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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 2부-8 본문

HQ!/다이나믹 토오루!

[오이카게] 다이나믹 토오루!-overture- 2부-8

SaKuya! 2016. 2. 18. 13:15



8.

“위험합니다!”


귓가로 쉬익 하고 바람이 스친다. 뒤늦게 놀라는 낙타를 진정시키며 옆을 보니 언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커다란 전갈이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혹시 몰라 화살을 두어 발 더 쏘니 전갈이 몇 번 꿈틀거리다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고 추욱 늘어졌다.


“데저트 스콜피온들의 서식지는 좀 더 북쪽일 텐데 왜 이런 곳에….”

“요즘 이상하게 이 근방에 안 사는 강한 몬스터들이 많이 나오네요.”


화살을 뽑고 있던 오이카와는 그 대화에 몸을 움찔했다.


“…저거 아무래도 나 때문이겠지?”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 뽑아낸 화살을 건네며 작게 소곤대자 카게야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강한 몬스터들이 이상할 정도로 습격해 오는 거.”

“그게 왜요?”

“신전에서 보내는 거 아니야?”

“아, 그런 거였습니까?”

“토비오쨩 그런 당연한 것도 눈치 못 챈 거야?!”

“그냥 나오면 나오나 보다 했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좀 더 생각해달라고.”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툴툴거림을 들으며 화살 하나를 남기고 나머지는 통에 집어넣었다. 언제 또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하나 정도는 손에 들고 있는 편이 좋았다. 


카게야마의 뒤를 따라오던 알은 그 소란 속에서도 낙타 위에 앉아 졸고 있었다. 알은 요 2~3일간 병든 닭처럼 자주 졸았다. 그럴 때마다 타르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을 옆에서 지켜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알이 갑자기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제 뺨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더니 자기를 보고 있던 타르프에게 내밀었다.


“응? 물?”


타르프는 알의 손가락을 만져보곤 하말에게 외쳤다.


“하말 아저씨! 비가 오려나 봐요!”

“…사막에도 비가 와?”


오이카와의 물음에 타르프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비 안 오는 곳도 있어요? 비가 오니까 풀도 자라고 그러는 거지.”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천막을 쳐야겠다는 하말의 말