그 얼굴이 많이 기뻐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타나카는 빵을 받아들었다. 코끝이 괜히 찡했다.
* * *
“음료수 뽑아먹게?”
“네.”
“무슨 음료수 좋아하냐?”
“우유랑 요구르트요.”
“와 엄청 건전하다 너.”
네가 아직 탄산이 주는 짜릿함을 모르는구나! 타나카는 진심으로 아쉬운 듯 말했으나 카게야마는 이쪽이 더 좋아요.라고 덤덤하게 대답하고 자판기를 노려봤다.
“…뭘 마실지 고민하는 표정이 아니라 사람 하나 잡을 것 같은 표정이다 너.”
“…이게 제법 고민돼서요.”
살인적인 눈빛으로 얼마 동안 더 자판기를 째려보던 카게야마는 결국 오늘도 손가락을 크게 벌리고 우유와 요구르트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아무 거나 나와라.
“…너 뭐하냐?”
“결정을 못 하겠어서요.”
오늘은 우유인가. 카게야마가 우유 팩 옆에 붙어있는 빨대를 뜯으며 대답하는 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던 타나카가 에잉! 하고 짧게 소리를 치며 자판기 앞으로 다가가 요구르트를 뽑았다.
“옛다! 이것도 반 마셔라.”
“네? 그래도 괜찮나요?”
“아까도 말했잖냐! 누구랑 같이 먹으면 이렇게 나눠 먹을 수 있는 게 좋은 거라고!”
“…감사합니다.”
선배에게 받은 요구르트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던 카게야마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고 자기 손에 들려있는 우유 팩을 타나카에게 내밀었다.
“서, 선배도!”
“엉?”
“선배도 제 우유 절반 드세요!”
타나카는 카게야마가 내미는 우유 팩을 보다 괜히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큼! 고, 고맙다.”
* * *
오늘은 타나카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타나카 선배가 야키소바빵이랑 요구르트 절반을 나눠주셨다. 맛있는 걸 나눠 먹을 수 있다는 게 바로 같이 밥 먹을 때의 좋은 점이라고 알려주셨다. 아침에 다치신 니시노야 선배도 상처가 심각하진 않으셔서 곧 다시 배구를 하실 수 있다고 한다. 큰 지장은 없다니 다행이다.
그림일기장에 크레파스로 그린 엉성한 그림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일기 같은 서툴고 귀여운 생각을 하며 카게야마는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왜 안 자냐고 묻는 반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대로 쭉 잤다.
1일째 ‖ PM 3:00
“카게야마, 일어나. 종례시간이야.”
“어? 어….”
점심시간 이후 오후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깨지 않고 쭉 자던 카게야마는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자신의 등을 툭툭 치며 깨울 때가 되어서야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졸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는지 하품을 하며 카게야마는 교실 앞의 교탁으로 흐릿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담임 대신 교탁에 서 있는 의외의 인물에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였다.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어라? 왜 담임선생님 대신…”
“오늘 담임쌤 몸이 안 좋아서 조퇴했대. 그래서 타케쌤이 대신 종례 들어왔어.”
“아하.”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어 보이는 타케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는 카게야마에게 뒷자리 아이가 자꾸만 말을 걸었다.
“야 근데 요즘 조퇴하는 사람이랑 결석하는 사람 엄청 많은 것 같더라. 다들 막 열나고 으슬으슬하다면서 조퇴했대.다들 신문에 나온 그 전염병인가 뭔가에 걸린 건가?”
그 말을 들은 카게야마는 가방 속에 있는 니시노야의 장갑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장갑 아직도 못 돌려드렸네. 선배 오늘 부 활동에는 오시려나? 아마 쉬시겠지? 내일 반에 찾아가서 갖다드릴까…. 거기까지 생각한 카게야마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그러고보니 타나카 선배한테 니시노야 선배가 몇 반인지 못 들었다….”
장갑을 돌려주고 싶어도 니시노야의 반을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니시노야 선배가 다시 부 활동에 나오시면, 그때 돌려드리자.”
그냥 단순히 부원들에게 니시노야의 반을 물어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좋게 말하자면 외골수적인 면이 있고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보 같은 면이 있는 카게야마는 차마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채 장갑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그러면 오늘의 종례는 여기까지. 요즘 조퇴하거나 결석하는 사람이 많은데, 다들 전염병이랑 감기 조심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타케다가 종례를 끝내자 반장이 벌떡 일어나서 “차렷! 경례!”를 외쳤다. 종례가 시작할 때부터 한쪽 발을 책상 밖으로 내놓고 까딱이며 종례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뒷문 옆에 앉은 사사키는 신난 듯 반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했다. 바로 어제, 고등학교에 입학한 날부터 쭉 좋아하던 아이와 사귀게 되어 오늘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달콤하게 부푼 채 교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소년을 막은 건, 언제부터 문 앞에 서있었는지도 모를 2학년 선배였다.
“니시무라 선배? 여긴 웬일이세요?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막았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배는 소년을 막았다기보단 공격했으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었다.’
“우왁!”
그러나 다행히 인간의 무딘 송곳니로는 두꺼운 동복을 뚫긴 힘들었다.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들어 팔뚝을 무는 선배에게 놀란 소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뒤에서 반 아이들이 빨리 안 나가고 뭐하냐며 재촉하자 소년은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 선배에게 손을 내밀며 다시 말을 걸었다. 뭐야 갑자기 왜 손을 물고 그러지? 장난치시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년은 내민 손을 물렸다.
“선배, 장난치지 마시…으아아!!”
“뭐야 왜 또 비명을 지르고 그러…선배?!”
“왜 그래?”
“야! 와서 좀 도와줘!”
장난 따위가 아니었다. 손을 물린 소년은 고통 속에서 눈가를 찌푸리며 언젠가 TV에서 봤던 동물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사냥감의 살점에 이를 쑤셔 넣던 포식자들을.
“됐어! 떼어냈어!”
“팔 붙잡고 있어!”
손등의 살점이 조금 뜯기긴 했지만 뒷문 근처에 서 있던 아이들은 2학년을 떼어낼 수 있었다. 한 아이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물린 소년에게 내밀었다. 손을 물린 사사키는 그 손수건으로 다친 부위를 꾹 눌렀다. 선배가 문 곳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쩝”
다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그 소리만큼은 확실하게 들려왔다.
쩝쩝쩝. 꿀꺽.
하얀 손수건에 스며드는 붉은 피와 같은 새빨간 공포가 소년의 눈동자 위로 퍼져들었다. 저 선배 방금…먹었어?
“내, 내 살을…”
“저 선배…바, 방금…먹었…지?”
“무슨 말이야?”
바둥거리는 선배의 한쪽 팔을 잡는 데 정신이 팔려있던 한 아이가 묻자 아까 손을 물린 소년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저 선배가 사사키의 살을 뜯어 먹었다고!”
그 말에 교실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방금 들었냐? 먹었대. 완전 미친 거 아냐? 저 선배 대체 누구길래 1학년 교실에서 지랄이야? 시발 나도 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카게야마는 그 소란 속에서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저 니시무라 선배라는 사람은 아침에 공원에서 본 노숙자와 닮아있었다. 생김새나 체형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게. 니시무라의 경계가 흐릿한 눈동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 카게야마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탁한 눈동자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중요한 게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가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가방 안에는 돌려주지 못한 니시노야의 장갑이 들어있었다. 니시노야 선배가 다친 것도, 같은 반 아이가 다친 것도 전부 자기 잘못처럼 느껴졌다. 장갑을…장갑을 꼈더라면, 그러면 안 다쳤을 텐데.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카게야마는 타케다의 목소리에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날뛰려는 선배의 머리의 입을 타케다가 출석부로 막고 있었다. 그걸 본 아이들은 염려하던 마음을 놓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선생님이 해결해주시겠지.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아무나 경찰에 신고 좀 하고, 남학생들 몇 명만 와서 나 좀 도와줘. 나머지 애들은 빨리 나가고.”
타나카의 말에 몇몇 덩치 좋은 남학생들이 앞으로 나섰다. 남학생들이 타나카를 도와 니시무라를 제압하는 걸 본 아이들은 수군거리다 한두 명씩 앞문으로 교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아직까지도 교실 바닥에 앉아있는 사사키를 일으키고 너 빨리 병원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사사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오늘 데이트 못 할 것 같다고 문자 보내놔야지. 그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카게야마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며 친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사사키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 비슷하게 손을 다친 니시노야 선배와 사사키가 겹쳐보였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어. 이젠 좀 괜찮아.”
사사키는 손을 누르고 있던 손수건을 살짝 떼어내고 상처부위를 살폈다. 보기 흉했지만 많이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다시 손수건으로 상처부위를 꾹 누르며 사사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야 근데 너 나한테 말건 거 처음이다?”
“어? 그런가?”
“너 우리 반 애들한테 말 거의 안 걸잖아. 내일부턴 말도 좀 걸고 그래라.”
“어…안자면….”
“이 새낀 밤마다 뭘 하길래 맨날 졸아.”
“배구…?”
“짜식…다 알아 임마. 둘러대지 마.”
뭘 안다는 거지? 배구에 대해서?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본 사사키는 “내숭은!” 하며 낄낄거리다 곧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가 쓰렸다. 피를 흘려서 그런가? 좀 어지러운 것도 같고…아무래도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사사키는 마지막으로 카게야마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했다.
“내일부터는 인사하고 지내자.”
“…응. 내일 봐.”
“그래. 내일 봐.”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
* * *
“이거 놔! 왜 이래!”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던 카게야마는 밖에서 들리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남학생이 여학생을 붙잡고 억지로 추행을 하려는 것 같았다. 비명소리를 듣고 온 남학생들이 여학생에게 달려드는 남학생을 떼어내는 걸 보고 카게야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이상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카게야마는 언제나처럼 제2체육관으로 뛰어가는 대신 귀가하는 아이들과 수다를 떨며 동아리실로 향하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걸어갔다. 제2체육관의 철문 앞에 선 카게야마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오늘은 이상한 일 투성이었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자. 니시노야 선배도 곧 다시 나오실 거고, 괜히 다른 곳에 정신 팔고 있다간 또 히나타 멍청이한테 한 소리 들을 테니.
“카게야마 왔구나.”
“안녕하세요, 스가와라 선배.”
“오늘은 2학년들이 늦네.”
“아, 니시노야 선배는 오늘…”
“어? 아 그거. 알고 있어.”
“어…그러십니까….”
“그래. 그 녀석 어차피 금방 나아서 다시 폴짝폴짝 뛰어다닐 테니까 카게야마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너 아침연습 때부터 쭉 기운 없는 표정 짓고 있는데, 그렇게 다른 곳에 정신 팔고 있다간 나한테 주전 자리 뺏긴다?”
“아, 안 뺏길 겁니다!”
주전 자리를 뺏긴다는 말에 고개를 들고 두 주먹을 꼭 쥐는 후배를 보며 스가와라는 후후 하고 웃었다. 아침부터 통 기운이 없던 후배님은 아무래도 이제야 좀 기운을 차린 것 같다.
스가와라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장난스럽게 카게야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코트 위의 제왕이니 천재 세터니 하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후배는 확실히 배구에서만큼은 스가와라가 자기 스스로 주전 자리를 포기하게 만들만큼 무시무시한 선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꼭 어린아이 같았다. 카게야마를 볼 때마다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카게야마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미워할 순 없었다. 자신의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고 기분 좋은 듯 뺨을 살짝 붉히는 저 병아리 같은 아이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단 말인가.
스가와라는 아오바조사이와의 연습 시합이 잡혔던 그 날을 떠올렸다. 딱히 갑자기 떠오른 건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와 함께 연습을 할 때나 방에 혼자 앉아있을 때, 자기 전, 혹은 수업을 듣다가도 종종 그 날을 떠올리곤 했다.
‘스가와라 선배! 이번에는 제가 자동적으로 주전을 맡게 됐지만, 다음번에는 확실하게 실력으로 주전을 따낼 겁니다!’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천재면서도 자신을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아이. 주전을 반쯤 포기했던 스가와라가 다시 한 번 승부욕에 불을 붙일 수 있었던 이유 중엔 ‘천재 세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그를 훌륭한 세터라고 인정해준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그건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부원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하자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자신을 굉장하다고 말해주는 굉장한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곤 네트 근처에 페트병을 하나 세워뒀다. 오늘은 나도 서브 연습을 해볼까.
“어라? 2학년들은 왜 안 오지?”
“니시노야는 다쳐서 당분간 못 나온다고 했고, 나머지는 나도 몰라.”
“연락해볼까?”
다이치가 휴대폰을 꺼내는 걸 본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치는 휴대폰 주소록에서 엔노시타의 이름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의 귓가로 뚜루루-하는 신호음이 이어졌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다이치는 입을 열었으나 들리는 건 엔노시타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금은 통화가 불가능하니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기겠냐는 녹음된 멘트였다. 메시지를 남기면 통화료가 부과된다는 말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전화를 끊는 대신 안내에 따라 삐-소리가 난 후 메시지를 녹음했다.
“이 녀석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메신저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가 녹음되었다는 멘트가 흘러나오자 다이치는 전화를 끊고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가와라가 그걸 보며 다이치 꼭 아빠 같아! 하고 웃는 사이 매니저인 키요코와 야치가 드링크를 가지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츠키시마가 언제나처럼 의욕 없는 듯한 표정으로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문은 왜 닫아?”
“츳키가 닫고 싶으면 닫는 거지.”
히나타의 물음에 야마구치가 대뜸 타박을 줬다. 츠키시마는 ‘나 잘했지’ 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야마구치를 보며 안경을 살짝 올리곤 입을 열었다.
“밖에 이상한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이상한 사람? 누구?”
“누군지는 모르겠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공격하는 것 같더라. 2학년 같았어.”
“너도 봤구나!”
츠키시마는 갑자기 음성을 높이는 카게야마를 보며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네 봤습니다요 왕님. 서민도 눈이 있으니까요.”
“왕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네, 네 왕님.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겠어요?”
“너 진짜…!”
“카게야마, 카게야마!”
발끈한 카게야마가 오늘도 츠키시마와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히나타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게야마 너도 본 거야? 이상한 사람?”
“어. 우리 교실에 왔었거든.”
“뭐?! 너희 교실에도 왔었다고?! 그걸 왜 이제 말해! 다친 곳은?!”
“호들갑 떨지 마. 다친 곳 없어. 그러니까 왔지.”
“뭐가 호들갑이야! 이 바보야! 니시노야 선배도 다쳤는데 너까지 다쳤을까봐 걱정해주는 건데 남의 속도 모르고….”
히나타의 바보 소리에 화를 내려던 카게야마는 이어지는 히나타의 말에 입술만 비죽 내밀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다친 곳도 없고 타케다 선생님이 경찰 불렀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어 멍청아.”
“저건 꼭 걱정을 해줘도….”
히나타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카게야마의 살짝 붉어진 귓가를 본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며 ‘왕님은 귀여운 건지 귀엽지 못한 건지.’ 하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 1학년들 사이에 갑자기 다이치가 끼어들었다.
“2학년들과 연락이 안 되는데 혹시 뭐 알고 있는 사람 있어?”
“아뇨, 없는데요.”
“저도 모르겠어요.”
“그럼 아침 연습 이후에 2학년들 본 사람은?”
“저요. 타나카 선배랑 같이 점심 먹었습니다.”
이어지는 다이치의 물음에 카게야마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때 뭐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상한 점이라…. 카게야마는 오늘 점심시간을 떠올렸다. 원래는 혼자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타나카 선배가 같이 먹자고 해서 같이 먹고…타나카 선배가 야키소바빵 나눠주셨지. 맛있었어. 나도 다음엔 점심시간 종 치자마자 매점으로 뛰어가서 야키소바빵 사 먹어볼까? 빵을 먹고 나선 뭘 했더라…맞다, 자판기. 자판기에서 오늘도 우유랑 요구르트 중에 뭘 먹을지 고민하다 버튼 두 개를 동시에 눌렀는데 우유가 나왔지. 타나카 선배가 그걸 보고 요구르트를 뽑아서 요구르트도 반 나눠주셨어. 그리고 다음에도 또 같이 먹자고 해주셨어. 이상한 점이라…이상한 점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골똘히 생각하던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점은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별 일 아니겠지.”
다이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2학년 녀석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설마 부 활동 땡땡이치고 놀러간 건가?” 라고 말하자 스가와라가 “그런 거라면 벌로 서브 100회씩 시키자.”고 말하며 히죽 웃었다. 물론 2학년들은 말없이 동아리를 빠지고 놀러 갈만큼 불성실한 녀석들은 아니었지만, 대신 엉뚱한 구석이 있으니 또 모르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이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0번이 뭐야. 걱정시킨 죄로 200번은 해야지.
“쿵”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뭔가가 체육관의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뭐지?”
“글쎄요.”
“쿵 쿵 쿵”
순간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 ‘뭔가’는 계속해서 문에 부딪혀왔다.
“…누가 문 두드리는 건가?”
“그런 것도 같고….”
“츠키시마, 문 잠가뒀어?”
“아뇨.”
“그래? 안 잠겨있으니 들어오세요-!”
“쿵 쿵 쿵 쿵”
멈추지 않는 소리에 츠키시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친절하게 들어오라고까지 해줬는데도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사람이 아니라 뭔가가 문 근처에 걸려서 부딪히고 있는 건가? 누가 장난으로 뭐 걸어뒀나?
“사람은 아니고 뭐가 자꾸 문에 부딪히는 것 같은데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어, 그럼 내가 보고 올게!”
귀찮은 일은 나에게 맡기라며 배시시 웃는 야마구치를 보고 츠키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츠키시마 대신 문까지 걸어간 야마구치는 붉은 철문을 천천히 열었다.
“으아아!”
문틈으로 보이는 것에 야마구치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제때 기름칠을 해두지 않아 바닥을 못으로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조금 열린 철문 사이로 제일 먼저 보인 건 사람의 이였다. 누군가가 조금밖에 열리지 않은 철문 사이로 제 얼굴을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두꺼운 쇠로 된 문에 계속 얼굴을 부딪치는 게 아플 법도 하건만 그자는 계속해서 철문에 얼굴을 들이받고 있었다.
“누, 누구세…”
넘어졌던 야마구치가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연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마주치고야 말았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색이 바래 탁해진 눈동자를. 그 눈은 문 안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동공이 풀린 흐릿한 눈동자는 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 아니 시선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고, 그렇다고 해서 눈빛이라고 부르기엔 생기 한 점 없는 그 눈길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눈길이라는 말도 결국 어울리지 않는다. 그걸 깨달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심에 츠키시마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다시 쿵 쿵 하고 철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닫힌 문이 울리며 정신을 뒤흔들어놓는 소리가 십여분정도 계속되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소리가 멎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리가 멎은 후에도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다시 십 분쯤 흘렀을까. 히나타가 용기를 내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아까 그 사람, 대체 뭐였을까?”
이제 간 건 맞겠지? 문 열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덧붙여진 히나타의 말에 아사히가 히익하고 숨을 들이켰다.
“설마. 갔겠지.”
미간을 사정없이 구기며 대꾸한 츠키시마가 손끝으로 안경을 올리며 카게야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님.”
“아니라고.”
“왕님, 선생님이 경찰 부른 거 맞아?”
“…그럴걸?”
“왜 의문형으로 끝나는 건데?”
“경찰을 부르는 건 못 보고 그냥 나왔거든.”
카게야마의 말에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확실한 것도 아니었구만.
“너희 교실에 들어왔다던 2학년 선배가 저 사람이었어?”
“아니.”
“내가 본 이상한 사람도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최소한 두 명 내지는 세 명의 상태가 이상한 학생들이 교내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가. 츠키시마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경찰서죠? 카라스노 고등학교인데요. 네. 네. 이상한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서요. 네? 벌써 출동했다고요?아…근데 아무래도 더 있는 것 같은데요. 네, 네.”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간단히 용건만 말하고 끊은 츠키시마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히나타와 스가와라에게 경찰에게 들었던 말을 들려주었다.
“경찰 아저씨가 뭐래?”
“신고한 사람들이 꽤 되나 봐요. 저희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문만 잘 닫아두면 방 안까지 들어오진 않는대요.”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히나타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해주며 츠키시마는 휴대폰의 자판을 꾹꾹 눌렀다.
“다른 곳에도 경찰들이 나가있는데다 소방대원들이나 구급차도 같이 와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거래요. 그 동안 밖에 나가지 말고 얌전히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다들 집에 오늘 늦는다고 연락정도는 해두세요.”
“소방대원이랑 구급차는 왜?”
“저 이상한 놈들이 안으로 들어오진 않고 있는 게, 어쩌면 사람들을 건물 안에 가둬놓고 불을 지르려고 그러는 거 일 수도 있대. 그리고 전염병 환자들 몇몇이 탈출해서 소동을 벌이는 걸 수도 있고.”
“진짜?!”
“그럴 수도 있다고. 아닐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지금 야쿠자들도 조사하느라 인력이 부족한 모양이야.”
“야쿠자?! 왜?”
“혹시 야쿠자들이 이상한 약 같은 거 풀었을 수도 있어서. 사실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지.”
츠키시마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봤던 마약을 먹은 후 정신을 놓다시피 한 여자의 동영상을 떠올렸다. 눈에 초점이 없고 문이 있으면 연다는 정도의 사고조차 하지 못하는 게 비슷했다.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왜 마약 같은 걸 먹어서는.
1일째 ‖ PM 6:30
“경찰이 늦네.”
스가와라가 중얼거린 말에 히나타가 벌떡 일어났다. 몇 시간째 앉아있기만 해서 좀이 쑤셨다. 기왕 여기서 기다릴 거 배구하면서 기다리는 게 낫지! 히나타는 공이 담겨있는 바구니 안에서 공을 하나 꺼내 들고 카게야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카게야마! 토스 올려줘 토스!”
“엥?”
“경찰이 언제 올 줄 알고 계속 기다리기만 해! 그 동안 연습하자!”
“…그럴까.”
“그만둬.”
팔목에 찬 시계를 풀려던 카게야마를 츠키시마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렸다. 줄곧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츠키시마가 왜 말리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히나타와 카게야마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저 이상한 놈들이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우리보고 여기서 배구 연습이나 하라고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경찰이 언제 올 줄 알고 계속 가만히 있으라는 거야? 배구 연습정도는 괜찮잖아!”
히나타가 입을 비죽 내밀며 항의하곤 카게야마를 돌아봤다. 그치? 배구 연습정도는 괜찮지? 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 으응? 하고 애매한 대답을 하며 시계를 손목에서 마저 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차지도 못하고 있는 카게야마의 팔을 누군가 붙들었다. 스가와라였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팔을 놓아주며 온화하게 웃었다.
“지금은 츠키시마 말대로 하자.”
“…심심한데.”
카게야마에게 한 말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걸 안 히나타가 작게 투덜거리며 다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주저앉다 못해 아예 바닥에 눌어붙어있는 히나타를 잘 타일렀다.
“저 사람들의 목적을 모르니까, 일단은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자.”
“눼에에-”
히나타는 배 밑에 공을 깔고 누워 바닥을 구르며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히나타에게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그런 것까지 생각하시다니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조금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아니 대단한 건 아닌데….
꼭 아이 같은 카게야마와 히나타의 반응에 츠키시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고등학생이나 된 녀석들이 무슨 애들 마냥 저러기는. 의욕 없는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넘기고 있던 츠키시마의 손이 일순 멈췄다. 화면에 뜬 인터넷 뉴스의 기사 헤드라인이 안경 너머 눈동자에 박혔다. 센다이시 4중 추돌사고. 경찰차가 신호를 위반하고 앞서 달리던 트럭을 받아…. 기사 윗부분엔 사고현장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여기에서 그리 머지않은 도로였다. 츠키시마는 스크롤을 내려 기사를 읽었다.
센다이시에서 오늘 시각 오후 6시 7분 차량 추돌사고가 일어나 2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했다. 난동을 부리던 시민을 체포해 경찰서로 향하던 경찰차가 신호를 위반하고 앞서 달리던 15톤 트럭과 충돌해 앞서 가던 차량 4대가 잇따라 부딪혔다. 이 중에는 죄수를 이송 중이던 버스 등의 대형 차량도 있어 피해가 더 막심했으며, 사건 발생 후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피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츠키시마는 한숨을 내쉬며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어째 오늘은 인상을 찌푸릴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경찰 많이 늦을 것 같은데요.”
츠키시마는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며 작게 혀를 찼다. 사고 소식에 부원들은 하나둘씩 휴대폰을 꺼내 부모님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츠키시마는 휴대폰을 다시 가방 안에 넣으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곤 이내 다시 화면을 키곤 고민하기 시작했다. 형에게도 문자를 보내두는 게 좋으려나?
잠깐 동안 고민하던 츠키시마는 이내 조심스레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형, 우리 학교에 이상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경찰을 불렀는데- 이건 너무 길어. 학교에 이상한 사람 있어서 늦음. 이건 또 너무 무성의해보이잖아. 열 번도 넘게 문자를 지웠다 다시 썼다 하던 츠키시마는 결국 카게야마가 서툴게나마 니시노야에게 상태는 좀 어떻냐는 문자를 보내고 있는 걸 보고 나서야 형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형 나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별 일 아니니까 걱정하진 마.
등 뒤로 부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엄마. 나 오늘 좀 늦어. 어 괜찮아. 냉동실에 아이스크림 사둔 거 다 먹으면 안 돼! 알았지? 뭐? 무슨 일 있냐고? 아니. 별 일 아닐 테니 신경 쓰지 마. 응. 괜찮아. 별 일 아냐….
* * *
누군가가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눈을 반쯤 뜨고 말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눈이 전부 떠지진 않았다. 히나타의 밝은 주홍색 머리카락과 꿈결처럼 흔들리는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카게야마는 비몽사몽한 머리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결국 저녁시간이 지나서도 경찰은 오지 않았고, 무리해서 밖으로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오늘 하루는 체육관에서 자자고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내일은 주말이니 괜찮지 않겠냐는 다이치의 말에 다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투덜거렸다. 아, 씻고 싶다…. 난 씻는 것보단 저녁 좀 먹고 싶다! 배고파! 나도 나도! 카게야마는 눈을 깜빡였다. 다들 툴툴거리는 와중에도 히나타만은 두근거린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잡고 방방 흔들었다.
있지 카게야마, 다 같이 체육관에서 잔다니 왠지 재밌을 것 같지 않아? 꼭 합숙 같아서 완전 신나! 그 말에 모두가 결국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그게 뭐야. 너 합숙 되게 좋아한다. 네! 저 합숙 완전 좋아요! 다 같이 하는 거 진짜 진짜 좋아요!
밖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경찰은 아직도 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무엇 하나 나아진 게 없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신이 난 듯한 히나타의 말에 부원들의 기분은 많이 누그러졌다.
히나타 멍청이. 이상한 녀석. 히나타가 들었으면 폴짝 뛰었을 말을 중얼거리고 카게야마는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았다. 팔목에서 찬 시계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빛나며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새벽 4시였다.
2일째 ‖ AM 06:43
“아사히가 안 보이는데.”
부산스러운 소리에 눈을 뜬 카게야마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어제, 몸은 몰라도 정신적으로 피로하긴 했는지 보통 일어나는 시간에서 40분이나 지나있었다. 카게야마가 졸음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자 다이치가 다가와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카게야마 혹시 아사히 못 봤어?”
“아즈마네 선배요? 왜요?”
“아침부터 안 보여서.”
“전 모르겠는데요. 야 일어나봐 히나타.”
간밤에 히나타와 스가와라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걸 떠올린 카게야마가 아직도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히나타를 발로 툭툭 쳐서 깨웠다.
“으음…10분, 아니 5분만 더….”
“뭐가 5분만이야? 벌써 7시거든?”
“헉! 7시! 카게야마보다 늦게 가면 안 되는데!!”
“…뭐라는 거야.”
“엇? 카게야마? 왜 우리 집에 있어?”
“잠 덜 깼냐 멍청아.”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히나타는 그제야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맞다! 합숙!”
“합숙 아니라니까!”
일어나서까지 합숙 타령인 히나타에게 카게야마가 타박을 주자 옆에 있던 다이치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둘을 보고 있으니 지금이 제법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도 잊게 된다. 다이치는 둘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볼 때가 되어서야 웃던 걸 멈추고 히나타에게도 아사히의 행방을 물었다.
“히나타, 혹시 아사히 어디 있는지 알아? 아침부터 안 보이던데.”
“어…아사히 선배 새벽에 나가셨는데.”
“뭐?! 왜?”
“네? 그게…노야 선배를 본 것 같다고….”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는 가방 속의 장갑을 떠올렸다. 니시노야 선배가 새벽에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노야가 새벽에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그리고 다이치도 카게야마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노야가 대체 왜 그 새벽에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어?”
“저도 모르겠어요…전 못 봤는데 아사히 선배가 자기가 창문으로 똑똑히 봤다고 하셔서….”
카게야마가 그럼 니시노야 선배 아직도 학교에 계시려나?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 장갑 돌려드려야하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막 일어나 하품을 하고 있던 스가와라가 다이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새벽에 아사히가 나간 것 때문에 그래?”
“스가, 알고 있었어?”
“어. 나랑 히나타가 말렸는데 듣질 않더라고.”
그 녀석 평상시엔 생긴 거랑 달리 유약한 주제에 한 번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아주 똥고집, 황소고집이 따로 없다니까.스가의 투덜거리는 말에 히나타가 맞아요!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치자 다이치도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노야 일이라면 확실히 말려도 안 들었겠네.”
“그렇다니까. 그 새벽에, 밖에 누가 더 있을 줄 알고….”
“…뭐, 아사히라면 괜찮겠지.”
겉모습만큼은 어디 조직의 보스라고 해도 믿을 아사히의 외모를 떠올린 다이치가 피식 웃었다.
“괜찮을 거야. 그 이상한 녀석들도 아사히 얼굴 보면 깜짝 놀라서 도망갈걸? 아마 지금쯤 노야도 바래다주고 집에 들어가서 한숨 푹 자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연락도 없는 거겠지. 다이치가 덧붙인 말에 스가가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생긴 것만 그렇지 사실 두부가 따로 없는데 말이지.”
“그래도 스파이크는 엄청 강해요!”
히나타가 눈을 반짝이자 스가와 다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그렇지. 우리 카라스노의 에이스니까.”
“맞아. 두부여도 에이스지.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두부 아사히.”
아사히가 들었다면 멋대로 뭉개지 말아줘…라며 말렸겠지만 에이스는 지금 없는 관계로 둘은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모를,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대화를 나누며 키득거렸다. 그 두부 녀석, 물렁해서는 말이야. 뭐, 그래도 괜찮겠지. 물렁해도 에이스니까. 맞아 에이스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막 잠에서 깬 츠키시마가 휴대폰을 켜보곤 “누구 충전기 있는 사람 없어?”하고 물었다.
이틀째의 아침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2일째 ‖ AM 09:00
“츳키, 왜 그래?”
“누가 인터넷에 안 좋은 글들을 올리고 있어서.”
“어떤 글인데?”
“…볼 가치도 없는 글이야.”
츠키시마는 화면을 보려는 야마구치의 어깨를 밀어내며 황급히 인터넷 창을 껐다. 야마구치가 끈질기게 대체 뭐길래 그러냐고 물었지만 츠키시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츠키시마는 자신을 부르는 야마구치의 말을 무시하고 눈을 감고 눈가를 꾸욱 눌렀다. 아까 본 글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 말이에요, 사람들을 단순히 공격하는 게 아니라 먹고 있는 것 같아요.'
눈앞이 캄캄한 건 눈을 감고 있어서일 것이다.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제 불안함을 캄캄한 색으로 먹칠해 지우려 했다. 그러나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안은 연기처럼 뭉게뭉게 제 영역을 넓혀갔다. 사람을 먹는다는 말이 사실이면 도대체 이유가 뭐지? 악마 숭배 사이비 교라도 되나?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츠키시마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켜 화면 위를 보았다. 배터리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휴대폰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화면이 꺼지는 것처럼 불안한 생각도 버튼으로 꺼버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결국 불안함의 버튼을 찾지 못한 채로 츠키시마는 점점 어두워지는 휴대폰 액정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형이 아직까지 답장을 하지 않고 있었다.
2일째 ‖ PM 01:00
“아…배고프다.”
“조용히 해. 배고프다고 말하면 어디서 밥이 떨어지는 줄 아냐.”
“배고프니까 배고프다고 말할 수도 있지!”
“히나타 이 멍청아! 다들 배고픈 거 참고 있으니 괜히 말 꺼내지 말라고!”
카게야마는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히나타를 윽박질렀으나 타박을 주기가 무섭게 카게야마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카게야마군이 제일 배고픈 것 같네요~”
“이…이…입 다물어 멍청아!”
“안 들려~ 카게야마군은 바보~ 바보래요~ 배고픈 바보~”
“히나타 너 진짜…!”
“자, 자. 두 사람 다 싸우지 마. 지금 싸워봤자 괜히 힘만 빠진다고.”
붙어있기만 하면 투닥거리는 일이 잦은 두 사람을 말리며 스가와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거 배구할 때엔 호흡이 그렇게 척척 맞으면서.
아직 고등학생이건만 사춘기 아들 둘을 둔 기분을 벌써부터 느끼는 스가와라를 하늘이 돕기로 결정하기라도 한 건지 때맞춰 스피커에서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어, 그게…내가 방송해도 되는 건가? 나 한다? 진짜 내가 한다?」
카라스노 고교는 공립학교다 보니 예산이 넉넉지 않아 동아리 자금도 빠듯하게 주는 편이었다. 그런 카라스노 고교의 현실을 대변하듯 방송 중간중간 우웅-하고 울리는 소리나 끼긱하는 노이즈 소리가 제법 많이 들려왔다. 밖을 떠도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문 쪽에 몸을 부딪치는 바람에 방송 잡음과 철문이 울리는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날카롭게 망막을 후벼 팠으나 다들 애써 잡음을 무시하고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카, 카라스노 고교 방송부에서 교내에 남아있는 학생 여러분께 알립니다. 저희 방송부 측에서 아까 경찰 측과 가까스로 연결이 되어 연락해본 결과 현재 미야기 현 내의 경찰로는 구조요청이 감당이 되질 않아 다른 현들의 경찰서에도 추가로 인력요청을 한 모양입니다. 어…그래서 아마도 몇 시간 내에 경찰들이 아직 학교에 있는 학생들을 구조하러 올 예정이오니 교내에 남아있는 학생 여러분께서는 저희 방송부에 문자로 현재 위치와 인원정보를 알려주세요. 저희 방송부 부장 번호는…」
“이제야 오겠네.”
다이치가 방송에서 말해준 번호로 문자를 보내며 웃었다. 바깥에서 아무리 문을 들이받는다고 한들, 철문이 그리 쉽게 열릴 일은 없었다. 무시하다 보면 저 이상한 사람들은 돌아갈 거고, 곧 경찰들이 우리를 구하러 와줄 거다.
“고작 하루 갇혀있었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맞아요! 배구도 못 하고!”
스가와라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게야마! 넌 나가면 제일 먼저 뭐 할거야?”
“…밥 먹을 건데.”
그 말에 스가와라는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렸으나 곧 배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에 입가의 웃음을 멋쩍은 것으로 바꾸고 머리를 긁적였다.
“바, 밥…중요하지…. 마파두부 먹고 싶다. 엄청 매운 걸로.”
“안 됩니다! 빈속에 매운 걸 드셨다간 배탈 나요!”
“카게야마,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 선배의 위장은 엄청 튼튼하다는 말씀!”
“그래도….”
“난 간장계란밥 먹고 싶다!”
음식 이야기가 나오자 히나타가 눈을 반짝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갓 지어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에 계란이랑 간장을 넣고 살살 비벼서 크게 한입! 크으으~”
“갓 지은 흰 쌀밥은 카레랑 먹는 게 더 맛있어.”
“아니거든? 간장계란밥이 최고거든?!”
스가와라는 또 다시 다투기 시작한 두 사람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 싸우지 말라니까?”
그리곤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두 사람에게 자신의 의견을 열렬하게 피력했다.
“갓 지은 흰 쌀밥엔 역시 마파두부지!”
“아닌데요?!”
“아닙니다!”
“마파두부라니까? 선배 말을 안 듣는 거야? 안 되겠네! 이렇게 된 이상 다 같이 마파두부밥을 먹으러 가야겠어! 내 단골 가게가 마파두부를 정말 맵게 잘하는데….”
“앗 거기! 거기죠! 아사히 선배가 그거 먹고 다음날 하루 종일 화장실에서 살았다던 거기!”
“아사히 녀석은 위벽도 약해빠졌다니까.”
그래서는 강한 배구 선수가 될 수 없는데 말이야! 하고 스가와라가 장난스레 덧붙이자 스가와라와 히나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게야마가 놀라서 불쑥 말을 걸었다.
“가, 강한 배구 선수가 되려면 매운 것도 잘 먹어야 하나요?”
“그럴 리가 있…”
“그러엄!”
스가와라가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히나타의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이자 카게야마도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거였나…?”라고 중얼거렸다. 그걸 본 스가와라와 히나타가 웃어대기 시작하자, 벽에 상체를 기댄 채로 앉아있던 츠키시마도 드물게 피식 웃으며 “왕님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하네.”하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아직 형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은 듯, 츠키시마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으나, 날카롭던 신경만큼은 방송 이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괜찮아. 이제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까. 집에 가서 확인해보면 되겠지.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긴장을 느슨하게 푼 것을 위장도 눈치챈 것인지 츠키시마의 배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딸기 케이크 먹고 싶네.”
귓가가 조금 빨개진 츠키시마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고 괜히 말을 돌렸다. 히나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바닥에 드러누워서 뒹굴뒹굴 구르기 시작했다.
“츠키시마의 배가 울리니 배가 더 고프다아-”
무안해진 츠키시마가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자 야마구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츳키, 어디 아파? 감기야? 하고 물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의 말에 고개를 젓고 히나타를 바닥을 구르고 있는 히나타에게 뭐라고 한마디 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카게야마가 더 빨랐다.
“자꾸 먹는 거 얘길 해서 그렇지 히나타 이 멍청아!!”
“지도 막 신나서 얘기 했으면서!”
“자, 두 사람 다 거기까지. 또 싸우면 나가서 마파두부 세 그릇씩 먹일 거야?”
“헉! 죄송합니다!”
“그걸 먹으면 세배로 강한 배구선수가 될 수 있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카게야마 바보!”
“뭐 임마?!”
“둘 다 싸우지 말라니까 글쎄?”
스가와라가 둘의 뺨을 살짝 꼬집자 그제야 말다툼을 멈춘 두 사람이 꼬집힌 볼을 슬슬 쓰다듬었다. 진짜 애들이 따로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스가와라가 슬며시 입가에 웃음을 띄자 히나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보니 매점 여기서 가깝잖아!”
* * *
“안 돼. 위험해. 경찰들이 곧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그치만 배고파서 돌아가시겠는데요!”
“주장이 안 된다면 안 되는…”
다이치는 완고했다. 그러나 다이치의 굶주린 위장은 그의 완고한 생각을 지지해줄 생각이 없었나보다. 주장이라고 해서 이런 것까지 남들과 달리 우렁찰 필요는 없건만, 누구보다도 우렁차게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다이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푸하하!”
“스가 얌마! 웃지 마!”
“1번 선수가 1번으로 배가 고프신 것 같은데요!”
“히나타 너…!”
다이치가 끄응하고 신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배가 고프긴 고팠다. 그것도 엄청. 차라리 아예 배가 고프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뱃고동이 울리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배가 고프다.하지만 밖은 위험하다. 머리를 감싸고 고민 중인 다이치의 어깨를 스가와라가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다이치 너무 걱정하지 마. 아까 윗층에 올라가서 봤는데 그 이상한 녀석들도 지금은 주변에 없는 것 같고, 조심해서 다녀오면 될 거야.”
“그래도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잠깐은 괜찮을 거라니까?”
“하지만 누가 나갈지 정하는 것도…”
“저요! 저요! 저랑 카게야마가 다녀올게요!”
히나타가 손을 번쩍 들며 카게야마의 팔을 잡았다.
“뭐야, 왜 멋대로 결정해.”
“카게야마 넌 배 안 고파?”
“…배고파.”
“그럼 우리 둘이 다녀오자!”
카게야마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스가와라가 웃는 낯으로 카게야마의 팔을 잡고 있는 히나타의 손을 떼어냈다.
“너희 둘은 안 돼. 기각.”
“네? 왜요?”
“너희 둘을 보냈다가는 또 말싸움하고 있을 게 뻔해.”
“안 싸워요!”
“아니면 딴 짓 하느라 늦게 오겠지.”
그 말에 항의하려던 히나타는 이어지는 스가와라의 말에 제대로 대꾸조차 하지 못한 채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합숙 때, 너희 둘이 심부름 다녀오다가 딴 짓하느라 우리 야참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잊은 건 아니겠지?”
지난 합숙 때, 심부름을 다녀오던 카게야마와 히나타가 둘이서 배구 연습을 한답시고 야참이 든 봉투를 가져오는 것을 까먹는 바람에 결국 야참을 야생 너구리들에게 기부한 꼴이 되어버렸던 그 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입이 열 개가 아니라 열한 개쯤 있어도 할 말이 없어서 합죽이가 되어버렸다. 스가와라는 괜히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두 꼬맹이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다, 아까 히나타가 잡고 있었던 카게야마의 팔을 이번에는 자기가 잡아끌었다.
“매점은 나랑 카게야마 둘이서 다녀올게.”
* * *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벽에 등을 딱 붙인 채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던 카게야마가 스가와라에게 손짓하자 스가와라가 발뒤꿈치를 들고 카게야마의 곁으로 살금살금 걸어왔다.
“있지 카게야마, 왠지 잠입미션 하는 것 같아서 좀 두근거리지 않아?”
“잠입미션이요?”
"응. 이런 식으로 적들의 눈을 피해 몰래 목적지까지 가서 원하는 물건을 가져와라! 게임에서 자주 나오잖아? 이런 퀘스트.”
“어…그게…제가 게임을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카게야마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자 스가와라는 잠시 배구밖에 모르는 저 후배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음…그러니까 배구로 따지자면…블로킹이 없는 곳으로만 공을 보내는? 그런 식으로?”
이게 맞는 비유인가? 스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지만 카게야마는 그걸 또 알아들었는지 오오하고 감탄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저 사람들을 피해서 매점에 가는 건 굉장한 일인 거네요!”
“그, 그렇겠지?”
“네!”
배구 얘기가 나왔던 탓인지 조금 신이 나 보이는 카게야마가 아까보다 훨씬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달려가 매점의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도 잠겨있지 않았고 매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팥빵밖에 없네.”
매대를 뒤지던 스가와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단팥빵은 달달해서 밥보다는 간식이라는 느낌인데.
“핫도그 남은 거 없나? 하기야 그런 건 당연히 점심시간 때 다 팔리고 없겠지….”
“저는 단팥빵도 좋은데.”
카게야마는 단팥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점심시간에 타나카 선배랑 같이 빵을 먹었지. 슈크림빵은 나눠먹었는데 단팥빵은 안 나눠먹었었네.
“…저는 단팥빵도 좋으니까”
“응?”
“그러니까 다 같이 나눠먹어요. 단팥빵.”
“하하, 그러기 싫어도 어차피 단팥빵밖에 없어서 다 같이 단팥빵 먹어야 해.”
스가와라가 웃어 보이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팥빵을 몇 개 더 집었다. 다음번에 타나카 선배와 또 점심을 나눠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계산은 내가 할게.”
“네? 하지만….”
“괜찮아. 평소엔 다이치가 자주 쏘잖아? 나도 부주장인데 이럴 때라도 한번 쏴야지.”
매점 아줌마도 없는데다 비상 상황이나 다름없는데 돈을 내야하나 잠시 고민하던 스가와라는 이내 자신이 아까 카게야마에게 오늘은 내가 ‘쏜다’고 했던 발언을 떠올리곤 결국 지갑을 열어 아무도 없는 매대 안쪽에 돈을 올려뒀다. 이러면 되겠지.
“스가와라 선배, 음료수 뽑아왔어요.”
매점 자판기에서 카게야마가 음료를 잔뜩 뽑아 스가와라 옆으로 돌아왔다. 우유만 잔뜩 뽑아올 줄 알았는데 요구르트나 탄산음료까지 뽑아왔다는 사실에 조금 감격한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머리 쓰다듬으며 잘했어! 라고 칭찬하자 카게야마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근데 좀 많지 않아? 음료수.”
“어…종류별로 뽑다보니….”
카게야마의 양팔 가득 산처럼 쌓여있는 음료수를 보며 스가와라는 많은 게 부족한 것보단 낫겠지 생각하며 빵들을 안아들었다.
“그럼 이만 나가볼까? 짐도 있으니 더 조심해서 가야해.”
“네!”
카게야마는 매점 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이번에도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 * *
똑똑
노크소리가 두 번 울리자 야마구치가 철문을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슬며시 열어 문틈에 눈을 대고 바깥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스가와라와 카게야마였다.
다행이다. 역시 둘 다 무사했구나.
야마구치는 문을 마저 열고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재빨리 닫았다.
“다녀왔어.”
스가와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지고 온 단팥빵 무더기를 바닥에 와르르 쏟았다.
“어때? 미션 멋지게 클리어지?”
“아니 근데 왜 단팥빵밖에 없어…?”
“…매점에 그것밖에 없었어.”
“크림빵도 없었어?”
다이치가 못내 아쉬운 듯 단팥빵 무더기를 뒤적이자 스가와라가 쪼그려 앉은 다이치의 어깨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세게 치며 외쳤다.
“그냥 먹어! 위험을 감수하고 가져온 귀한 단팥빵이야!”
카게야마가 단팥빵 옆에 음료수들을 쏟아놔도 되는 건가? 근데 탄산음료는 충격을 주면 안 되지 않나? 를 고민하며 엉거주춤하게 서있자 시미즈가 그 옆으로 다가와 카게야마가 위태위태하게 안고 있는 음료수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집어 들고 하나씩 바닥에 내려두었다.
“앗, 감사합니다.”
“…고생 많았어.”
저 말을 타나카 선배나 니시노야 선배가 들었다면 엄청 기뻐하셨을 텐데. 카게야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시미즈는 카게야마가 들고 있던 음료를 전부 바닥에 내려두고 그 중에서 우유 팩을 하나 집어 카게야마에게 내밀었다. 파란 하늘 배경에 기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우유였다.
“감사합니다. 이거 제가 자주 마시는 건데….”
“알아.”
시미즈는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게야마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사과 주스와 빵을 두 개씩 들고 야치가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오옷! 카게야마군이 우유 말고 다른 음료도 사오다니!”
시미즈에 이어 이번엔 히나타가 바닥에 놓인 음료들을 보며 카게야마에게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감탄을 내뱉었다.
“당연히 네가 맨날 먹는 그 우유만 잔뜩 사올 줄 알았는데!”
카게야마가 발끈해서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지는 않다고 반박하려 했으나, 스가와라가 끼어들었다.
“어허 히나타. 이제 카게야마도 다른 사람들 생각해주고 그러거든?”
히나타가 자신에게 딱 맞춰서 올라오는 토스를 떠올리며 “하긴 배구에선 전부터 그랬으니까.” 라고 말하자 스가와라가 “이젠 배구 말고 다른 거에서도 그런다니까?” 하며 빙긋 웃었다. 예전에는 남들이 뭘 어떻게 생각할지는 별로 신경 안 쓰던 카게야마가 벌써 이만큼이나 타인을 생각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코끝이 찡했다.
“야 왕님.”
어느 샌가 옆으로 온 츠키시마가 바닥에 주르륵 놓인 음료를 보며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왕이라는 호칭에 발끈하기도 전에 냉큼 주스 하나를 들고 등을 홱 돌렸다.
“…수고했다.”
“엉?”
“…못 들었으면 됐어.”
츠키시마는 주스팩 옆에 붙어있는 빨대를 뜯었다. 평소에 안 하던 말을 하려니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2일째 ‖ PM 2:10
“경찰들 언제 올까요?”
“아직 방송 끝난 지 한 시간밖에 안 지났으니 좀만 더 기다려보자.”
카게야마는 다이치와 히나타의 대화를 들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창문의 뿌연 유리창을 통해 바깥 상황이 보였다. 비틀거리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어째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까 매점을 다녀오질 잘한 것 같았다.
“스가, 어머니한테서 전화 안 왔어?”
“응. 전화해도 안 받네. 지금 바쁘신가?”
“좀 있다가 다시 전화해보자.”
“그래야겠다.”
“문자는요? 문자로 답장해주시면 될텐데.”
동생과 문자를 주고받고 있던 히나타가 스가와라를 올려다보며 묻자 스가와라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그게…우리 엄마는 휴대폰을 잘 못 쓰셔서 문자도 못 보내셔. 그래서 어제 연락도 전화로 했고.”
“아, 맞아 우리 할아버지도 휴대폰 잘 못 쓰시더라고요. 열심히 설명해드렸는데도.”
“그런 분들 있지.”
카게야마는 셋의 대화를 듣고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켰다. 문자 메시지 함에 들어가자 ‘엄마’ 라는 이름이 보였다. 별 일 아닌 거 맞지? 조심해서 들어와. 어제 엄마가 보낸 문자였다. 그 외엔 거의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스팸 메시지뿐이었다. 카게야마는 어머니의 문자에 답장을 할까 고민하다 끝내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자신 외에 다른 부원들은 모두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인터넷을 보고 있었고 야마구치는 노래를 듣고 있는지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히나타는 동생과 문자 중이었고, 다이치와 스가와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둘이 같은 게임을 하는 건지 이번엔 내가 이긴다는 등의 말이 나오고 있었다. 딱히 자주 들어가는 인터넷 사이트도 없고 기본 음악 외엔 다운 받아둔 음악도 없고, 문자를 주고받을 상대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게임을 깔아둔 것도 아닌 카게야마는 그냥 휴대폰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그들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간간이 배터리가 없다. 는 말이나 어떻게 충전기를 가지고 온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지? 하는 말이 들려 카게야마는 다시 휴대폰 화면을 켜서 제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얼마나 남은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여튼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심심해진 카게야마는 ‘왜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휴대폰 배터리가 많이 남아있는 것인가’를 고민하기로 했다. 그러나 답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일까. 5분 만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휴대폰을 많이 쓰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답에 도달한 카게야마는 뿌듯함 반, 무료함 반 섞인 얼굴로 아랫층과 창문을 번갈아보다, 게임을 끄고 기지개를 펴던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가를 곱게 휘며 생긋 웃는 스가와라를 보며 카게야마는 나도 웃어야 하는 건가를 고민하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입가를 끌어올렸다. 다른 건 다 많이 나아졌지만 저 딱딱한 웃음만은 그대로구나. 카게야마의 미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 표정을 본 스가와라가 킥킥대다 카게야마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뭐해?”
“그냥…밖에 보고 있었어요.”
“경찰들 오나 보려고?”
“네…뭐….”
“나도 올라가서 같이 볼까? 경찰들은 언제 오려나~”
위층으로 발을 옮기려던 스가와라는 발치에 떨어져 있는 비닐봉지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너네들! 먹었으면 치워야지!”
꼭 엄마같은 스가와라의 잔소리에 다들 꾸물꾸물 일어나 빵 봉지를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을 뒹굴던 빵 봉지와 주스팩들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꾹꾹 눌러 담기가 무섭게 스피커에서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방송이 시작되었다.
“아 진짜 방송 장비 좀 바꿔주면 안 되나.”
“나중에 건의 넣을 거야.”
「방송 시작할 때마다 완전 시끄럽네.」
벌써 방송이 시작되어버린 걸 모르는 건지 투덜거리는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투덜거리는 방송부원의 목소리에 히나타와 스가와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맞아. 완전 시끄러워 저 노이즈. 웬만하면 장비 좀 바꿔주지.
「어…방송부에서 알려드립니다. 방금 이 근처 대로변에서 또 추돌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경찰들이 좀 늦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마 금방 올 테니 다들 너무 걱정 마세요!」
스피커 너머로 방송부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됐어? 응. 이 CD맞지?
“뭘 하려는 거지?”
츠키시마가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야마구치도 이어폰을 빼고 스피커를 올려다봤다.
「음…다들 안심하시라는 의미에서, 점심 방송시간은 아까 전에 지났지만 지금부터 점심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발언에 다들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경찰이 늦어진다는 소식에 나려던 화도 다 날아가버릴 정도로 기발한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방송부 녀석들은 이 학교 학생들을 안심시키려는 데에 모든 걸 건 것 같다고 스가와라가 웃으며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도 불안할 텐데도 방송부 부원들은 남들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꼭 침몰하는 와중에도 승객들을 위해 끝까지 남아 연주를 계속하던 타이타닉호의 교향악단처럼.
「첫 번째 곡은 A그룹의 신곡입니다. 혹시 신청곡이 있으시다면 점심방송 때처럼 저희 방송부에 문자로 신청곡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우리도 신청곡 보내볼까? 뭐 신청할까?”
다이치도 조금 들떴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스피커에선 이번에 복귀한 아이돌 A그룹의 신곡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앞부분이 끝나면 시끄러울 정도로 신나는 빠른 비트 부분이 시작되는 노래였다.
“저는 B가수가 저번에 음악 방송에서 불렀던 그 노래요!”
히나타가 손을 들고 다이치에게 신청곡을 말했다. 노래의 앞부분이 막 끝나고 있었다.
“좋아. 그럼 그걸로 신청한다.”
다이치가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 때에 노래 사이사이 뭔가 쿵쿵 울리는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방송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부딪치고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누가 방송실 찾아왔나?”
츠키시마가 벌떡 일어섰다. 혹시 경찰인가? 경찰이 도착한 건가?
쿵쿵 부딪치는 소리는 이제 스피커뿐만 아니라 체육관의 철문에서도 들리고 있었다.
“여, 열려있어요.”
밖의 이상한 놈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진 않았기에, 체육관 문은 잠겨있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나 모두가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잠들었을 때 경찰이 왔다가 잠겨있는 문을 보고 그냥 지나칠까봐 문은 계속 잠그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열려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바깥에선 계속 문을 두드릴 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아무래도 경찰이 아니라 그놈들이 문 쪽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방송부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쪽은 체육관의 두꺼운 철문이 외부인의 침입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방송부실의 얇은 문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모, 못 들어오게 문을 막아!」
「막고 있어!」
「기계를 문 쪽으로 옮겨두면…」
스피커에선 방송부원들의 우왕좌왕하는 소리와 함께 신나는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송부원들이 코메디 상황극을 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 아비규환 속에 배경으로 깔리고 있는 노래는 익살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노래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그 순간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문이 부서졌어!」
「꺄악! 왜 이러세요!!」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많이, 계속해서 들렸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 방송부실로 떼 지어 들어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발소리만큼이나 많은 말소리가 들렸다.
당신들 누구야! 왜 이러세요! 여자애들 빨리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해! 무, 물었어!
발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말’들이 곧 ‘비명’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꺄아아아악!!!」
「으아아!!」
높은 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날을 세우기가 무섭게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고막을 때렸다. 말이 되지 못한 비명들이 낡은 스피커의 노이즈와 함께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직- 엄마 살려… 직…아파! 끼익…싫어! 저리가!
스피커 너머의 누군가 울음을 터트렸다.
방송부에서 튼 흥겨운 노래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고작 5분짜리인 그 짧은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참극이었다.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카게야마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비틀거리던 카게야마의 등에 단단한 벽이 닿았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무릎에 힘이 빠지려던 바로 그 순간, 비명사이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오도독」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게야마는 페인트가 매끄럽게 칠해지지 않아 울퉁불퉁한 벽을 손으로 짚으면서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났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외마디의 비명 사이사이에 뭔가를 씹는 소리가 섞여있었다. 카게야마는 손가락으로 벽을 더듬었다. 단단한 걸 씹는 것 같았지만, 이 벽처럼 아주 딱딱한 걸 씹는 소리는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같은데, 어떤 소리지?
“아….”
카게야마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닭이었다. 살아있는 닭이 아니라 프라이드 치킨. 치킨 닭다리의 살을 뜯어먹다보면 반투명한 뼈가 나왔다. 다른 뼈들에 비해 물러서, 씹어 먹을 수 있는 연골이었다. 관절마다 있는 그 뼈를 씹으면 오독오독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도독」
바로 저 소리처럼.
“우욱…!”
카게야마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든 토든,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누군가가 ‘먹히고’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게야마는 어제 교실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던 2학년 선배를 떠올렸다. 니시무라 선배라고 했던가. 그 2학년 선배. 그 미친 선배가 방송실에 들어가서 누군가를 잡아먹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지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지금 ‘뭔가’를 먹고 있는 게 한두 명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한번 그 소리를 인식하기 시작하자 물렁뼈를 씹는 소리 말고 다른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찌익-하고 뭔가를 찢는 소리, 연한 무언가를 어금니로 우물거리는 소리, 그리고 꿀꺽하고 ‘음식물’을 삼키는 소리.
「흑, 허윽…끅…다리…내 다리…아파…」
카게야마는 반사적으로 제 무릎을 쓰다듬었다. 아까 그 오돌뼈를 씹는 소리는 아마도….
“꺄아아악!!!”
아무래도 저 녀석들이 뭘 먹고 있는지 알아차린 건 카게야마뿐만이 아니었나보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야치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누가 방송 기기의 버튼을 건드렸는지 삐익-! 하고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노이즈가, 뒤이어 아까보다 훨씬 시끄러워진 노랫소리가 들렸다. 볼륨버튼을 건드려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유쾌한 노랫소리가 아무리 커져도 꺼져가는 비명소리를 모두 지울 순 없었다. 노랫소리가 커지자 철문이 더 요란하게 흔들렸다.아까보다 밖에서 몇 명인지 모를 이상한 사람들이 철문에 몸을 더 세게 부딪히고 있었다. 비명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탓에 철문이 울리는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잠깐, 비명소리가 잦아들었어?
시미즈가 이제는 흐느끼고 있는 야치를 달래주고, 카게야마가 의문을 품기가 무섭게 마이크 쪽으로 누군가 풀썩 쓰러졌다.
「흐…그윽…끅…」
쉭쉭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가래 같이 진득한 게 목 안에서 끓는 소리였다. 그리고 곧 이가 뼈와 부딪히는 소리와 살을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다들 목을 공격당한 건가? 왜 하필 목을? 요란한 반주와 철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것만 같아서 카게야마는 뒷걸음질 쳤다. 손바닥에 매끄럽고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창문이었다. 그러고보니 지금 체육관 문 앞에 몇 명이나 있는 거지? 카게야마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하나, 둘, 셋, 넷…어림잡아도 대충 열 명은 넘는 것 같았다. 아까보다 훨씬 늘어났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밖을 내려다보던 카게야마는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다들 건물 입구, 혹은 야외 스피커 주변에 모여 있었다.
…스피커?
점심방송으로 노래를 틀고 나서 갑작스레 습격당한 방송실, 목을 물어뜯긴 방송부원들, 스피커 근처에 몰려있는 이상한 사람들.
“…소리.”
방송부원들이 자동재생으로 설정해뒀는지 천장에 달려있는 스피커에선 앨범의 두 번째 곡이 재생되고 있었다. 저 소리가 멎기 전까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물러가지 않을 게 뻔했다. 카게야마는 잠시 천장에 달린 스피커를 노려보다 아랫층을 향해 소리쳤다.
“공…공 좀 주세요!”
“…뭐?”
“빨리요!”
덜컹거리는 문을 몸으로 막고 있던 스가와라가 츠키시마와 다이치에게 문을 부탁한다고 짧게 말한 뒤 코트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2층에 있는 카게야마에게 공을 토스해주자, 뒤로 몇 걸음 물러나있던 카게야마가 달려와서 스피커를 향해 공을 힘껏 쳤다. 공은 텅! 소리를 내며 스피커에 명중했다.
“나…나이스 스파이크, 카게야마….”
언제 봐도 무시무시하고 깔끔한 스파이크였다. 토스가 많이 불안정했는데도 그걸 저렇게 정확하게 맞추다니. 이런 상황에서도 스가와라는 떨어져서 바닥을 구르는 공을 집어 들며 감탄했다. 아니 이런 상황이기에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정한 토스만큼이나 카게야마도 불안정했을 텐데도 엄청난 정확도였다. 카게야마는 대단했다.
“근데 갑자기 스피커는 왜…”
“…소리요.”
바깥에서 철문을 쾅쾅 두들겨대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 아무래도 소리 나는 쪽을 공격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예상대로 스피커를 망가뜨리자 하나 둘씩 체육관 앞을 떠나 야외 스피커나 다른 건물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카게야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내 예상이 맞았어. 이제 여긴 안전해.
야외 스피커에선 아직도 음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까보다 훨씬 아득하게,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너무 피곤했다. 그래도 이젠 여긴 괜찮겠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니 손목에 찬 시계가 보였다. 카게야마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밖에서 또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쪽으로 눈을 옮기자, 누가 동아리방에서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열려버린 문으로 다른 부원이 뛰쳐나간 아이를 쫒아가려하자 방 안에서 손들이 튀어나와 그를 말렸다. 결국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동아리방을 뛰쳐나온 아이만이 혼자서 괴성을 지르며 교문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큰 소리를 내면 안 되는데. 그랬다간…
카게야마는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목에 뭔가 걸리는 것만 같았다. 야외 스피커 주변에 모여 있던 자들이 하나 둘씩 그 아이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야!!!”
꼭 홀린 것처럼 아이에게 다가간 자들은 전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는 자기에게 들이밀어지는 이를 피하기 위해 팔을 들었다. 잠시 동안은 두꺼운 동복이 그를 지켜주는 것 같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옷에 보호되지 않은 그의 목을 물어뜯었다.
“흐아악! 흐, 으, 으아아…!”
카게야마는 양손을 꽉 쥐었다. 구하러 가야하나? 아니, 하지만 아직 두어 명 정도가 체육관 문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섣불리 문을 열 순 없었다. 그래도 저대로 놔둘 순 없는데….
또 비명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인파’라는 말을 떠올렸다. 사람의 물결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꼭 파도처럼 꾸역꾸역 밀려오던 그자들은 기어코 아이를 집어삼켜버렸다. 구원을 바라는 듯 뻗었던 위로 팔마저 가라앉으려는 걸 본 카게야마가 두리번거렸다. 문은 열 수 없지만 창문은 열 수 있다. 여긴 2층이니까 놈들이 이쪽으로 들어올 수 있을 리도 없고…소리…그래 다른 소리로 저 녀석들을 유인하면….
거기까지 생각한 카게야마는 분주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발이 엉켜 넘어질 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이 잔뜩 쌓여있는 바구니 안에서 두 팔 가득 공을 안아들고, 카게야마는 계단을 올랐다. 숨이 헐떡이긴 했지만,그 아이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자 아까보다는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카게야마는 2층에 올라오기 무섭게 창문을 열어젖히고 가지고 온 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 되도록이면 체육관에서 멀리, 저 아이에게서 떨어진 곳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 공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인파가 뒤엉켜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졌다. 파도가 술렁였다. 카게야마는 공을 하나 더, 바로 그자리로 던졌다. 터엉- 공이 하나 더 떨어지자 아이를 집어삼켰던 자들이 고개를 돌리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좋아, 하나 더….”
카게야마는 공을 또 하나 더 던졌다. 이걸로 세 개째. 가지고 온 공은 두 개 더 남아있었다. 이것까지만 던지고 히나타 녀석한테 공 좀 더 가져오라고 해야지. 저 애가 도망갈 때까진 시간을 벌어줘야 하니까. 손을 빠져나간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땅에 떨어졌다. 또 뭉쳐져 있던 인파가 무더기로 떨어져 나왔다.
이제 히나타한테 공을 가지고 오라고 해야…
카게야마가 몸을 돌리려는 때, 허물어진 사람들의 틈새로 부실을 뛰쳐나왔던 아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좀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차라리 그게 다행일 정도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는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옷에 보호되지 못한 손이며, 얼굴, 목덜미가 사정없이 뜯겨진 채로 너덜너덜한 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군가 새빨간 살점에 이를 가져다대고 물어뜯었다. 질겨서 잘 뜯기지 않는지 이로 꽉 물고 고개를 흔들어대다, 기어이 그 살점을 뜯어내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그 아이의 위를 뒤덮은 자들이 이미 피로 물들어 붉어진 이를 들이댈 때마다 아이의 몸에서 빨간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주륵주륵 흐르고 혈관을 건드렸는지 작은 분수처럼 액체가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도움을 바라며 뻗었던 손마저 피에 젖은 앙상한 뼈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보지 마.”
축축하고 뜨거운 손이 카게야마의 눈가를 덮었다.
“스가와라 선배….”
“보지 마. 저런 거 보면 안 돼…”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카게야마의 눈을 가리고 있는 손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그 손을 떼어내기 위해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올렸으나, 굳은살이 박혀있는 스가와라의 손은 심하게 떨리긴 했어도 결코 떨어지진 않았다. 자신을 지키는 굳센 벽 같은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있으려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할 텐데도 아까 본 광경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경찰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언제 우리를 구해주는 거지?
“스가와라 선배…지금 몇 시예요…?”
방송부가 점심 방송을 시작한지…
모두가 이제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으로부터, 대체 얼마나 지났지?
“팔목에…제 팔목에 시계 있어요….”
야외에 있는 스피커를 통해 아직도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대답하기 까지, 겨우 노래의 한 소절이 흘러갈 정도의 시간동안, 카게야마는 정적이라 부를 수 없는 침묵에 몸을 떨었다.
“…2시 18분….”
카게야마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방송은 분명 10분쯤에 시작했었다. 8분이라고?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게 고작 8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열린 창문을 통해 녹슨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창문틀에 군데군데 끼어있는 녹에서 나는 냄새는 결코 아니었다. 흙탕물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앞을 알 수 없는 물 안에 파문이 일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공포가 진흙처럼 정신이라는 이름의 물구덩이를 더럽히고 있었다.
오후 2시 18분. 카라스노 고교 방송부는 그 구덩이 속으로 침몰했다.
2일째 ‖ PM 5:40
츠키시마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의 화면을 껐다 켜는 것을 반복했다. 이러면 배터리가 더 빨리 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단순한 동작이라도 반복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점심 방송’ 이후로 계속 이 상태였다. 아침에 인터넷에서 본 글이 전부 사실이었을 줄이야.
아무래도 저 사람들 말이에요, 사람들을 단순히 공격하는 게 아니라 먹고 있는 것 같아요. 먹고 있는 것 같아요….
츠키시마는 안경을 벗고 손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아파왔다. 노랫소리 사이사이 섞여들었던 뭔가를 먹는 소리….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스가와라와 카게야마는 아직도 2층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우린 그나마 소리만 들었다지만, 저 둘은….
츠키시마는 다시 안경을 쓰고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교대하죠.”
“어? 아냐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 데요.”
“…진짜 괜찮아. 대신 밑에서 물 좀 가지고 와줄래?”
창백한 안색의 스가와라가 식은땀을 닦으며 부탁하자 츠키시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계단을 내려갔다. 힐끗 본 창문 너머로 온통 차라리 고깃덩어리에 가까운 시체가 한 구 보였다. 구역질 날정도로 끔찍했다. 스가와라 선배는, 그 아이가 먹히는 걸 보지 못하도록 카게야마의 눈을 가리고 있는 동안, 정작 자기 자신은 무엇을 봤을까. 츠키시마는 백짓장 같던 스가와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거무죽죽한 시신과는 대조적으로 핏기가 가셔 있었으나, 둘 다 생기라곤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스가랑 카게야마는?”
“아직 교대 안 해도 된대요.”
“그래도….”
다이치는 몇 시간 전, 자신이 계단을 오르려 했을 때 오지 말라고 날카롭게 소리치던 스가와라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건 좋지 않은데….
* * *
‘방송’이 끝나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다이치였다.
방송부가 습격당했다. 어쩌면 더 습격당한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에 배구부만 해도 체육관 문이 철문이 아니었다면…혹은 카게야마가 스피커를 망가뜨리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다이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기절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자신과 스가, 시미즈를 제외하면 전부 아직 어린 1학년 아이들뿐이었다. 시미즈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야치를 진정시키기 위해 끌어안고 있었고, 스가와라도 카게야마가 ‘무언가’를 보지 못하도록 카게야마의 눈을 가리고 있는 채였다. 다이치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주장이다. 주장은 팀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할 의무가 있다.
“…다들…”
다이치는 모두를 부르는 것으로 운을 뗐다.
“상황이 안 좋다는 건…모두 알고 있을 테지만….”
그는 잠시 고민했다. 다음엔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힘내? 물론 주장은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줘야하지만 지금 힘내라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다이치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을 마주하며 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인형의 반질반질한 유리알처럼 혼이 쏙 빠져나간 눈동자들이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눈도 별 다를 바 없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 다이치는 마침내 할 말을 찾아냈다.
“정신 바짝 차려라.”
그건 모두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그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위로하는 말이었다.
“경찰들은 꼭 우릴 구하러 올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자신의 말에 조금씩 빛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눈동자들을 보며 다이치는 아직 불안에 떨고 있는 제 마음을 다잡았다. 저 이상한 놈들이 ‘소리’에 반응한다는 걸 알아냈으니 그 점만 주의하면 배구부가 방송부 같은 참극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부원들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큰소리만 내지 않으면 아마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만, 경찰이 올 때까지 창문으로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교대로 밖을 보고 있다가 경찰들이 오는 것 같으면 구조해달라고 신호를 보내…”
“올라오지 마!”
다이치가 계단을 오르려들자마자 스가와라는 큰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잊은 채 매섭게 소리쳤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소리를 질렀다는 것에 놀란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눈을 가리는 것도 잊고 뒷걸음질 치며 입을 가렸다. 카게야마는 이마를 찌푸리며 눈을 깜빡였다 몇 십분 동안이나 그의 손에 시야가 가려져 있던 탓에 눈이 부셨다.
“읏….”
카게야마가 작게 신음하자 정신이 든 스가와라가 다시 카게야마의 눈을 가렸으나, 살벌한 바깥의 풍경은 이미 카게야마의 망막 안에 박혀버린 후였다.
“…카게야마. 카게야마, 숨 쉬어.”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손바닥으로 카게야마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라 뻣뻣하게 굳어있던 카게야마의 등이 천천히 이완되었다.
“허, 윽….”
“…안 봤으면 했는데….”
카게야마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뭉개지고 거뭇하게 변해버린 시체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더 빨리 도와줬어야 했는데. 아니 그냥 나가서 도와줬어야 했는데…그렇지만 문을 열었다간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해져서 어쩔 수 없었는데…아니 이런 건 다 변명인가?
“카게야마, 네 탓이 아니야.”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등을 쓸어내리는 걸 멈추지 않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타이르려 애썼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저 아이를 공격한 건 다른 놈들이고, 넌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최대한 도와주려 했잖아.”
“그래도…그래도….”
카게야마는 위로 뻗었던 그 손을 떠올렸다. 결국 그 누구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못 구했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바깥은 내가 살필 테니 내려가서 쉬라는 스가와라의 말에 카게야마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을래요.
자신의 눈을 가려준 스가와라는 자신보다 더 끔찍한 광경을 봤을 터였다.
“제가 있을 테니 스가와라 선배가 내려가서 쉬세요.”
“아니 난 괜찮으니 내려가서 좀 쉬어.”
“됐어요. 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나도 그래.”
결국 둘은 같이 2층에 남아 3시간째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지쳤을 테니 교대하라고 해도 둘 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저런 시체를 몇 시간씩이나 보고 있으려면 힘들 텐데.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녹차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두고 가.”
“교대 정말 안 해도 괜찮아?”
“괜찮아.”
두 사람 다 다른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는 걸 극도로 꺼리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런 걸 다들 봐봤자…. 츠키시마가 “여기에 둔다.” 고 말하며 계단 근처에 페트병을 내려두자 카게야마는 그쪽을 한번 힐끗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마셔?”
“좀 있다가.”
스가와라도 카게야마도 츠키시마에게 됐으니 내려가라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츠키시마는 두 사람이 합심해서 자신의 등을 계단으로 떠미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오지 말라 이거지. 됐어. 나도 그런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괜히 소외감을 느낀 츠키시마는 속으로 툴툴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계단을 내려간 걸 확인하자마자 카게야마가 스가와라에게 말을 걸었다.
“스가와라 선배.”
“…알아.”
묘한 위화감. 두 사람은 그 위화감의 정체를 동시에 깨달았다.
“저런 걸 어떻게 다른 애들한테 보여줘…”
“저거…꼭….”
‘이상한 사람’들은 걸음도 눈빛도 흐리멍텅할지언정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들 사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그자’ 들은, 먹혀버리고 만 그 소년처럼 옷 밖으로 드러난 부분 중 성한 부분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꼭 누군가 뜯고 씹다 뱉은 것처럼 여기저기 뭉그러진 덩어리들이,
“그 시체…같아요.”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2일째 ‖ PM 7:00
‘덩어리’들의 수가 늘어났다.
배회하면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놈들의 정체도, 목적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그보다 더 괴이한 사람, 아니 그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 같은 것들을?
그것들의 숫자를 세는 것을 포기해버린 스가와라가 메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녹차를 입에 댔다. 씁쓸한 맛이 혀 뒤 끝에 남았다.
“…그러고보니”
“응?”
“우리 매점에 ‘잠입’했던 거…엄청 위험할 수도 있었네요.”
“…그러게.”
스가와라는 문득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제와는 달리 그 누구도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지 않았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음식물이 있다고 해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가 그렇게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 줄은 몰랐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게 페트병을 받아 목을 축였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인지 자꾸만 입안이 말라서 계속 물만 마셨기에 먹은 것도 없는데도 벌써부터 물배가 불러왔다. 지금 배를 누르면 입에서 녹차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실없는 생각하던 카게야마는, 아직도 방치되어있는 시신을 보고 입가를 굳혔다. 누르면…피가 나오겠지….
“…경찰은 언제쯤이나 올까.”
스가와라는 중얼거리면서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 댔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벌써 어둑어둑해진지 오래였다.
“이건 뭐 새장 속의 새도 아니고.”
아닌가? 우린 까마귀들이니까 새까지는 맞는 건가? 지친 스가와라가 창문에 하아-하고 입김을 불어, 뿌얘진 곳에 손가락으로 ‘카라스노 배구부’ 라고 썼다. 이름도 쓰고 싶은데 자리가 부족하네. 스가와라가 다시 입을 열어 그 옆에 뜨거운 김을 불어넣고는 ‘2번 스가와라 코시’라고 쓰기가 무섭게 ‘카라스노 배구부’ 부분의 김이 투명함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뭐야 다시 써야하…”
그 부분에 다시 입김을 불려던 스가와라가 멈칫했다. 어라? 내가 너무 피곤해서 잘못 본 건가? 스가와라는 눈을 비비고 다시 창 너머를 응시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카, 카게야마!”
“네?”
“저기…저, 저기…”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뭐…뭐가…무슨…”
스가와라와 마찬가지로 카게야마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대로 된 문장을 이루지 못한 채 단어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먹혀버린 시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였었다.
“저게 왜…어떻게 움직이는…”
시체였던 그가 뼈 밖에 남지 않은 손을 짚으며 일어섰다.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불안한 걸음걸이로 걷기 시작한 그는, 곧 체육관 밖을 서성이고 있는 그 무리들 안에 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 *
7시 17분. 거의 십분 동안이나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로 얼이 빠져 있었던 건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카게야마가 아직도 입을 벌린 채 눈동자를 떨고 있는 스가와라를 불렀다.
“스가와라 선배…모두한테 말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기괴한 ‘덩어리’들이 더 늘어나 있었다. 저것들도 아마 다른 놈들한테 먹혔던 사람들이었겠지. 그럼 멀쩡한 사람들은 대체 정체가 뭐지? 카게야마는 괜히 귀를 만지작거렸다. 귓가에서 오도독하고 연골을 씹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나는…‘먹히는’ 소리가.
“내가, 내가 말할게.”
너 지금 되게 힘들어 보여. 스가와라가 덧붙인 말에 카게야마가 스가와라를 돌아보며 대꾸했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 같은데요.
“…같이 말해요. 저희 둘 다 봤으니까….”
“…그래.”
스가와라는 철로 된 계단 난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손톱이 쇠에 부딪히는 소리는 그리 크진 않았으나 모두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잠깐만 주목해줄래? 모두에게 할 말이 있는데….”
배터리가 거의 없는데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말에 고개를 들며 한쪽 입가를 들어올렸다.
“왜요? 시체가 살아나서 움직이기라도 했어요?”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카게야마가 츠키시마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놀랐는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있었다.
“뭐? 장난치지 마, 왕님. 지금 장난 칠 기분 아니야.”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유투브에서 본 동영상 때문에, 이상한 동영상을 몇 개나 봐버려서 꺼낸 말이었다. 그리고 그 동영상은 전부 가짜일 게 뻔했다. 그야 말도 안 되잖아. 시체가 갑자기 되살아난다니.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카게야마도 그냥 장난을 치는 것일 게 뻔하다. 다들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려했다.
“…미안하지만 장난이 아니야.”
스가와라의 진지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정말로…아까 죽었던 시체가…되살아나서 움직였어.”
그 말에 야치는 입을 틀어막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츠키시마는 황급히 껐던 휴대폰 화면을 켰다.
화면의 잠금을 풀자 미처 끄지 못한 유투브 창이 나왔다.
“그럼…그러면…”
“츳키?”
“그러면 이 동영상들도…진짜야…?”
“무슨 동영상?”
다이치의 말에 츠키시마는 아까 정지를 눌러버린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동영상 안의 끔찍한 몰골로 쓰러져있던 시체가 갑자기 일어나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려 들었다. 경찰이 기어코 총을 쐈는지 타앙! 소리와 함께 시체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이미 한번 죽었던 시체가 다시 쓰러지는 데에서 동영상은 끝이 났다.
“…이런 동영상이 지금 수십 개는 올라와있어요.”
동영상이 끝나자마자 마치 이 타이밍만을 기다렸다는 듯 화면 밑 부분에 시스템 안내문구가 떴다.
배터리 부족. 디바이스가 종료됩니다. 까만 화면에 휴대폰을 만든 회사 로고가 떠올랐다 사라지고, 이내 하얀 글씨가 다시 떠올랐다. ‘Good bye’
“그게 뭐야…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 좀비야?”
자기가 말하고도 놀랐는지 야마구치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뒷통수가 얼얼했다. 스가와라가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지금까지 생각 못했지…?”
그렇다면 저 괴이한 무리들이 두 종류로 나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사지가 멀쩡한 쪽은 ‘물린’ 사람들일 것이고, 그 기괴한 덩어리들은 아마…‘먹힌’ 쪽이겠지. 잔인한 진실이 스가와라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노야를 봤어. 카게야마가 노야는 아침에 이상한 노숙자에게 ‘물렸다’고 했다.
노야를 봤어. 가서 확인해보고 올게. 새벽에 학교에서 노야를 본 아사히. 기어이 문을 열고 나가버린 아사히.
금방 돌아올게.
스가와라는 그 뒷모습을 떠올렸다. 평상시와 달리 망설임 없이 곧은 모습이었다.
주저하지 않고 나가버린 아사히. 연락이 없는 아사히. 나는 왜 아사히를 더 말리지 않았지? 그건 아사히가 너무 확고해서…아냐 그래도 더 말리면 나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잖아. 왜 그렇게 금방 포기해버렸지?
속이 울렁거려서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스, 스가와라 선배! 무서운 소리 하지 마세요! 세상에 좀비가 어딨어요!”
“그럼 뭔데. 저것들이 좀비가 아니면 대체 뭔데.”
“그건…”
히나타가 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야마구치는 어지럼증과 다리에 힘이 풀리는 감각을 동시에 느끼며 끝내 중심을 잃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버티기가 힘들었다.
“너무해…이건 너무하잖아….”
야마구치는 넋이 나간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게…그렇잖아? 게임에서도 좀비물은 보통 슈팅 게임이라고! 총…그래! 총은 기본 아니야?! 영화도 그래서 미국 배경인 게 많잖아! 거긴 총을 구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하지만 우린 아니잖아…총도 없고…물리면 안 되니까…물리면 똑같이 좀비가 되어버리는데…총도 없이 뭘 어쩌라고…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경찰이 구하러 오지 않으면 우린…”
“야마구치, 조용히 해.”
츠키시마는 배터리가 나가버린 휴대폰을 손에 꼭 쥐었다.
“…경찰은 꼭 올 거야.”
와야만 해. 그는 제 손 안에 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마지막까지 형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빛을 잃고 이제는 까맣기만 한 화면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 * *
츠키시마는 창문으로 밖의 상황을 살피면서도 손 안에 쥔 휴대폰 화면을 계속 눌러대고 있었다. 야마구치의 휴대폰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끝까지 교대하지 않으려던 스가와라와 카게야마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는 무리하게 둘 수 없다’는 주장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1층으로 내려왔고, 내려오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히나타는 잠이 올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중얼거렸으나 누운 지 얼마 안 돼 곯아떨어졌다. 다들 지쳐있었다.
“왜 아직도 접속이 안 되는 건데…!”
제발. 제발, 제발…제발!!! 츠키시마는 이를 악물고 인터넷 창의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돼…됐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드디어 닿은 것인지 접속자 수가 너무 많다는 문구만 뜨고 접속이 되지 않던 경찰청 사이트가 휴대폰 화면에 떠올랐다.
겨우 접속하긴 했지만 언제 또 튕길지 몰라. 카라스노 고등학교 제 2체육관에 부원들과 함께 있습니다. 구하러 와주세요. 전부 아직 학생들이고 여자애들도 있어요. 재빨리 글을 작성한 츠키시마가 게시판 등록 버튼을 누르며 다시 기도했다. 제발.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라는 안내문구가 뜨는 것과 동시에 다시 오늘 하루 종일 질릴 정도로 본 접속자 수가 너무 많아 지연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쓰여진 화면이 나타났지만, 그 화면이 아까 전과는 달리 그렇게까지 짜증나진 않았다. 어쨌든 글은 올라갔다.
츠키시마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 화면 윗쪽의 시간을 확인했다. 히나타와 교대하려면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지쳤다. 그래도 한 시간만 더 버티자. 아니, 경찰이 올 때 까지…그때까지만 버티자.
3일째 ‖ PM 03:14
체육관에 갇힌 지 벌써 3일째였다.
그건 다시 말해 3일씩이나 경찰이 그들을 구해주지 않고 방치해 두고 있다는 말이었다. 스가와라는 뻑뻑한 눈으로 정부기관에서 인터넷에 올린 공문을 다시 읽었다. 전염병에 걸린 감염자들이(아무래도 좀비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염자인 것 같았다.)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으니 미야기현 주민들은 감염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즉시 근처 피난소로 대피하고,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경찰에 연락 하라는 내용이었다. ‘감염자들에게 물리기만 해도 감염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 는 문구까지 읽은 스가와라는 그로서는 드물게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며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경찰에 연락이 돼야 연락을 할 거 아냐! 그리고 감염자들이 문제면 감염자들을 격리시키란 말이야! 왜 우리가 갇혀 있어야해?!
휴대폰 배터리는 어제부터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의 인내심도 마찬가지였다. 가뭄이 든 밭처럼 정신이 바짝바짝 메말라서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입안이 까슬까슬했다.
“…지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창문을 보고 있던 히나타가 벌떡 일어섰다. 오늘도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대신 뭔가 소란스런 소리가 나고 있었다. 히나타는 창문에 코를 박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교문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차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비록 사이렌은 울리고 있지 않지만, 틀림없이 경찰차였다.
“와, 왔어요!”
“뭐가?”
“경찰이요!”
그 말에 츠키시마와 스가와라가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말?!”
“응! 밖에 경찰차들 와 있어!”
스가와라는 꺼끌한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됐어. 이젠 살았어. 경찰이 왔으니까.
두꺼운 철문 너머로 뭔가가 픽 픽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마침내 문을 ‘치는’소리가 아니라 ‘노크’소리가 들려왔을 때, 스가와라는 하마터면 눈물을 터트릴 뻔했다.
“…열려있어요.”
야마구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드르륵. 붉은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열리는 문틈으로 가장 먼저 보인 건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빛이었다. 꼭 깃털 같은 빛무리를 뒤로 한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경찰입니다. 다들 무사한가요?”
사무치게도 기다리던 말이었다.
* * *
그들을 구하러 온 경찰은 5명이었고, 타고 온 경찰차는 4대였다. 경찰들은 이전에도 학생들을 구조하기 위해 학교에 경찰이 출동하긴 했으나 그 경찰들과는 도중에 연락이 두절돼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이미 격리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많아진 감염자들이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해서 차 없이 이동하는 건 위험하기에 나갔던 경찰차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늦어버렸다며 사과했다.
“저…혹시 다른 부 애들은…”
“다른 학생들은 나중에 또 추가로 경찰들이 와서 구조해줄 겁니다.”
경찰은 다른 동아리 부원들이 있을 동아리방 건물을 힐끔거리는 야치를 안심시키려는 듯 잔뜩 위축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너무 걱정 마세요. 여기에 미성년자랑 여자애들 밖에 없다는 글을 보고 먼저 우선적으로 구출하려고 온 것뿐이고, 나머지 학생들은 곧 수색대가 와서 대대적으로 구조해줄 겁니다.”
“나머지 학생들….”
방송부 애들도 하루만, 하루만 더 버텼더라면….
야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방송부원들은 습격당해 죽었는데 자신들은 구출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끔찍이도 안심이 되었다.
경찰들은 아이들을 위해 차문을 열어주었다. 한 대는 운전석 외엔 문이 고장 나버려서 세 대에 나누어 타야한다는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뒷좌석의 시트는 딱딱한 체육관 바닥보단 푹신했다. 거기에 몸을 파묻고 있으니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 안도감의 깊은 곳에 자신에 대한 미약한 혐오감이 앙금처럼 남아 저와 함께 가라앉으려는 것을 아이들은 애써 외면했다.
* * *
“이야 정말이지,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글이 없었더라면 못 찾았을 수도 있었는데.”
“그거 츳키가 올린 거예요!”
“그런 거 굳이 말할 필요 없어, 야마구치.”
츠키시마가 겸연쩍어하는 걸 거울을 통해 본 경찰관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왜요. 잘한 일인데.”
“맞아 맞아!”
“사이좋은 게 보기 좋네요.”
“…그런 거 아니에요.”
이번엔 한술 더 떠 히나타까지 동조하자 츠키시마는 뺨이 다 화끈거렸다. 왜 하필 이 녀석들이랑 같은 차를 타버려서는….
“하하 쑥스러워 하기는…엇, 도착했나본데.”
앞서가던 차가 한 주택 앞에서 멈췄다. 경찰은 따라서 차를 세우고 총을 쥔 뒤 주변을 살피다 문을 열었다.
“위험하니까 안에서 기다리세요.”
츠키시마는 유리창 너머로 앞 차의 경찰관과 스가와라가 내리는 걸 턱을 괴고 지켜보고 있었다. 스가와라 선배도 어머니랑 연락이 안 된다고 하셨지. 츠키시마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이젠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배터리가 나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저녁 늦게부터 대피가 시작되었으니 아마 어머님도 대피하셨을 거라는 경찰의 말에도 스가와라는 그래도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집에 들르면 안 되겠냐 사정을 했다. 혹시나 엄마가 집에 쪽지를 남겨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남겨놓은 쪽지도 없었다. 스가와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랩을 씌운 접시가 눈에 띄었다. 어제인지 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가 해놓은 음식 같았다. 스가와라가 제일 좋아하는 마파두부였다. 스가와라는 속에서 울컥하고 치미는 것을 힘겹게 삼키며 접시를 다시 냉장고 깊숙이 밀어 넣고 집을 나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마파두부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그를 살금살금 긁고 있는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살 안에 파고들었다.
계속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있던 츠키시마는 힘없이 다시 차에 올라타는 스가와라를 보곤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3일째 ‖ PM 11:42
눈앞이 흐릿했다.
카게야마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자 안개 낀 것 같은 시야가 선명해졌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카게야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벽지에 붙어있는 야광별 스티커가 희뿌옇게 빛나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무슨 소리가 나는 게 이상한 늦은 시간이었다. 카게야마는 옆에서 자고 있는 히나타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침대를 내려왔으나, 세상모르고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는 히나타를 보고 있으니 심통이 났다.
긴장감이라곤 없는 멍청이 녀석.
스가와라는 집에 다녀온 다음부터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영 기운이 없어보였다.
경찰은 선배에게 가족들 전부 무사할 거라고. 피난소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위로했지만 스가와라는 애매한 미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선배는 어색하게 웃으며 빨리 피난소까지 가자고 했지만 가장 가까운 피난소까지도 제법 거리가 되는데다 밤이 되면 길이 어두워져 더 위험해 더는 이동할 수 없다는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카게야마는 식탁 가장자리에 올려둔 유리컵처럼 아슬아슬해보이던 스가와라를 떠올리며 침대 맡 탁자 위에 놓인 유리 장식품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렸다. 유리 표면에 뿌옇게 지문이 남았다. 카게야마는 지문을 닦아내려 손가락으로 유리를 문질렀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얼룩 안개처럼 퍼질 뿐이었다.
그는 결국 유리를 닦는 걸 포기하고 손가락을 떼어냈다. 남에 집에 무단침입해서 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함부로 물건을 건드렸다가 손자국이나 내고….
뭔가 닦을만한 게 없나 살펴보던 카게야마의 눈에 다시 히나타가 들어왔다.
저 녀석 진짜 잘 자네. 볼이라도 꼬집어볼까?
“…사히 선배…제가 더 말렸어야…”
카게야마는 걸음을 멈추고 들었던 손을 내렸다.
사실 알고 있었다. 히나타는 긴장감이 없는 게 아니라 긴장감 없는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어젯밤에도 악몽을 꾸는지 자면서 식은땀을 흘렸다는 걸.
히나타가 다시 잠꼬대를 했다. 죄송해요 아사히 선배…. 카게야마는 체육관에 두고 온 가방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방을 챙겼으나 자신은 어차피 가방 안에 별 거 없으니 가지고 갈 필요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변명하며 가방을 기어이 체육관 안에 두고 나왔다. 니시노야가 준 장갑이 들어있는 가방이었다. 다른 건 별로 들어있지 않았지만 장갑이, 그 장갑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들고 나올 수 없었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야마구치의 처절한 외침이 귓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물리면 똑같이 좀비가 되어버리는데…-
니시노야 선배는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씨익 웃었었다.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잖아요 선배. 선배 물렸잖아요. 나한테 장갑을 주는 바람에…
카게야마는 입을 틀어막았다. 히나타가 아직 자고 있었다. 울었다간 히나타 녀석이 깨버릴 거야.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가방은, 장갑은 체육관에 두고 왔는데, 분명히 그랬을 터인데도 손에 장갑이 끼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버리고 가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다. 방 밖으로 나온 카게야마는 문을 닫았다. 작은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 * *
방을 나오긴 했지만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들 자고 있을 터인 집안은 숨 막힐 정도로 적막했다. 가만히 있으려니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카게야마는 무턱대고 2층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1층에서 경찰 아저씨들이 번갈아 보초를 선다고 했지. 경찰 아저씨들이랑 얘기라도 해볼까?
계단을 내려온 카게야마는 현관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 경찰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관 앞에 경찰은 없었다. 잠깐 화장실에라도 가신 건가? 카게야마는 닫혀있는 방문들은 열지 않은 채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맥주 캔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아까 식료품들을 가져오면서 같이 가져오신 건가?
뚜껑이 따져있는 맥주 캔은 카게야마의 아버지도 즐겨마시던 맥주였다.
“아빠는…”
카게야마는 엄마가 보낸 문자를 떠올리며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엄마도 아빠도, 두 분 다 무사하다고 했다.
내가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맞다 방에 두고 왔지.
카게야마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돌아가서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가서 방금 아빠가 자주 마시는 맥주 캔을 봤다고 말하고 싶었다.
카게야마는 말재주가 없었다. 편지를 보내본 적도 손에 꼽았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건 편지를 쓰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예전에 스가와라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중학교 선배들과는 달리 스가와라는 웃으며 상냥하게 말해줬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쓰고 싶을 때 쓰면 되는 거야.
카게야마는 지금이 바로 스가와라가 말해준 그 때라고 생각했다.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맥주 캔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 맥주 맛은 어떤지, 그리고 성인이 되면 그 맥주를 마셔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꼭 맥주가 아니어도 좋았다. 뭐든 좋으니 지금 상황과 관계없는,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도 카게야마는 기왕이면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카게야마는 그럴 수 없었다.
* * *
“…무슨 소리가 났어.”
계단을 오르려던 카게야마는 멈칫했다. 자신을 깨웠던 그 소리였다.
“밖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경찰들은 일부러 견고한 벽돌 울타리와 쇠로 된 대문이 있는 집을 골랐다. 대문도 확실히 닫아뒀는데 설마 좀비들이…아니 감염자들이 들어왔나? 대문도 경찰이 지키고 있을 텐데? 카게야마는 창문의 커튼을 젖혀 밖을 내다봤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나가봐야하나?
고민하는 와중에도 간간이 크진 않지만 신경을 긁어내리는 듯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거슬렸다.
나가보자. 나가서 무슨 일인지 살펴보고 오자. 혹시 좀비들이 쳐들어온 거라면-
카게야마는 반쯤 오른 계단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현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문 너머 세계는 칠흑처럼 새카맣기만 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 지도 모른 채, 그는 발을 내딛었다.
카게야마는 가장 먼저 대문을 확인했다. 염려와는 달리 문은 단단히 잠겨있었다.
“…다행이다.”
예민해진 탓에 뭔가 환청을 들었던 것이리라.
귀를 만지작거리며 돌아가려는 카게야마의 귀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뒤쪽인가? 설마 벽돌이 무너졌나? 아니 벽돌이 무너졌으면 요란한 소리가 났을 텐데 그런 큰 소리가 난 적은 없고….
의아해하며 소년은 뒷뜰로 향했다. 그리고 제 눈을 의심했다. 야치와 시미즈가 흙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으읍! 읍!!”
“이렇게 입에 재갈을 물려두면 꼭 돼지 멱따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니까요?”
“야 시발 너는 꼭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를 해야겠냐? 내가 암퇘지랑 하려고 이 지랄을 했는 줄 알아?”
“저 새끼는 나와서도 분위기 파악 못 한다니까.”
카게야마는 어째서 소리가 크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두 사람의 입에 천이 물려져 있었다.
계속 도망 다녔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의 교복 마의에 경찰이 손을 가져가자 시미즈가 고개를 거칠게 흔들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읍! 읍읍!!”
두 사람은 손도 묶여있는지 발로만 남자들을 밀어내려하고 있었다. 야치는 울고 있었고, 시미즈는 독한 눈으로 사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으- 운도 좋지. 그때 그 글을 못 봤으면 이런 재미도 못 볼 뻔했네.”
글? 무슨 글? 츠키시마가 경찰청 사이트에 올렸다는 그 글?
“그 짭새 새끼들이 우리 수배라도 내렸을까봐 들어가 본 거였는데.”
“자, 얌전히 있어라. 응? 이 오빠들이 잘 해줄 테니까.”
“와 시발 계집년이랑 하는 게 몇 년 만이냐.”
“개새끼들아 아무리 급해도 순서는 지켜라. 형님, 먼저 하십쇼.”
“난 됐다.”
카게야마는 눈앞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중학생 때, 아직 코트 위의 제왕이 되기 전인 2학년 때, 천재라는 이유로 선배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아직 어린 그들은 자신들의 열등감과 불안감을 그런 식으로밖에 해소하지 못했다.
선배들의 괴롭힘이 극에 달해 학교 밖에서도 맞아야만 했던 카게야마를 지나가던 경찰이 구해줬었다.
경찰은 ‘구해주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우리를 구해줬다.
그런데 왜지? 왜 경찰들이 시미즈 선배랑 야치를? 왜?
왜 경찰들이 중학교 시절의 선배들로 보이지?
“…뭐 하시는 겁니까….”
카게야마는 성큼성큼 걸어가 사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씨 뭐야 이 새끼는 또 왜 일어나서는 끼어들고 지랄이야.”
경찰 중 하나가 바닥에 침을 퉤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으나 카게야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머릿속 한 켠에선 중학교 시절 선배들이 자기에게 침을 뱉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잘나신 천재님한텐 선배도 안 보이고 동료도 필요 없지? 사회생활 존나 못 하네 개새끼.
반대쪽에선 니시노야 선배가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이 선배를 못 믿는 거야 지금? 신뢰의 세터가?
장갑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래 장갑. 장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도와줘야해.
카게야마는 다가오는 상대를 노려보며 등 뒤의 시미즈와 야치에게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빨리 도망치세요.”
시미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는? 너는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저는…괜찮아요.”
“지랄 똥폼을 잡네 애새끼가.”
경찰이 품 안에서 총을 꺼내자 시미즈가 카게야마의 다리를 건드렸다. 위험하니 비키라는 표시였다.
“괜찮아요, 시미즈 선배. 어차피 총 못 쏠 거예요. 총을 쐈다간 그 소리를 듣고 감염자들이 몰려 올 테니까. 그러니까 빨리 도망가세요!”
시미즈는 카게야마와 울고 있는 야치를 번갈아보다 야치의 다리를 발로 툭툭 쳤다. 야치가 시미즈를 따라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두 사람이 도망치는 소리를 들으며 카게야마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경찰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카게야마는 주먹을 꾹 쥐었다. 손아귀 안에서 매끄러운 장갑 표면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야! 저년들 잡아!”
카게야마는 두 사람을 잡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경관의 앞을 막아서려했다. 그러나 누군가 카게야마의 머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시발새끼가. 일 복잡하게 만들고 있어.”
“이 새끼 처리한 다음 어디 버려두고 여자애들 다시 잡아 오는 게…”
카게야마는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가려는 경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못가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를 니시노야의 장갑이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카게야마 입을 열었다.
“가면…소리를 지를 거예요.”
경찰을 부르겠다고 말하려던 카게야마는 눈앞의 사람들이 경찰이라는 걸 생각해내고 말을 바꿨다. 그래. 소리를 지르면 좀비들이 몰려올 테니까.
“질러봐.”
“네?”
“질러보라고 쌍년아.”
그러나 사내들은 오히려 재밌다는 듯 낄낄대고 웃고 있었다.
“야 이 병신년아. 우리가 다른 경찰들과는 달리 어떻게 체육관까지 가서 너희를 ‘구해’ 줄 수 있었는지 알아?”
남자는 기어이 총을 카게야마의 눈앞에 흔들었다.
“총에 소음기를 달아뒀다고. 네가 지랄할 것 같으면 네 주둥이에 이걸 쳐 넣으면 만사 오케이거든?”
그래서 총소리가 안 났던 거구나.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비키냐?”
“못 비킵니다.”
“그래? 그럼 뒤져야지 별 수 있겠냐.”
총구가 그를 향했다. 카게야마는 물러서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두려웠다. 그러나 손에 장갑이 껴져 있었다. 끼고 있지 않되, 벗을 수 없는 장갑이. 정수리에 서늘한 감각이 닿았다. 두렵긴 했지만 후련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잘 도망쳤으려나? 웃음이 비식비식 새어나왔다.
그래도 마지막에 구하긴 했어. 이제 장갑을 벗을 수 있어.
“잠깐 멈춰봐라.”
“형님?”
“쟤 얼굴 좀 들어봐라.”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우악스런 손길로 카게야마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래. 얘 맞네.”
자신 바로 앞에서 딱 멈춘 걸음의 주인은 커다란 손으로 카게야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디가 굵고 굳은살이 잔뜩 박힌 거친 손이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부원들의 손에도 굳은살이 박혀있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얇게 모래가 깔리는 것 같았다.
“난 이런 년들이 더 좋더라.”
카게야마는 귀를 의심했다. 년? 난 남자인데.
“형님 악취미 또 나오셨네.”
“악취미라니. 악취미는 너희들이지. 난 강간도 안 한다고? 그리고 여리여리한 계집애들 깔아봤자 별로 흥도 안 나고 꺅꺅 시끄럽기만 하고.”
형님이라고 불린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카게야마의 뺨을 슬슬 쓰다듬었다.
“이렇게 키도 크고 잘생긴 사내놈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편이 훨씬 짜릿하지 않아? 응?”
“감방에서도 그러셨으면서 나와서까지 그래요?”
“얌마 그런 우악스런 놈들이랑은 다른 맛이 있잖아.”
남자들이 카게야마의 양팔을 잡아채자 사내는 소년의 바지춤에 손을 댔다.
“무, 무슨…!”
기어코 바지 지퍼를 내리는 손길에 카게야마가 몸을 비틀며 저항하자 그들 중 하나가 카게야마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새끼야 가만히 있어.”
둔탁한 아픔에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머리가 울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야 애를 왜 때리고 그러냐. 애 우네. 아가, 괜찮아? 응?”
사내는 카게야마의 눈물을 닦아주며 퍽 다정하게 타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오늘 차에서 보니 너희들 사이좋은 게 참 보기도 좋더라.”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카게야마의 귓가에 사내가 입을 가져다대고 은근하게 속삭였다.
“사이좋게 전부 일렬로 세워놓고 순서대로 한명씩 박아줄까?”
학교 성교육시간 때 한 번도 깨어있던 적이 없는 카게야마는 ‘박는다’는 게 어떤 행위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사내들이 시미즈와 야치를 성적인 일에 쓰려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리고 형님이라는 사내는 그 짓을 모두에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그래? 안되나? 여자애들도 너 때문에 놓쳤고, 다른 애들도 안 된다 하고….”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이던 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가가 잘하면 다른 애들은 안 건드릴게.”
이러면 강간이 아니라 합의지? 사내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마귀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싸늘했다.
커다란 고드름처럼 서늘한 악의가 떨어지며 그의 몸을 꿰뚫었다.
뱀들의 송곳니엔 독이 있었다. 독이 제 혈관을 타고 도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 몸이 녹이 슨 것 마냥 삐걱이고 있었다. 입안으로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 * *
“헉…!”
스가와라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이마에 흥건한 식은땀을 닦던 스가와라의 손이 멈췄다.
다행? 다행인가? 지금 상황이 꿈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더 좋지는 않은데?
초조해진 스가와라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 * *
“손가락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 * *
-카라스노 이번에 전국에 나간다면서?
-굉장하네. 아오바 죠사이에 이어 그 우시와카가 있는 시라토리자와를 이기다니.
스가와라는 그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그 천재 세터 덕분 아니야?
그래서 스가와라는 더 자랑스러웠다. 그 순간이, 자기 자신이.
-근데 카라스노에 3학년 세터도 있지 않아? 3학년이 있는데도 1학년이 주전이 되나 보통?
그건 자신이 주전자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얻은 성과였다.
-천재한테 밀렸겠지.
-와 불쌍하다.
자신은 결코 불쌍하지 않았다. 밀린 게 아니니까. 양보한 거니까. 팀을 위해서.
그러니까 스가와라는 괜찮았다.
-카라스노 주전에 1학년만 셋이라며? 3학년 중 주전이 아닌 건 쟤뿐이고.
-와 나 같음 배구 때려친다.
-맞아. 아무리 그래도 3학년들은 웬만하면 주전 주는데 얼마나 못 했으면 그랬겠냐?
-그런 애들은 거기 계속 있어봤자 어차피 필요도 없는데.
-자존심 상해서라도 나오지 않냐 보통?
스가와라는 괜찮고 싶었다.
저런 녀석들의 말 따위 신경 쓸 가치도 없다고 웃어넘기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는 건 다시 말해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스가와라는 괜찮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이를 세워 입 안에 든 손가락을 깨물기 시작했다.
너네가 뭘 알아.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데. 나도 코트 위에 서고 싶었어. 더 오래, 계속 거기 서서 모두와 함께 배구를 하고 싶었어. 모두에게 토스를 올려주고, 내가 승리를 만들어내고 싶었어. 근데 안 되잖아. 그게 안 되잖아. 내가 있으면 이길 수 없잖아.
코트 위에 1분 1초라도 더 오래 서있고 싶었다. 다른 이들은 그러기 위해 주전이 된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코트 위에 더 오래 서기 위해 주전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자신이 주전으로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천재 세터가 주전으로 싸우고 자신은 중간중간 교체로 들어가는 편이 코트에 더 많이 설 수 있었으니까. 아이러니했고, 또 비참했다. 하지만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했다.
쓸모없어 필요도 없는데
닥쳐! 너희가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내가 어떤 심정으로 주전을 포기했는지 모르잖아! 멋대로 입 놀리지 말란 말이야!!
송곳니가 손가락의 살을 파고들었다. 입안으로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4일째 ‖ AM 08:40
“카…야마…게…”
카게야마는 손을 저었다. 시끄러워 저리 가.
“카게야마! 일어나!”
“소리 지르지 마! 이 멍청아!”
“누구 보고 멍청이래?! 자면서 계속 끙끙거리길래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싶어서 깨워줬더니!”
악몽?
“꿈이었…윽!”
몸을 일으키려던 카게야마는 몸을 울리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꿈이 아니었다. 악의는 중학교시절보다 훨씬 지독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야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어. 괜찮아.”
카게야마는 괜찮다는 대답밖엔 할 수 없었다. 경찰들은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나도 안 괜찮은 표정인데….”
“괜찮다면 괜찮은 줄 알아.”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무시하고 일어나려 했으나 히나타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야”
“왜”
“괜찮다니 더는 뭐라 안 하겠는데, 그래도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말해줘.”
그렇게 말하는 히나타의 눈동자는 사뭇 진지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팔을 놓아주며 씨익 웃었다.
“우리는 동료잖아.”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렸다. 히나타의 미소가 너무 눈부시게 느껴져서 목이 메여왔다.
“…그래.”
그러나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일어났어? 와서 뭐라도 먹어. 좀 있다 출발할거래.”
다이치가 밑으로 내려온 히나타와 카게야마에게 빵을 내밀었다.
“또 빵이에요? 슬슬 밥 먹고 싶은데….”
“미안하다 꼬마야. 밥 종류들은 금방 상해버려서.”
“저 꼬마 아니거든요!”
히나타가 씩씩 대자 다른 경관이 히나타를 꼬맹이라 부른 경관을 타박했다.
“아직 한참 더 클 애한테 왜 꼬마라고 그래. 학생, 미안해요.”
경관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사과하자 히나타는 내민 입을 집어넣고 빵 봉지를 뜯었다.
“학생도 먹지 그래요.”
경관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카게야마는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밤새 끔찍이도 그를 괴롭히던 목소리였다.
아가,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아저씨들은 이제 늙어서 너희 같은 팔팔한 고등학생들 상대하기 힘들어요. 우리 아가 하나 상대하기도 벅차네. 총이 있긴 하지만 총알을 낭비하고 싶진 않거든?
카게야마는 빵 봉지를 뜯었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괜한 행동을 했다간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아가가 입 다물고 얌전히 우리 상대가 되어주면 아저씨들도 계속 경찰 놀이하면서 너희를 피난소까지 데려다줄게. 어때. 괜찮은 거래지?
카게야마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위해 입 안 가득 빵을 우겨넣었다. 하필이면 슈크림 맛이었다. 달고 부드러워야 할 크림이 쓰고 꺼끌했다.
“스가 너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응? 평소랑 똑같은데?”
스가와라는 딱지가 앉은 손가락을 감추며 카게야마 옆에 앉아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빵을 집었다.
“잘 잤어?”
“네. 스가와라 선배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응.”
히나타는 빵을 씹으며 다이치에게 속삭였다. 저 둘 아무리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다고 하네요.
그리고 다이치에게 혼이 났다. 히나타, 먹으면서 말하면 못써.
경찰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박고 빵을 먹고 있던 카게야마가 아, 그러고 보니…하고 중얼거리며 입을 대지 않은 빵 부분을 떼어내 스가와라에게 건넸다.
“이건 왜?”
“그게…같이 먹을 땐 나눠먹는 거라고 타나카 선배가…”
예상치 못한 카게야마의 행동에 히나타는 놀라서 숨을 들이켜고 다이치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작 빵을 받아든 스가와라는 얼떨떨해졌다.
“…나도 너랑 같은 슈크림 빵인데?”
“어…”
카게야마는 당황했다. 지금 보니 다들 전부 똑같은 슈크림 빵을 입에 물고 있었다. 민망해진 카게야마가 슬며시 손을 거두려는데 스가와라가 그 손아귀에서 빵을 낚아챘다.
“그래도 고마워. 자, 나도 줄게.”
스가와라가 빵을 뜯어주는 걸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은 카게야마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자 히나타가 눈을 반짝이며 카게야마의 어깨를 톡톡 쳤다.
“카게야마! 나는? 나는?? 나는 괜찮은데! 똑같은 슈크림 빵이어도 줘도 괜찮은데!”
꼭 놀이동산에서 풍선을 보고 조르는 아이 같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대된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히나타에게, 카게야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빵을 조금 떼어줬다.
그리고 히나타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던 ‘형님’과 눈이 마주쳤다. 저를 훑는 듯한 그 시선에 팔에 닭살이 돋았다.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옆에서 조잘거리는 것도 무시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묵묵히 빵을 먹는 데만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츠키시마와 야마구치 식당으로 들어왔다. 츠키시마는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가가 거뭇했다.
“시미즈 선배랑 야치 못 봤어요?”
“못 봤는데. 다른 방에 없어?”
“야마구치가 찾아보고 왔는데 없어요.”
“야! 츠키시마! 이것 봐라? 카게야마가 나한테 빵 나눠줬다?”
“화장실 갔나보지.”
츠키시마는 방방 뛰는 히나타의 이마를 밀어내며 대답했다.
“화장실에도 없던데요.”
“2층에 있는 거 아냐?”
다이치의 말에 히나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못 봤는데.”
“왕님, 너는?”
츠키시마가 매니저들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빵 먹는 걸 멈추고 있는 카게야마를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너는 뭐 아는 거 없어?”
카게야마는 입에 물고 있는 빵을 꿀꺽 삼켰다.
“…없어.”
“뭔가 알고 있는 표정인데.”
경찰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경찰뿐만이 아니었다.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도, 다이치도, 스가와라도, 히나타도 전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두 사람은 잘 도망쳤을까? 잘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카게야마, 혹시 무슨 일 있었으면 우리한테 말…”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말을 잘랐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왕님. 솔직히 말하지 그래?”
츠키시마가 카게야마가 앉아있는 의자 등걸이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지?”
“아니.”
“괜찮으니 사실대로 말하라니까.”
“…아무 일도 없었어.”
츠키시마는 앵무새 같이 같은 말만 반복하는 카게야마에게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등걸이를 꽉 쥐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왜 너까지 그러냐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츠키시마는 의자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렸다. 끝이 뾰족한 바늘들이 제 신경을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아, 그러셔? 난 못 믿겠다 이거지?”
츠키시마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제 손바닥에 쿡 박혔다.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
4일째 ‖ AM 11:20
츠키시마와 카게야마는 벌써 3시간 가까이 말을 섞지 않고 있었다.
시미즈와 야치를 찾기 위해 나갔던 경관이 돌아왔다.
“근처엔 없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혹시 연락처 없어요?”
“제가 아까 해봤는데 안 받더라고요.”
사내는 속으로 다이치를 비웃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 년들 휴대폰은 우리가 부숴놨으니까!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으니 일단 이동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다른 경찰들한테 수색을 부탁해볼게요.”
아직까지 경찰을 가장하고 있는 그 사내는 웃으며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었다. 그 늦은 밤에, 그것도 여자 둘이서 감염자들이 우글거리는 마을을 무사히 빠져나갔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혹시 또 모른다. 듣자하니 벌써부터 경찰들이 시민들의 협력을 받아 수색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만에 하나라도 그 둘이 운 좋게 수색대에 구출되었다면….
사내는 카게야마를 슬쩍 보았다. 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아이는 동료들을 위해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졸렬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기가 힘들 정도였다. 역시 계집애들 대신 저 녀석들 장난감 삼기 잘했어.
갈라진 살얼음판처럼 신뢰에 쩍쩍 금이 가는 소리가 사내의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왕님이 협력해준다면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츠키시마!”
“왜요 주장. 왕님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딱 봐도 알잖아요?”
츠키시마가 소파에 앉아있는 카게야마를 보고 비아냥거렸다. 평소에 츠키시마가 ‘왕님’이라고 부르면 발끈하던 카게야마는 오늘따라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히나타가 평소보다 안절부절못했다.
“야! 카게야마가 모른다잖아! 왜 자꾸 뭐라고 해?”
“왜 자꾸 뭐라 하냐고? 그걸 질문이라고 해?”
츠키시마가 못 참겠다는 듯 히나타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네가 감싸는 그 카게야마 때문에 두 사람이 없어진 걸지도 모르잖아?!”
“츠키시마! 그게 할 말이야?!”
보다 못한 다이치가 끼어들었다.
“카게야마!”
“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네.”
“모르긴 뭘 몰라?!”
“츠키시마! 그만 해! 카게야마가 모른다잖아.”
다이치는 흥분한 츠키시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카게야마를 믿어줘야지. 동료인데.”
그러나 츠키시마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왕님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츠키시마의 가시 돋친 말에도 카게야마는 주먹 쥔 손만 부르르 떨 뿐, 역시나 대꾸가 없었다. 그걸 보고 있던 사내는 흥분을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학생, 친구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마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셋이 다투기라도 했다면 저희가 알아차렸겠죠.”
무언의 카게야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사내는 더욱 더 유쾌하게 만들었다.
“…‘저흰’ 밤새 깨어있었거든요.”
* * *
“선배? 스가와라 선배?”
“어? 응? 아…미안. 못 들었어. 뭐라고 그랬지?”
“아니 그게…카게야마도 그렇고 스가와라 선배도 그렇고 오늘 이상하다고요.”
“…난 안 이상해.”
“나도.”
두 사람의 대답에 히나타는 “…그렇다면 더 묻지는 않겠지만…” 이라고 말하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창 너머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 사이사이마다 감염자들이 불협화음처럼 끼어있었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이 떠오르는 거리였다. 히나타는 리코더 시험 때 마지막에서 두 번째 음정을 틀렸었다. 리코더에선 삐익-하고 듣기 싫은 불협화음 소리가 났었다. 히나타는 마치 리코더를 불 때처럼 아랫입술로 푸우 하고 숨을 뱉었다. 머릿속에서 삐익-소리가 났다.
오늘은 삐익-이었다.
4일째 ‖ PM 1:34
다이치는 낯선 풍경을 보며 휴대폰 꺼내들었다. 가까운 피난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검색해보고 싶었지만,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전원이 꺼져있었다.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을 좀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도와드릴까요?”
“아니 안 그래도 될 것 같아. 앞차에서 벌써 저 학생이 도와주려고 내렸네.”
다이치는 경찰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앞차에서 카게야마가 다른 경관들을 따라 내리고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학생들은 여기서 기다려.”
경찰이 내렸다. 차문이 닫히는 순간 다이치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쳤다. 카게야마가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같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 * *
“우리 아가, 아침에 엄청 꼴리는 표정 짓더라? 응? 그런 표정은 어디서 배웠어?”
“형님은 그런 게 꼴리십니까?”
그들 중 하나가 아까 해치운 감염자의 으깨진 머리통을 발로 밟으며 낄낄거렸다.
지익-지익- 살이 뭉개지는 소리였다. 지익- 이건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였다. 다리 사이가 금세 횅해졌다. 독사들 앞에 서는 건 두렵고도 수치스러운 일이었기에 카게야마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시야를 뒤덮는 피비린내 나는 어둠 속에서 카게야마는 제발 이 모든 게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이 추잡한 행위가 끝나면 다시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다. ‘동료’들에게.
천재님한테는 동료도 필요 없지?
왜 지금 또 중학교 선배들이 말이 떠오르는 걸까. 지금은 다른데. 이제는 자신도 동료들을 위하고 있고, 동료들도 나를…
카게야마는 상념을 지우려 했다. 가까스로 중학교 선배들을 머릿속에서 몰아내자, 이번엔 츠키시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본다. 마치 맨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비웃음을 한껏 머금은 채로 그가 말했다.
왕님 진짜 우리 동료 맞아?
카게야마는 상상 속의 츠키시마에게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카게야마는 정신 안팎에서 쏟아지는 폭력에 흔들리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래야 다들 무사할 수 있어. 카게야마는 고통에 찬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사내들은 카게야마가 고통스러워할수록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신음소리를 냈다간 또 조롱이 쏟아질게 뻔했다. 괴로웠지만 고통스런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눈가가 시큰거렸지만 울어서도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말해서는 안 된다. 피난소에 도착할 때까지, 딱 그때까지만 모두가 모르게 하자.
“카, 카게야마…?”
그렇게 결심하고 참아왔는데, 왜
“경찰 아저씨들…뭐, 뭐하는 거예요?”
카게야마는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눈이 부셨다.
“카게야마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눈앞의 풍경이 색을 되찾는 순간,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이 멍청이가….”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네가 울고 있어.
* * *
소년들은 벽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던 걸까? 카게야마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2시가 넘어있었다.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는 히나타를 보니 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기분에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너, 대체 왜 나온 거야? 밖은 위험하다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게…나는 그냥…네가 너무 안 오길래 걱정돼서….”
“누가 걱정 같은 거 해달래?!”
울면 안 된다. 중학교 선배들도, 경찰들도 자신이 우는 걸 좋아했다. 울면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러니까 울면 안 된다. 울고 있는 소년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소년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히나타의 눈물이 기어코 카게야마의 손을 적셨다.
“우린 동료인데!”
카게야마는 결국 멱살을 잡은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멍청이가….”
“훌쩍…바지나 똑바로 입어…바보, 야….”
카게야마는 코를 훌쩍이며 바지를 끌어올렸다.
“야 너 때문에 괜히 나까지 코 나오잖아….”
“그게 왜 내 탓이냐…쿨쩍…지가 코찔찔인거지….”
그 말을 들은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째려봤으나 히나타는 지지 않고 “왜! 뭐! 왜!” 라며 오히려 카게야마를 따지고 들었다. 한 마디도 안 지려드는 히나타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노려보던 카게야마는 곧 고개를 돌리곤 초조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까는 운이 좋았다. 히나타가 모래를 뿌리고 자신의 손을 잡아끌자마자 감염자들이 나타나서 사내들을 에워쌌다. 그러나 사내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감염자들을 처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이제 어떡하지.”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혼잣말이었으나 히나타는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 대답했다.
“일단은 돌아가자.”
“돌아가?”
“응. 가서 모두한테 경찰들이 사실 나쁜 사람들이었다고 말하고 도망치자.”
히나타가 손을 내밀었다.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카게야마는 그 손을 잡았다.
“응.”
* * *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게다가 사내들도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히나타, 카게야마, 경찰 아저씨들은?”
히나타는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스가와라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스가와라 선배,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뭐? 왜?”
“그게, 사실 경찰들은 나쁜 사람이에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경찰들이 카게야마를….”
히나타는 정신이 없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하루아침 사이에 학교가, 아니 히나타의 세계가 지옥처럼 변해버렸다.
첫날은 그걸 몰랐고 둘쨋날에 타인의 죽음으로 깨달았다.
셋째날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구원이 아니었다. 기만이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을 때 카게야마는 혼자 고통 받고 있었다. 히나타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씨이 카게야마 바보. 우리한텐 아무 말도 안하고. 흥, 서브도 리시브도 스파이크도 혼자 한다던 제왕님으로 돌아가버렸나봐 바보. 히나타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목 안으로 삼켜버렸다. 카게야마가 그때와는 달라졌다는 건 알고 있다. 카게야마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것도 전부 자신들을 위해서였다는 것도. 아마 그들이 협박했으리라.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카게야마를? 경찰들이 카게야마한테 뭘 했는데?”
“카게야마를…”
히나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지는 광경이었다. 그걸 떠올리자니 아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거길 빠져 나왔는 지 모르겠다. 용기가 바닥나 덜덜 떨며 비틀거리던 히나타의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히나타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그걸 힘주어 잡아버렸다.
“엇, 히나타 괜찮…”
그리고 열려서는 안 되는 문이 열렸다.
“……!”
경찰차는 4대였다. 경찰들은 아이들을 위해 차문을 열어주었다. 한 대는 운전석 외엔 문이 고장 나버려서 세 대에 나누어 타야한다는 말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 한 대의 차엔 짙게 선탠이 되어있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히나타!”
바로 오늘까지는.
히나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빡
이번엔 너무 많은 게 보였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감정들이 하나도 실감나지 않았다. 히나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살 부분이 조금 패여 있었다.
“왜 감염자들이 저기에…”
“문 닫아! 빨리!”
고개를 들자 닫히는 차 문 사이로 손을 뻗으려는 나체의 감염자들이 보였다.
맞다. 나 물렸지. 고장났다던 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안전벨트에 묶인 좀비가 나한테 달려들려 해서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가 손을 물렸어.
히나타는 제 안쪽 와이셔츠를 찢어 자신의 손을 지혈해주려는 카게야마를 불렀다.
“카게야마, 울지 마.”
“…안 울어.”
“울지 말라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도 차에서 나와 있었다. 둘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다이치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왜 저기에 감염자들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울고 있는 카게야마 옆에 주저앉았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옆에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사히도 말리지 못했는데 히나타마저 구하지 못했다.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카게야마와 다이치가 감염자를 떼어내고 차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롱이 들려오는 듯했다. 쓸모없어.
“병원…병원에 가자….”
다이치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히나타를 일으켰다.
“병원에 가서…가서 치료 받자….”
“마, 맞아. 물렸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변할지는 아직 모르잖아.”
스가와라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과 카게야마 만큼은 먹혔던 사람이 좀비가 되어 되살아나는 걸 똑똑히 봤었다.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스가와라도, 카게야마도.
니시노야 선배는 혼자 병원에 갔다가 결국 다시는 체육관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같이 가야한다. 스스로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카게야마는 생각했다. 같이 가면, 혼자 두지 않으면 히나타의 상처도 별 일 없이 나을 거라고.
“다들…병원에 가자.”
아이들은 다이치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전 안 가요.”
츠키시마만을 제외하고.
“츳키?”
“너,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
츠키시마가 히나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님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알고 있지?”
“츠키시마! 이 상황에서 그런 게 중요해?”
“중요하죠.”
선배의 다그침에도 츠키시마는 손의 떨림을 숨기며 히나타에게 재차 물었다.
“뭔데? 경찰들이 뭔가를 했다고 했지? 그게 뭔데?”
히나타는 고개를 숙였다. 제법 야무지게 상처 부위를 칭칭 감아둔 천 조각이 보였다. 그는 옆에 있는 카게야마를 힐끔 쳐다보았다. 안색이 창백했다.
“경찰들이 카게야마를…”
히나타는 ‘강간’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전에 입을 닫아버렸다. 입에 담기 괴로운 말이었다. 자신이 멋대로 해도 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히나타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려는 카게야마의 손을 꾹 잡았다 놨다. 괜찮아. 내가 잘 말할게. 히나타는 짧은 시간동안 제가 아는 단어들을 고르고 고른 뒤 입을 열었다.
“…괴롭혔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리며 하! 하고 혀를 찼다.
“경찰들이 카게야마를 왜 괴롭혀? 때리기라도 했나보지? 그런 것 치곤 왕님한텐 상처 하나 없는데? 왜? 아주 매니저들이 없어진 것도 경찰들 때문이라고 하지 그래?”
“그, 그게…”
“너 물려서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츠키시마! 그게 무슨 말이야!”
츠키시마는 다이치가 나무라는데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을 결코 심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히나타도 카게야마도 자신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나를 믿지 못하는 녀석들을 내가 왜 믿어줘야 해?
바늘이 또 제 신경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너무 아팠다.
“전 안 가요. 물린데다 거짓말까지 하는 녀석들이랑은 못 가요.”
“츠키시마!”
“경찰이 카게야마를 괴롭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경찰이 카게야마를 왜 괴롭혀? 뭣 때문에?!”
츠키시마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히나타의 상처를 애써 외면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부른 경찰인데, 경찰이 왜 그런 짓을 해.
“경찰이잖아. 너희가 거짓말 하는 거야….”
그는 히나타 앞으로 나서던 때와는 달리 불안한 표정으로 이젠 한걸음씩 뒷걸음질쳤다.
“경찰인데…경찰이란 말이야…괜히 이상한 소리해서 불안하게 하지 마…. 너네, 너네가 이상한 걸 거야…경찰들이 이상할 리 없어…경찰들이 이상하면…경찰들이 나쁘면…그러면…그러면…”
츠키시마의 몸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바늘에 찔린 자리에서 기어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앞쪽엔 새빨간 거짓말, 옆쪽엔 새빨간 피, 뒤쪽엔 새빨간 불안. 그러나 경찰차는 파란색이었다.
온몸으로 제가 안전하다고 외치는 것 같은 파란색이었다.
“그러면 우리 형은 누가 찾아줘…?!”
“츳키….”
츠키시마는 안경을 위로 올리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저는 남을게요.”
스가와라는 집에 들렀으나 츠키시마는 그러지 않았었다. 일부러 부탁하지 않았다. 집에 갔던 스가와라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오는 걸 보고 두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집에도 형이 남긴 흔적이 없을까봐 들어가기 무서웠다. 형은 휴대폰 전원이 나갈 때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츠키시마는 우선은 피난소에 가기로 결심했다. 가서 형이 없으면 그때 경찰들에게 형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경찰들은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일 거다. 형을 찾아줄 거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히나타와 카게야마다. 그래야만 한다.
“죄송해요. 전 경찰들이랑 있을래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야마구치는 몹시도 지쳐 보이는 츠키시마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의 어깨 위에 팔을 힘없이 두른 채 고개를 수그리고 지쳤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히나타, 미안해. 대신 사과할게. 츳키도 진심으로 저러는 건 아닐 거야. 그냥…그냥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 걸 거야."
야마구치는 축 쳐진 츠키시마를 차 안에 태운 뒤, 히나타에게 거듭 사과했다.
“정말 미안. 나도 츳키랑 여기 남을게.”
“하지만 정말로 경찰들이…”
“그래서 혹시 모르니 더 남겠다는 거야. 츳키가 걱정 되니까.”
야마구치는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이며 너무 걱정 말라고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소리 지르면서 싸워버려는 바람에 감염자들이 몰려올 수도 있으니 지금 빨리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야마구치는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차 안으로 들어갔다.
츳키는 예전에 날 구해줬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번엔 내가 츳키를 구해줄 거야. 야마구치는 차 문을 닫았다. 그러자 정말로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4일째 ‖ PM 02:10
“카게야마 휴대폰에 아직 배터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카게야마의 휴대폰으로 인터넷에서 근처 병원의 위치를 확인하던 다이치가 중얼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병원건물과 작은 개인병원이 위치해 있었다. 지도 옆에 뜨는 병원 이름을 하나하나 클릭하고 상세정보를 누르자 이용시간과 진료과목이 나왔다. 양쪽 다 이용시간 평일 08:00~17:00 공휴일 휴무.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이 난리통 속에서도 병원이 과연 문을 열었을 지가 문제지만.’
다이치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민가와 유리창이 깨져있는 가게들을 보며 자꾸만 바싹바싹 타는 목 안으로 마른침을 넘겼다.
병원을 향해 걷는 도중, 사람은 못 봤어도 감염자들은 몇 번이나 봤었다. 그들은 죽어버린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다이치는 자꾸만 피어오르는 뒤숭숭한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병원은 문 열었겠지. 이런 상황이니만큼 더더욱 다친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다이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큰 병원 쪽은 진료과목이 내과, 외과, 정형외과, 작은 개인병원은 가정의학과였다.
“외과가 있는 쪽으로 가야겠지?”
다이치는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스가와라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평상시였다면 응. 역시 외과겠지 혹은 아니 거기는 아닌 것 같아. 라고 대답했을 스가와라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의 말을 듣긴 했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얼이 빠져 보이는 모습에 다이치는 뒤통수만 긁적이다, 이번엔 맨 뒤에서 상황을 살피며 따라오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물었다.
“카게야마, 역시 외과로 가야겠지?”
누구든 좋으니 자신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노라고, 그렇게 말해주길 바라서였다.
“네? 아마도 그렇겠죠.”
“그래. 그럼 외과로 가자. 카게야마, 감염자들이 오나 안 오나 잘 봐줘.”
“네.”
원하는 답을 받아낸 다이치는 아까보다는 조금 가뿐해진 표정으로 건물 정보를 확인했다. 외과는 건물 4층이었다.
* * *
병원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감염자들과 마주치는 빈도가 높아졌다. 코트 위에서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카게야마가 아니었더라면 위험했을 뻔한 상황이 몇 번이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돌을 던진 전봇대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감염자들을 본 다이치는 제 안의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어깨를 쭉 펴고 걸었다. 나는 부장이다. 불안해하지 말자. 내가 불안해하면 다들 불안해할 거야.
10분정도 더 걸어가자 크고 상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보였다. 그 중 한 건물 벽면의 참사랑 병원이란 글씨 옆에 초록색 불이 들어온 십자가 마크가 있었다. 다이치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원, 아직 하나봐.
“외과는 4층이랬어.”
건물의 유리문에 손을 갖다 대며 다이치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무언가에 홀린 듯 위를 바라봤다. 몇몇 창문들이 깨져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였다. 스가와라는 재빨리 건물을 훑었다. 남자가 손을 흔들고 있는 곳은 4층이었다. 외과가 있는 층.
“다행이야. 엘리베이터도 작동해.”
밝은 로비 가운데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다이치는 히나타 쪽을 슬쩍 쳐다봤다. 히나타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엘리베이터가 아직 움직이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계단을 4층씩이나 올라야했을 테니까.
히나타는 제 상처를 감싸고 있는 천을 꾹 눌렀다. 자꾸만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딱딱한 직선의 엘리베이터 문이 구불구불해지는 걸 느끼며 히나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자신이 힘든 게 과연 물렸기 때문인지, 정신적으로 몰렸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엘리베이터가 움직여주는 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빨간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꼭 무언가를 알리는 카운트다운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 다이치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엘리베이터 옆면 거울 옆에 붙어있는 건물 정보를 속으로 하나하나 읽었다. 역시 외과는 4층이 맞았다. 다이치는 작게 미소 지었다. 건물 정보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게, 모두의 앞에서 외과는 4층이라고 말한 게 거짓이 아니라는 게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다이치가 자신 있게 4층 버튼을 누르는 동안 스가와라는 양쪽에 붙어있는 거울을 번갈아보다 고개를 푹 숙였다.
거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거울 속에 또 자신의 모습이 비추고, 그 안의 거울에서 또 자신을 비추고, 다시 또 그 거울 속의 거울 안에 자신의 모습이, 끝도 없이 비춰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비참한 몰골의 자신에게 수백, 수천, 수만 개의 거울을 들이대는 것만 같았다.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옆으로 서서히 열리고, 환한 조명이 켜져 있는 로비가 다이치의 눈에 들어왔다. 로비 데스크 쪽 벽면에서 사토우&스즈키 참사랑 외과라는 글씨가 조명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 ‘참사랑’ 옆으로 몸 이곳저곳이 뜯겨진 감염자들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왜…?!”
다이치는 떨리는 손으로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분명히 건물에 불도 다 들어오고, 엘리베이터도 작동하고, 뭣보다도 밖의 벽면에 있는 십자가에 초록불이 들어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은 왜 그리 또 늦게 닫히는 지, 다이치는 이쪽으로 걸어 나오는 감염자들을 보며 초조하게 닫힘 버튼을 계속 눌렀다. 제발, 제발 빨리 닫혀라. 제발 좀!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닿았는지 감염자들이 그들에게 이빨을 세우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진이 빠진 다이치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근처의 다른 병원을 찾기 위해 카게야마에게 다시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다이치의 눈동자 안에 심하게 떨고 있는 히나타가 비쳤다.
“다른 병원을 찾아보자….”
지금부터 빨리 간다면 늦지 않을지도 몰라.
다이치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스가와라는 달랐다. 지금부터 아무리 빨리 간다 해도 늦어.
“스가?”
“그럼 너무 늦어.”
감염자들이 엘리베이터 문에 몸을 부딪치느라 나는 쿵쿵 소리가 꼭 자신을 북돋아주는 북소리처럼 들렸다. 계속 밑만 바라보고 있던 스가와라는 용기를 내 다이치의 팔목을 붙잡았다.
“들어오면서 봤는데 건물 안에서 누군가가 우릴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어.”
아사히 때도, 아까도, 결국 자신은 뭣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이번만큼은 자신도 뭔가를 도움이 되어야 한다.
“백의를 입고 있었으니 아마 의사일거야.”
“하지만 병원 내엔 감염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아마 미처 탈출하지 못한 거겠지. 어쨌든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것보단 위험하긴 해도 그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고, 다 같이 탈출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어차피 다른 병원까지 가는 길에도 감염자들의 습격을 받을 수 있고 말이야.
스가와라가 덧붙인 말에 다이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히나타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여기서 그른 판단을 내린다면 정말로 손 쓸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부담감이 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감염자들이 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꼭 자신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기에, 다이치는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스가 말대로 하자.”
병원 안에는 감염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다 그 의사가 병원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스가 말대로 다른 병원으로 간다 해도 거기에 의사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렇다면 1분 1초라도 빨리 히나타를 치료받게 해주자. 다이치는 3층 버튼을 눌렀다.
“3층에 내려서 계단으로 올라가자.”
땡-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3층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다이치는 엘리베이터의 그 땡 하는 알림음이 마치 퀴즈에서 오답을 골랐을 때 나오는 효과음 같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 * *
3층엔 약국들이 모여 있었다.
“이것 봐 히나타. 여기 키 크는 음료도 파네.”
가게 유리창에 잔뜩 붙어있는 광고들을 보던 스가와라가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히나타가 입을 비죽였다.
“저 지금도 그렇게 작은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좀 작아도 전 누구보다 높이 뛸 수 있어요!”
“그래서 관심 없으시다?”
“…아니 뭐…그게 꼭 관심 없단 얘기는 아니고….”
“푸흡”
작게 중얼거리는 히나타의 말을 들은 다이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럼 치료받고 내려와서 키 크는 음료도 찾아볼까? 어차피 약이랑 붕대도 필요할 테니까.”
“그, 그래도 되나요?! 그거 먹고 카게야마 너보다 커지면 어떡하지? 막 카게야마 내려다보면…!”
“그럴 일은 없을 걸.”
“와 단호하네.”
분위기가 훨씬 누그러워지자 스가와라는 내심 기뻐졌다.
역시 이 병원에 남기로 하길 잘 한 것 같아. 다른 병원으로 가기로 했으면 히나타도 더 힘들어했을 거야. 스가와라는 오늘 들어 처음으로 어깨를 폈다. 내가 남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다들 이렇게 웃지는 못했을 거야. 그때 건물 위를 올려다보길 정말 잘했어. 스가와라는 앞서가는 다이치를 따라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자신이 그 의사를 발견했던 게 꼭 계시처럼 느껴졌다. 앞으로도 잘 될 거라는 계시.
“근데 그 의사가 어느 방에 있는 지 어떻게 알지?”
“일단 하나하나 다 들어가 봐야겠지.”
“그 방법뿐인가….”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와 함께 매점에 다녀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잘 해냈으니까 이번에도 아무 탈 없이 잘 할 수 있을 거다.
스가와라는 다이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괜찮을 거야.”
다 잘 될 거야.
* * *
아이들은 계단의 반만 열려있는 철문 너머로 병원 안을 들여다봤다. 감염자들은 아직 엘리베이터 근처에 모여있는 듯했다.
“…일단 가까운 방부터 들어가자.”
최대한 소리를 낮추고 말했어도 다들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다이치는 다시 병원 안으로 눈을 돌렸다. 가까운 방은 주사실과 진찰실 두 군데였다. 진찰실이라는 글씨 밑에 사토우 의원이라고 써진 금색 명패가 보였다.
‘진찰실 쪽에 의사가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다이치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주사실의 문이 소리도 없이 아주 조금 열렸다. 마치 ‘여기로 들어오라’ 는 것 같았다.
“…주사실로 가자.”
다이치는 이번에도 가장 먼저 앞장서서 주사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으로는 히나타, 다음엔 카게야마가, 마지막으로 스가와라가 감염자들이 이쪽으로 오지 않는지를 확인하며 주사실의 문을 닫았다.
“드디어 와주셨군요! 계속 기다렸어요!”
백의를 입은 남자가 다이치의 손을 꼭 잡고 흔들었다.
“경찰엔 3일 전에 전화했는데 아무도 안 오는데다 휴대폰까지 나가버려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젠 드디어 나갈 수 있겠어! 근데 복장이 경찰이 아니네요? 군인인가요?”
사토우 의원이라는 명찰이 달려있는 흰 가운을 입은 남자의 머리는 기름이 져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져 있었고, 한숨도 못 자지 못했는지 핏발이 서 있는 눈에는 흉흉한 빛이 감돌았다.
“아뇨 저희는 카라스노 고교의…”
“고교? 고등학생이라고?!”
다이치의 가슴에 달린 카라스노 고등학교 교표를 본 남자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더니 이내 다이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래, 학생이든 경찰이든 상관없어. 날 여기서 나가게만 해준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너희들 총 있지? 응?!”
“아뇨 그런 건 없는 데요….”
“그럼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거! 저 감염자들을 없애버릴 만한 무기! 무기는 가지고 있지?!”
“…없어요.”
“맙소사….”
남자는 다이치의 멱살을 놓고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곤 품 안에서 손 떼가 묻은 사진 한 장을 꺼내더니 넋이 나간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난 살아서 나가야 해…살아야 해…미카…미카…아빠는 살아서 나갈 거야….”
“저…죄송하지만 의사 맞으시죠…?”
“아빠가 꼭 데리러 갈게….”
“의사 선생님? 저희 일행 중에 다친 애가 있는데 봐주실 수 있나요?”
“너희가 경찰이기만 했어도…”
“경찰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후배가 감염자들한테 물리는 바람에 다쳐서…”
“물려? 물렸어?!”
고개를 처박고 사진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의사가 드디어 고개를 들자, 다이치는 히나타의 손을 잡고 의사 앞으로 이끌었다.
“네. 물려서 상처도 났고…뭣보다 감염 될까봐 걱정이…”
“저리 가!”
의사는 물렸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등에 벽이 닿자 사진을 꼭 끌어안으며 미카, 아빠가 곧 갈 거야. 라고 중얼거린 뒤 괴기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히나타를 노려보고 악을 썼다.
“저리 가! 이 괴물!!”
“히나타가 왜 괴물이야!”
카게야마가 참지 못하고 의사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저 녀석이 왜 괴물이야! 히나타가 저 밖의 괴물들이랑 똑같아 보여?! 똑같아 보이냐고!”
“물렸다면서! 물렸으면 다 괴물이야!”
의사는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사실 ‘미친 사람처럼’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경찰이 아니라는 걸 안 바로 그 순간부터 미쳐있었다.
“나, 난 봤어! 봤다고! 환자들이…괴물한테 물려서 온 환자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머, 먹었다고! 저 녀석도 그럴 거야…우릴 먹으려 들 거라고…!”
“닥쳐!”
카게야마가 의사의 멱살을 잡고 일어서는 걸 보고 있던 히나타는 갑자기 찾아오는 극심한 허기에 눈가를 찌푸렸다. 손의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대신 배가 고팠다. 그것도 무척이나.
아, 배고프다. 어디 먹을 거 없나?
“당신 의사잖아! 히나타 저 멍청이 녀석을 낫게 해달란 말이야!”
“난 사람만 고쳐! 저런 괴물은 못 고친다고!!”
저기서 소리가 나네? 먹이가 있는 건가? 배가 너무 고파. 빨리 뭐든 먹어야겠어….
“히나타!!!”
스가와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히나타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빳빳한 무언가가 물려져 있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자 까만 동복으로 감싸인 팔이 보였다. 카게야마의 팔이었다.
“히나타…?”
히나타는 남들의 표정을 읽는 데에 썩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히나타라도 지금 카게야마의 표정만큼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그건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거봐! 내말이 맞잖아! 저건 이제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우릴 다 죽일 거야!”
의사가 히나타를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트리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히히히 거봐, 내말이 맞았지? 괴물이야 저건! 난 괴물은 안 고쳐! 안 고친다고!”
의사 말대로였다. 자신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야…아니야…나, 난 그저…그저…”
난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이야.
아니, 난 동료를 먹으려고 했어.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간’은 그런 짓 안 하잖아…?
만약 카게야마가 동복이 아니라 하복을 입었더라면….
“카게야마, 미안…미안해…미안…”
히나타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히나타!”
“됐어, 됐어. 괴물이 나갔어.”
웃고 있는 의사를 내팽개치고 히나타를 따라 나가려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다이치가 잡아 세웠다.
“내가 갈게.”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여기로 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까진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다이치는 카게야마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야해.”
그리고 그는 중압감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 * *
“소리를 너무 냈어…소리를…. 아냐 미카. 아빠는 걱정할 거 없어.”
바깥의 감염자들이 문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사토우는 화들짝 놀라며 사진을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자의 말대로였다.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바람에 감염자들이 몰려와버렸다. 카게야마는 방 안을 훑어보았으나 문을 막을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침대는 벽에 붙어있었고, 책상도 마찬가지였다. 책상 위에도 개무밧드라고 부르는 은색의 스테인리스 사각 트레이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카게야마는 의사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넋 나간 얼굴로 가끔씩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스가와라를 지나쳐 창문 쪽을 살펴봤다. 창문으로 탈출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았다. 뛰어내리고 싶어도 여긴 4층이었다. 뛰어내렸다간 다칠 테고,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 때문에 감염자들이 또 몰려올게 불 보듯 뻔했다.
“틀렸어….”
카게야마가 벽을 따라 가라앉듯 주저앉았다. 주사실의 문은 자신들이 있던 체육관이나 엘리베이터처럼 철문이 아니었다.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발버둥 치기를 포기한 카게야마가 눈을 감은 바로 그 순간, 기적처럼 히나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카게야마!!”
“…히나타?”
“너 설마 다 포기하고 있거나 그런 거 아니지?!”
“히나타 멍청아! 소리 지르면 어떡해! 그랬다간…!”
“누가 멍청이야?! 카게야마야말로 큰 소리 내고 있으면서! 바보! 소리치지 마!”
문에서 나는 쾅 소리가 더 커지자 사토우는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손으로 카게야마의 입을 틀어막았다.
히나타는 자신의 팔을 만지작거렸다. 대충 이쯤을 물었던 것 같다. 감염자들 중 몇몇은 자신이 소란 피우는 걸 듣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지만 주사실 쪽에는 아직도 감염자들이 우글거렸다.
“카게야마 잘 들어! 내가 미끼가 될게!”
히나타는 만지고 있던 팔을 꾹 잡았다.
그는 카라스노 최강의 미끼였다.
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자신이 에이스가 아니라 미끼라는 게 불만스러웠다. 카게야마의 말대로 ‘에이스는 저렇게 멋있는데 내 가장 큰 무기는 미끼라니, 멋도 없고 너무 하찮다.’, ‘나도 아즈마네 선배처럼 키가 크고 파워가 세면 에이스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었다. 미끼는 에이스니 사령탑, 수호신에 비하면….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뻔한 자신을 정신 차리게 해준 건 카게야마였다.
-그 스피드와 점프력과 내 토스가 있으면 어떤 블로킹과도 승부할 수 있어!
“맞아.”
히나타는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공의 감촉. 스파이크를 칠 때의 그 팡 하고 온 몸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 꼭대기 위의 풍경. 그 뿐만이 아니었다. 블로킹들이 자신을 마크하면 다른 스파이커들이 공격을 성공하기도 쉬워진다. 히나타는 내가 있으면 최강이라는 카게야마의 말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의 네 역할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
“안 해.”
히나타는 목에 힘을 주고 앞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잔뜩 일그러져있던 세상이 거짓말처럼 선명해졌다.
“카게야마! 너 예전에 나한테 말했지? 세계무대까지 같이 가자고!”
히나타는 이쪽으로 오고 있는 감염자들을 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최강의 미끼가 활약할 시간이었다.
“나는…나는 최강의 미끼니까 저 녀석들은 내가 유인할게! 넌 먼저 탈출해!”
두렵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그러나 히나타는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승부욕이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가서 나중에 꼭 세계무대에 서자!!!”
작은 짐승은 괴성을 지르며 병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감염자들을 유인해서 계단을 올라가자. 그럼 카게야마랑 스가와라 선배는 엘리베이터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거야.
마치 배구 경기를 할 때처럼 수많은 적들이 그를 마킹하고 쫓아오는 걸 보며 9번 선수는 있는 힘껏 뛰었다. 자신은 모두의 앞에 길을 만든다. 누구보다 빠르게, 더 높게.
보통은 왼쪽에 위치한 윙 스파이커를 에이스라 부르지만, 그런 포지션에 상관없이 가장 많은 점수를,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를 에이스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에이스였다.
* * *
“아직 남아있어.”
문을 슬쩍 열고 밖을 내다보던 사토우가 문을 닫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괴물 꼬맹이가 날뛰어준 덕에 문 밖에 우글우글하던 괴물들은 사라졌지만 병원 내엔 아직도 괴물들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엘리베이터 근처에.
어쩌지? 여기서 빨리 나가야하는데. 그는 방 안에 있는 두 아이를 번갈아봤다. 흰 머리 녀석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까만 머리에 키가 큰 녀석은 그나마 상태가 나아보였다.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흰 머리 녀석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진 않았다. 사토우는 품 안의 사진에 입을 맞추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아빠가 갈게. 금방 갈게.
그는 다시 사진을 제 백의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다. 자신은 여기서 나가야만 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의 눈이 번뜩였다.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둘, 마침 이 안에 있는 아이들도 둘이었다. 한 놈은 여기서 미끼로 쓰고, 한 놈은 자신을 지키게 하자.
그는 카게야마에게 기어갔다.
* * *
-스가.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아사히가 서 있었다.
“아, 아사히….”
-나에 이어서 히나타랑 다이치까지 죽였네?
“아냐…나, 난 그러려던 게…”
-아니야? 아니면 왜 굳이 이 병원에 남자고 했어?
“나, 나는 그냥…다른 곳까지 가기엔 너무 늦을까봐…”
-정말?
“저, 저, 정말…이야…”
아사히는 쭈그리고 앉아서 스가와라와 눈높이를 맞췄다.
-너, 잡아먹힌 애가 좀비로 변하는 거 봤지?
“봤어…봤어…난 히나타도 늦으면 그렇게 될까봐…”
-그 애가 잡아먹힌 게 분명 2시쯤이었고, 좀비로 변한 게 7시 경이었지?
스가와라는 숨이 턱 막혀왔다. 누군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히나타 말이야. 아직 물린 지 두 시간도 안 됐잖아?
-왜 다른 병원으로 가자는 걸 말렸어?
어디선가 나타난 다이치가 아사히 옆에 앉아 스가와라에게 물었다.
-왜 그랬어? 너 때문에 나까지 죽어버렸잖아.
“다, 다이치…난, 난 그저 도움이 되고 싶어서…!”
-너 진짜 쓸모없다.
다이치의 말이 스가와라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히나타는 스스로 희생해서 미끼가 되었는데, 넌 뭐야? 3학년이면서.
스가와라의 몸이 고꾸라졌다.
“아사히, 다이치, 왜 그런 심한 말을 하는 거야? 너흰 그런 애들이 아니잖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너희를 다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나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건데….
-그야 살아있을 땐 그랬지.
주변 풍경이 일그러졌다. 이제 그는 봄철 대회 지역 예선전이 치러지던 바로 그 체육관에 있었다.
꺾여있는 그에게 다른 학교 선수들이 동정과 조소가 어린 시선을 보냈다.
-카라스노 주전에 1학년만 셋이라며? 3학년 중 주전이 아닌 건 쟤뿐이고.
-아무리 그래도 3학년들은 웬만하면 주전 주는데 얼마나 못 했으면 그랬겠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비웃음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양보해서 그래. 내가 팀을 위해 양보한 거야. 이겨야하니까.
-그런 애들은 거기 계속 있어봤자 어차피 필요도 없는데.
아니야! 난 필요 없지 않아. 스가와라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그 부정은 곧 다이치에 의해 짓밟혔다.
-그래? 네가 뭘 했는데? 아사히에 이어 나랑 히나타까지 죽인 거?
아사히와 다이치가, 그리고 다른 학교 선수들까지 모두 자기 주위를 빙빙 돌며 입을 모아 그를 비난했다.
-너 진짜 쓸모없어. 차라리 없는 게 나아.
“아냐…아냐, 난….”
스가와라는 그들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이미 그의 곁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스가와라는 빈손을 꾹 쥐었다. 아냐 난 쓸모없지 않아….
* * *
“그게 할 말입니까?!”
“쉿, 목소리 높이지 마.”
“…저는 못 합니다.”
“왜 못 해? 쟤 완전히 맛이 갔는데? 저 녀석을 이용하면 우리 둘 다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니까?”
“스가와라 선배까지 미끼로 쓰라니, 절대로 안 돼요.”
카게야마는 이를 악 물었다. 이미 주장에 히나타까지 잃었다. 스가와라 선배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다 같이 탈출해요.”
“그건 불가능하다니까 글쎄?”
사토우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혼자라도 저 녀석을 미끼삼아서 도망칠 거야….”
그는 책상 위 트레이 안에 놓인 매스를 꺼내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손 안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이걸로 저 녀석을 찌르자. 세게 찌르자. 그러면 비명을 지를 거야. 아파서 비명을 계속 지르겠지? 찌른 다음 건너편 방에 숨어 있다가 괴물들이 이 녀석한테 달려들면 그때 엘리베이터로 도망가자. 괴물들이 저 녀석들 뜯어먹을 테니 계속 비명을 지를 거야. 오래 오래, 내가 도망칠 때까지.
카게야마는 의사가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해하기 위해 매스를 드는 걸 보고 다급하게 방 안을 둘러봤다. 사토우가 매스를 집었던 그 트레이가 보였다. 카게야마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트레이를 들고, 사토우가 스가와라를 찌르기 전에 그의 머리를 트레이로 세게 후려쳤다. 안에 담긴 주사기며 소독용 솜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카앙- 캉-
금속음이 스가와라의 귓가를 때렸다.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스가와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으로 의사가 풀썩 쓰러졌다.
“…카게야마?”
“스, 스가와라 선배….”
카게야마는 트레이를 떨어뜨리곤 힘이 빠졌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카게야마는 자신이 사람을 그렇게 사정없이 때렸다는 것에 놀랐는지 숨을 헐떡이며 자기 손을 들여다보다 스가와라에게 눈길을 돌렸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 이 사람이…이 사람이 선배를 찌르려고 했어요…선배가 비명 지르면 감염자들이 몰려올테니 그걸 이용해서 도망치려고…스가와라 선배를, 선배를 칼로 찌르려고….”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벼락에도 맞은 것처럼 짜릿한 희열이 제 몸을 관통하는 걸 느꼈다.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다른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있었어. 아직 남아있었어.”
주위를 빙빙 돌며 자신을 질타하던 무리들이 파스스 바스러졌다.
자신은 카게야마를 잔인한 광경으로부터 보호해준 적이 있었다. 결코 쓸모없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웃으며 카게야마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아, 저 떨리는 눈동자. 불안해하고 있잖아?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다가가 달래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카게야마….”
이제야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스가와라에겐 카게야마가 이 세상에 이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을 위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내가 쓸모없지 않다는 걸 증명해보이기 위해 필요한 존재.
문득 스가와라의 뇌리에 카라스노OB와 함께 했던 시합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던 카게야마. 성공 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했던 아이.
스가와라는 그 순간, 어떤 강렬한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카게야마의 존재가 이번에도 자신에게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또 포기하지 않게 해준 그 아이를 내가 지킨다. 이것이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지금 이 순간 카게야마에게 사랑에 빠졌다. 흰 설탕처럼 마냥 깨끗하고 순수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냄비 바닥에 눌어붙어버린 캬라멜처럼 달콤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그 감정을 한껏 만끽하기로 했다.
* * *
카게야마는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책상다리에 묶인 의사를 내려다봤다.
“스가와라 선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우리가 무사히 도망치려면 이 방법뿐이야.”
내키진 않았지만 선배가 하는 말이니 따라야 한다. 카게야마가 머뭇거리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매스를 주웠다.
이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야. 히나타 보고 괴물이라고 하면서 치료도 안 해주고, 스가와라 선배를 이용해서 도망치려 했어.
카게야마는 일부러 속으로 의사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매스를 든 손이 떨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걱정 마. 내가 찌를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손에서 매스를 가져왔다. 떨고 있네. 사람을 찌르려니 무서운가봐. 그야 그렇겠지. 카게야마는 아직 15살짜리 어린 아이인걸?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두려워하는 걸 보며 전율했다.
봐봐,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돼.
그는 뿌듯해하며 칼날을 높이 들었다.
저 아이는 내가 지켜줘야 해. 내가 더 어른이니까. 카게야마한테는 내가 없으면 안 돼.
“아악!!”
줄곧 기절해있던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아, 됐다. 이제 가자.”
스가와라는 그의 허벅지에서 매스를 뽑지도 않은 채 카게야마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제 비명을 지를 거라 생각했던 남자는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비명을 참았다.
“어라? 비명을 더 질러줘야 우리가 편하게 나갈 수 있는데…카게야마, 잠깐만.”
의사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자 스가와라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의 허벅지에 꽂혀있는 칼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는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도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감탄했다. 저 남자가 저렇게까지 살아남으려는 건 아마 그 미카인지 뭔지 하는 딸을 다시 보기 위해서겠지? 역시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야. 그 존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생긋 웃었다. 소중한 게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카게야마, 휴대폰 좀 줘볼래?”
“네? 어…여기 있어요. 근데 휴대폰은 왜요?”
자기가 뭘 하려는 지도 모르면서도 순순히 휴대폰을 내미는 카게야마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의 휴대폰, 배터리가 남아있어서 참 다행이야.”
스가와라는 잠금조차 걸려있지 않은 휴대폰 화면을 사토우의 눈앞에 들이댔다.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화면을 본 사토우는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로 화면을 눌렀다.
“좀 신나는 노래가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기본 노래밖에 없네요.”
그는 발버둥 쳤으나, 스가와라는 그쪽으론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작은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커다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곤,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방 안에서는 한 남자가 절규하고 있었으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벽 뒤편에서 카게야마의 손을 잡고 몸을 숨기고 있던 스가와라는, 감염자들이 기어이 주사실의 문을 부수는 걸 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은 쓸모없지 않았다. 자신은 카게야마를 지키는 벽이었으며, 영웅이었다.
5일째 ‖ AM 11:00
평소보다 훨씬 늦게 일어난 카게야마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스가와라의 갈색 눈동자에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스, 스가와라 선배? 뭐 하세요?”
“너 보고 있었는데?”
스가와라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카게야마의 뺨에 손을 올려놓고 웃었다.
“어제 많이 피곤했나봐? 일어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일어나길래 걱정돼서 지켜보고 있었어.”
“…걱정끼쳐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잘 잤어?”
“…네.”
사실 아직 조금 피곤했지만 스가와라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더 자봤자 피로가 풀리진 않을 거다. 잠이 부족해서 피곤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쳐서 피곤한 거였으니까.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응.”
카게야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향했다. 가는 도중 두꺼운 커튼이 쳐져있는 창문이 보였으나 카게야마는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가는 걸 참으며 걸었다. 두껍지만, 그래봤자 천일 뿐인 저 커튼 너머엔 어제 그들이 많은 것을 두고 나온 그 병원이 있었다.
“후우….”
카게야마는 찬물이 흘러나오는 세면대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히나타는 무사할까? 주장은, 츠키시마와 야마구치는? 시미즈 선배와 야치는?
잠시 동안 물이 흐르는 걸 멍하니 보고 있던 카게야마는 눈을 감고 수도꼭지 쪽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웠다. 카게야마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나니 이제야 좀 정신이 제대로 드는 기분이었다.
카게야마는 감았던 두 눈을 뜨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 소년의 까만 머리카락 끝부분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게 꼭 눈물 같아보여서 카게야마는 그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다들 괜찮을 거야.”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목을 타고 흘러 기어이 옷 안쪽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카게야마는 그 오싹한 감각에도 굴하지 않고 소년에게 거듭 말했다.
“괜찮을 거야.”
* * *
“세수는 다 했어? 그럼 이리 와서 뭐라도 좀 먹어.”
“이거 저희가 막 꺼내 먹어도 되는 걸까요…?”
“뭐 어때. 지금 집주인도 없고, 문도 열려있었잖아?”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냉장고에서 꺼낸 음식들을 보고 찜찜한 듯 말했으나, 스가와라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 다행이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더라고.”
“…감사합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가 건네주는 우유 팩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집주인이 식량을 많이는 못 챙겨 갔나봐. 냉장고 안에 이것저것 많더라. 네가 자고 있는 동안 부엌 찬장도 살펴봤는데 통조림이랑 물도 제법 있더라고. 여기 있으면 당분간은 걱정 없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에 작은 슈퍼라도 있나 한 번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큰 마트는 물건은 많긴 하겠지만 위험하니까. 아, 물론 내가 다녀올 거야. 카게야마는 여기 있어.”
스가와라는 두꺼운 커튼을 쳐둔 창문 쪽을 힐끔거리다, 우유만 마시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식빵을 내밀었다.
“빵 먹을래?”
“네.”
“잼? 아니면 베이컨?”
“음… 잼으로요.”
“자, 여기.”
스가와라에게 버터나이프와 빵을 받아든 카게야마는 잼 뚜껑을 열었다. 달큰한 냄새가 코에 확 풍겨왔다. 딸기잼이었다. 나이프로 잼을 뜨던 카게야마의 손이 멈췄다.
“카게야마?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카게야마는 잼을 빵에 바르는 대신 다시 통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왜 그래? 딸기잼 싫어해? 미안, 잼은 그것밖에 없더라.”
“딸기잼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카게야마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이프 밑으로 흘러내리는 딸기잼이 꼭 끈적거리는 피 같아서 그랬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럼 베이컨 먹을래?”
스가와라는 이번엔 베이컨이 담겨있는 비닐 팩을 내밀었다.
“…아뇨, 괜찮아요.”
“카게야마, 괜찮아? 안색이 창백해.”
“…괜찮아요.”
카게야마는 식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잠깐 샤워 좀 하고 올게요.”
“응. 자면서 땀 흘렸어?”
“…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시선을 피하며 샤워실 안으로 들어갔다.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찝찝한 건 맞았다. 카게야마는 샤워기를 틀어놓고 몸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제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 쿰쿰한 땀 냄새랑은 달랐다. 카게야마는 한 번 더 몸에 비누칠을 하면서 스가와라가 내밀었던 베이컨을, 하얀 지방이 섞여있던 연분홍색 고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제 몸에서 나는 것 같은 그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베이컨. 베이컨이었다. 그 연분홍색 고기 냄새가 제 몸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 카게야마는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코는 라벤더 향밖엔 안 난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머리는 베이컨 냄새가 난다고 우기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머리는 제멋대로 감염자들에게 뜯어 먹혔던 아이를 떠올렸다.
딸기잼처럼 붉은 피 사이로 보이는 살점.
“우욱…!”
별안간 올라오는 구역질에 카게야마는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 머릿속에 퍼지는 베이컨 냄새가 너도 다를 거 없는 고깃덩어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 *
“카게야마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스가와라는 자신이 병원이 있는 쪽을 힐끔 거릴 땐 안절부절 못하다, 딸기잼을 풀 때부턴 점점 핏기가 가시던 카게야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카게야마의 생각이 불 보듯 뻔했다. 딸기잼을 보면서 피를 떠올렸겠지. 베이컨을 보여주니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던데.
“정말, 아직 어리다니까 카게야마는. 겨우 이 정도 장난에 놀라다니.”
그래도 그 창백한 얼굴, 제법 귀여웠어. 역시 포도잼은 숨기고 딸기잼을 꺼내주길 잘했지. 스가와라는 유쾌한 기분으로 딸기잼의 뚜껑을 열었다. 붉은 것이 잔뜩 뭉쳐있어 검게 보이는 잼에선 설탕이 잔뜩 들어간 단내가 났다. 스가와라는 버터나이프로 딸기잼을 듬뿍 퍼 빵에 발랐다.
“역시 카게야마한텐 내가 필요해.”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입가로 붉고 끈적이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6일째 ‖ AM 10:00
“그럼 난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올 테니까, 카게야마는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스가와라 선배, 꼭 가셔야 해요? 아직 물도 먹을 것도 충분한데….”
카게야마가 주뼛주뼛 거리며 스가와라의 옷자락을 슬쩍 붙잡았다.
“밖엔 감염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위험하잖아요….”
스가와라는 그의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다만 다정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잘 타이르는 듯한 그의 어조에 카게야마의 손이 떨어져나갔다.
“그럼 다녀올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절대로 밖에 내다보거나 하면 안 된다? 누가 와도 집에 들이면 안 되고.”
“…네.”
스가와라가 신발을 신는 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보고 있던 카게야마가, 스가와라가 문고리에 손을 대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 스가와라 선배.”
“응?”
“잘…다녀오세요.”
“응. 다녀올게.”
스가와라는 카게야마가 다녀‘오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는 것도, 다녀오겠다는 자신의 말에 카게야마가 안도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나오자마자 문에 등을 기댄 채 입을 막고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입을 막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방금 카게야마 진짜 끝내줬어! 내가 걱정되어서 어쩔 줄 모르는 그 표정이라니! 그리고 다녀‘오세요’? 세상에, 얼마나 걱정됐으면!
잠시 동안 만족감에 젖어있던 스가와라는 곧 뿌듯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사실 카게야마의 말이 옳았다. 식량도, 물도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밖을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스가와라에겐 무척이나 필요한 일이었다.
혼자 남은 카게야마가 안절부절 할 게 눈에 선했다.
창문마저 두꺼운 커튼으로 차단된 그 곳에서, 혼자 마음을 졸이고 있겠지. 나까지 잘못되면 어쩌나-하고. 그리고 무사히 내가 돌아가면, 그제야 안심할 거야.
스가와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게야마가 왜 내가 나갈 때 노심초사하는 기색을 보였겠어? 내가 없으면 불안하니까, 내가 필요하니까 그랬겠지!
그는 자신이 내놓은 답에 만족했다.
하여간 꿈속의 그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머저리들이었다.
6일째 ‖ AM 11:20
카게야마는 좀처럼 한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있질 못하고 계속 방 안을 왔다갔다 배회했다. 밖으로 나간 스가와라가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렸다. 스가와라가 나간 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카게야마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가, 곧 다시 일어나 창가를 서성였다. 카게야마는 외부의 것이라면 한 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빈틈없이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스가와라 선배가 위험할 수도 있으니 커튼 절대 열지 말랬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카게야마는 결심을 내린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커튼을 살짝 젖혔다. 유리 너머로 고만고만한 주택들과 상가들이 보였다. 그 너머로 시선을 옮기면 조금 더 높은,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께, 카게야마가 스가와라의 손을 잡고 빠져나온 병원이 있는 건물이었다. 초록색 십자가는 아직까지도 불이 들어와 있는 채였다. 카게야마는 애써 그 건물에서 눈길을 돌리고 거리를 둘러봤다. 그러나 스가와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실망하며 다시 창문에 커튼을 치려했다.
“…어라?”
그러나 커튼을 치기 바로 직전, 골목길 쪽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비틀거리는 불안정한 걸음이 아니었다. 혹시 스가와라 선배인 건가 싶어서 카게야마는 커튼을 조금 더 열었다.
걸어 나온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시마다씨…?”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커튼을 열지 마라’는 말도 잊은 채 커튼을 확 열어젖히고 시마다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시마다도 그를 알아차렸는지 화색을 띄며 손을 흔들었다.
* * *
“시마다씨가 어떻게 여기 계세요?”
카게야마는 소파에 앉아서 안경을 닦고 있는 시마다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물었다.
“경찰들만으론 인력이 부족해서 미야기 주민들도 수색을 돕기로 했거든. 나도 지원했고.”
“수색이요?”
“응. 생존자 수색.”
그는 카게야마가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나저나 여기서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사실 체육관에도 갔었는데 너희가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대체 어딜 갔던 거야?”
“경찰…들이 구조하러 와서….”
카게야마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경찰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들은 경찰이라기엔 꺼림직한 구석이 있었으나, 그래도 경찰복을 입고, 경찰차를 타고 있긴 했으니까.
“그래? 우린 그런 연락 못 받았는데…그 경찰들은 어딨어?”
“중간에 헤어…졌어요.”
“야마구치는?”
“야마구치랑 츠키시마는 경찰들을 따라갔어요.”
카게야마의 말을 들은 시마다는 끄응 소리를 내며 볼을 긁적였다.
“그래, 그랬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네.”
시마다는 옆에 앉은 카게야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좀 있다 동료들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마. 이제 걱정할 거 없어.”
“스가와라 선배도 기뻐할 거예요.”
“그래? 스가와라는 지금 어딨는데?”
“잠깐 나가셨어요.”
“그럼 내가 나가서 찾아보고 올까?”
“그, 그래주실 수 있어요?”
시마다는 반색하는 카게야마를 보고 껄껄 웃었다.
“그래. 찾아보고 올게.”
“감사합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그의 뱃속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먹을 거 가져다 드릴까요? 사실 저희 건 아니고, 이 집에 있던 거긴 한데….”
시마다는 멋쩍은 듯 연신 헛기침을 했다.
“…그래줄래?”
식탁 위엔 아직 식빵이 남아있었다.
잼이 어디 있더라? 냉장고에 있으려나?
“어?”
냉장고 문을 연 카게야마는 딸기잼 옆 놓인 이상한 걸 발견했다.
“…유기농 ‘포도’잼?”
카게야마는 눈을 비비고 다시 유리병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스가와라 선배는 분명히 딸기잼 밖에 없다고….”
설마 못 찾으신 건가? 이렇게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카게야마는 병을 꼭 쥐었다. 뭔가 이상했다. 대체 뭐가 이상한 걸까? 포도잼이? 아니면….
“윽!”
거실 쪽에서 별안간 짧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바닥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카게야마는 재빨리 잼을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거실로 달려갔다. 시마다가 쓰러져 있었다.
“카게야마.”
그리고 스가와라가 두꺼운 책을 든 채 서있었다. 그는 카게야마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왜 다른 사람이 여기 있어?”
“스가와라 선배! 무슨 짓이에요!”
“왜 다른 사람이 여기 있냐니까?”
“우연히 시마다씨가 거리를 걷고 계신 걸 발견해서…”
스가와라는 눈을 부릅 뜨고 카게야마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래서? 그래서 안으로 들인 거야? 응? 저 사람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카게야마 앞에 선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으면 안 돼!”
“하지만, 시마다씨잖아요!”
“그게 뭐가 어쨌는데?”
스가와라는 이제는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카게야마, 경찰들이 널 괴롭혔다고 그랬지?”
“…네.”
“그저께 본 의사는 어땠어? 의사가 우리를 도와주든?”
“…아뇨….”
“경찰도 의사도, 사람을 구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지? 그런데도 우리를 구해줬어? 응? 필요할 때 제대로 도와줬냐고! 아니지? 그렇지?”
그는 잡고 있던 카게야마의 어깨를 놓고 손가락으로 시마다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라고 뭐가 다를 것 같아?”
“그렇지만 시마다씨는 우리를 구하러….”
“카게야마.”
스가와라는 예의 그 타이르는 듯한 목소리로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나보다 저 사람을 믿는 거야?”
“그, 그건…”
“카게야마, 내가 너한테 안 좋은 말 한 적 있었니?”
“…아뇨.”
“그렇지? 난 항상 너를 위해왔어. 지금도 그래. 내가 언제 널 속인 적 있어?”
카게야마는 그럼 냉장고 안의 그 포도잼은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건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스가와라는 한 번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선배였다. 그러니까 그가 거짓말을 한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 카게야마, 너는 누굴 믿고 의지해야하지?”
카게야마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의 선배가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기에, 억지로 대답을 쥐어짜냈다.
“…스가와라 선배요.”
그리고 스가와라는 그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맞아. 너한테는 나만 있으면 돼.”
스가와라는 시마다를 잠시 노려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카게야마한테는 자신이 필요했다. 자기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 내가 지켜주면 되니까.
스가와라는 부엌에서 커다란 고기 손질용 칼을 꺼내들었다.
저 사람은 나에게서 카게야마를 빼앗아가려고 했어. 카게야마한테는 내가 필요한데.
“스가와라 선배?!”
“왜?”
“지, 지금 뭐하시려는 거예요? 칼은 왜….”
“위험은 미리미리 싹을 제거해둬야지.”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붙들었으나, 스가와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치켜들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놔줘 카게야마. 저 사람은 위험해. 기절해 있을 때 처리해야해.”
“그래도 죽일 것까진 없잖아요!”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죽이는 게 제일 깔끔해. 살려뒀다간 다른 사람들을 불러올지도 몰라.”
그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싹했다.
“놔, 카게야마. 난 절대 너한테 틀린 말 안하잖아. 저 사람은 여기서 죽어야 해.”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스가와라를 말려야 했다. 카게야마의 뇌리에 번쩍하고 그의 주의를 끌만한 게 떠올랐다.
“서, 선배도 틀린 말하잖아요!”
“…뭐?”
“어제 저한테 거짓말 했잖아요! 딸기잼 밖에 없다고 하셨으면서!”
“응. 딸기잼 밖에 없었는데?”
스가와라의 표정이 워낙 천연덕스러웠기에 카게야마는 잠시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생각했다. 그러나 냉장고에 포도잼이 들어있는 건 확실했다.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포도잼도 들어있었잖아요.”
“아, 정말? 잠깐 냉장고 좀 보고 올게.”
카게야마는 스가와라의 팔을 놓았다.
설마 정말로 모르셨던 건가? 하긴, 스가와라 선배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카게야마는 아직도 기절해있는 시마다를 힐끔 곁눈질하고는 스가와라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잼을 못 찾으셨던 건 맞으니까, 스가와라 선배도 가끔씩 틀릴 때가 있다고 말하면 잘 알아들으실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스가와라가 취한 행동은,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선배?!”
바닥에 부딪힌 유리병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깨진 유리조각 사이로 시커먼 잼이 줄줄 흘러나왔다. 스가와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걸 내려다봤다.
“자, 이러면 이제 딸기잼 밖에 없지? 나, 틀린 말 한 거 아니다?”
카게야마는 어제 왜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스가와라의 눈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는지를 깨달았다. 갈색의 눈동자는 얼핏 보기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정체모를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빛나긴 하되, 꼭 어릴 적 들었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도깨비불처럼 섬뜩한 빛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 몽롱하고, 그렇다고 해서 감염자들의 눈동자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불현 듯 카게야마는 그 눈동자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렸다. 저 사람은, 아니 저건 자신이 알던 스가와라 선배가 아니었다. 금빛 이채가 감도는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카게야마, 왜 뒷걸음질 치는 거야?”
스가와라가 다가올수록 카게야마는 제 몸 안의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불안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스가와라 선배…선배 지금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내가? 난 평소랑 다를 거 없는데?”
“아니에요. 좀…좀 많이…”
“카게야마 너야말로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네가 날 피하다니….”
이상해. 카게야마는 날 필요해하는데 왜 갑자기 날 피하지?
스가와라의 눈에 거실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마다가 들어왔다. 그래, 저 사람 때문이야! 저 사람이 카게야마한테 뭔가 나쁜 말을 한 게 틀림없어! 저 사람만 없애면 카게야마가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카게야마는 부엌 싱크대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스가와라와 시마다를 번갈아봤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나 혼자선 스가와라 선배를 못 막는데…그래,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자.
카게야마는 그대로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게야마?!”
스가와라가 쫒아오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로 가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지? 카게야마는 필사적으로 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처에 있는 거라곤 사람이 빠져나간 민가들과 상가 건물들. 그리고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면 보이는 하얀색 건물.
그들이 많은 것을 두고 나와야 했던 그 건물의 벽면엔 아직도 초록색 십자가가 빛나고 있었고, 뒤에선 스가와라가 쫓아오며 그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이마에서 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이 그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떡하면 좋지?
목적지조차 정하지 못하고 달리는 카게야마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토스를 불렀다. 히나타였다. 인터하이 마지막 시합 때처럼 앞으로 달려 나온 히나타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 날 히나타에게 토스를 올린 후 어떻게 되었더라? 사고가 마비를 호소하고 있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카게야마는 병원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릇된 판단이었지만 이미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어차피 그릇된 건 그의 판단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 * *
카게야마는 약국들이 들어서 있는 3층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4층 계단부터는 감염자들이 쫙 깔려있어서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계단을 소란스레 뛰어다닌 탓에 윗층에 있던 감염자들마저 내려와 3층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벽에 숨어 숨을 죽인 채 감염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감염자가 지나가고 난 후 카게야마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바로 저번에 여길 지나갈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히나타도, 주장도 같이 있었고, 스가와라 선배도 멀쩡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언제부터?
카게야마는 제 손목에 찬 시계 화면을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세상이 아직 평화롭기만 했던, 그의 주변에 죽음이 드리우기 바로 전날까지.
백화점에서 시계를 사기 전, 카게야마는 엄마와 오랜만에 영화관엘 갔었다. 카게야마는 영화가 끝나고 까만 화면 위로 하얀 글씨의 스텝 롤이 올라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자막을 보고 있었다.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에 따른 징조가 반드시 나타난다.’
그때 카게야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징조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일까.
카게야마는 생각한다. 그때 그 자막을 본 것, 그 자막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게 바로 그 징조가 아니었을까-하고. 그리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징조 같은 건 없었을 거다. 그런 거창한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멋진 이야기의 주인공들뿐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는 결코, 빈말로도 ‘멋지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걸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나 지났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어 날짜를 확인해본다. 처음 그 일이 일어난 날로부터 하나, 둘, 셋….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그 겨우 숫자를 세는 것뿐인데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괴로웠다.
여섯. 숫자가 여섯 번째에서 멈춘다. 그래 여섯 번째. 오늘은 여섯 번째 날이었다.
이제 겨우 6일째였다.
이렇게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카게야마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 사태가 언제 진정될지 정확히는 몰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진정되진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심지어는 그걸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졌으나, 카게야마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 건물 안에 히나타도 있고 주장도 있을 거야. 스가와라 선배도 주장이 한소리 해주면 제정신을 차릴 거야. 그러니까 빨리 두 사람을 찾자.
카게야마는 계단 쪽을 계속 힐끔거리며 올라갈 타이밍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아이는 느닷없이 제 머리를 강타한 고통 앞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 * *
카게야마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스가와라의 갈색 눈동자에 놀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진 못했다. 뭔가가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
“일어났어?”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뺨에 손을 올려놓고 웃었다. 마치 어제 아침처럼.
“많이 피곤했나봐?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안 일어나길래 걱정돼서 지켜보고 있었어.”
카게야마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가와라가 다른 사람들 해치려 한 여섯 번째 날은 꿈이고, 자신은 지금 막 깨어난 걸지도 모른다고. 오늘은 다섯 번째 날이라고.
그러나 스가와라 뒤편으로 보이는 광경은 오늘이 여섯 번째 날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카게야마는 제 입을 막고 있는 천 같은 것을 입에서 빼내기 위해 팔을 움직이려 했으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당황해하는 카게야마를 두고 혼자 빠르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딱 좋은 타이밍에 일어나줘서 다행이야. 하마터면 못 보여줄 뻔했지 뭐야.”
보여주다니 뭘?
“있지, 저기 감염자들 보이지? 카게야마 네가 소란피우는 바람에 여기까지 내려왔잖아.”
“아, 널 비난하려는 건 아니야! 오히려 아주 잘했어!”
그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베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카게야마에게 자신이 얼마나 그를 생각하는지, 그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
카게야마를 기절시키고 난 후 스가와라는 고민했다. 카게야마를 데리고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가, 감염자들이 배회하는 거리를 지나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카게야마를 지키면서, 그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려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카게야마가 자주 마시는 우유에 그려져 있는 것과 비슷한 기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약국 광고였다.
‘우리 아이의 성장에 좋은 쑥쑥 음료’
그저께 자신이 보고 히나타에게 농담을 던졌던 바로 그 광고였다. 그걸 보자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카게야마가 여기로 도망친 건 아마도 히나타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히나타를 뛰어넘는 자기희생을 보여주자. 내가 더 너를 생각하고 있노라고, 카게야마에게 알려주도록 하자.
그는 마치 순교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앞으로 행하려는 행위야말로 숭고한 희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의 ‘사랑’이라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아득히 뛰어넘는, 절대적인 신앙심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카게야마에게 있어서는 치사량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과하고 독한 것이었다. 그렇다. 그건 결국 독이었다. 양쪽 모두에게.
카게야마는 약국의 유리문 근처를 서성이는 감염자들을 보며 초조하게 입 안의 천을 씹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활짝 열리는 약국의 쌍여닫이문은 그들을 감염자들로부터 지켜줄 리 없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불안을 눈치 채곤 생긋 웃었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스가와라는 몸을 일으키고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뒤를 돌아보며 카게야마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절대로 잊지 마.”
내가 널 지켰다는 걸.
문을 열고 나온 스가와라는 그 앞에 굳건히 선 채로, 히나타를 떠올렸다. 봐봐, 잘 보란 말이야. 히나타는 도망쳤지만 나는 심지어는 도망치지도 않을 거야. 내가 히나타보다 너를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그는 별안간 발작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복도 끝에서부터 물결이 일었다.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던 물결이 끝끝내 그를 찢어발기기 위해 오고 있었다.
카게야마에겐 방파제가 필요해. 그리고 내가 그 역할을 맡을 거야.
이젠 누구도 자신을 보며 필요 없는 녀석이라고 손가락질하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스가와라는 거센 파도를 양팔 벌려 맞으며 환희에 몸을 떨었다.
새빨간 광기가 그의 발치에서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 ‖ ?? ??:??
“학생, 이제 정신이 들어?”
요람처럼 잔잔하게 몸이 흔들리는 안락함에서 깨어나자마자 아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차 안인 것 같았다. 왼쪽 눈이 이상하게 아팠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모니터 화면을 지나치게 오래 보고 있을 때 느껴지던 고통과 비슷했다.
“시마다씨가 생존자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지 뭐야.”
“그래서 혹시나 해서 근처 건물들까지 싹 뒤져서 겨우겨우 찾았어.”
아이는 한 쪽 눈을 감은 채로 차의 백미러에 달랑거리는 인형을 응시했다. 꼭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처럼 목 위로 매인 줄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근데 학생은 왜 그런 곳에 묶여있던 거야? 누구 나쁜 놈한테 당하기라도 거야?”
경찰의 말에 아이는 감지 않은 한 쪽 눈마저 깜빡였다. 어두워졌다 밝아지길 반복하는 와중 팔목에 찬 시계가 보였다. 금이 가 있었다. 고장 난 것 같았다.
이거 잘 안 부서지는 시계라고 하지 않았나? 어라, 난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모르겠어요.”
눈에서 시작된 통증이 머리까지 번지고 있었다. 아이는 손바닥을 올려 눈두덩과 이마를 꾹 눌렀다. 왼쪽 눈이 아파서 눈을 뜨고 있기 괴롭건만, 막상 눈을 감으니 새하얀 잔상이 꼭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그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통증 때문에 사고가 하얗게 날아가기 직전, 흰 화면에 까만 점 같은 게 생겼다. 하얀 도화지 위에 까만 점이 찍혀있으면 시선이 그 주변을 맴돌 듯 아이도 그 점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점 같은 것은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얼룩이라고 부를 만큼 커졌다.
아이는 문득 그 얼룩을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아픈 하얀 빛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은 얼룩에도 낙인처럼 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이는 얼룩을 보고 있었지만 눈을 감은 채였기에 그 글자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절대로 잊지 마.’
아이는 이 얼룩이 원래는 붉은색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왜 붉은 지만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근데 학생 이름이 뭐야?”
아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다.
그러나 제 앞의 얼룩, 그것이 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아마도 그게 제 이름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아이는 얼룩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스가와라 코시요.”
거짓말처럼 눈의 통증이 사그라졌다. 아마도 그 얼룩이 제 몸 안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는 손목에 찬 고장 난 시계를 풀었다.
이건 더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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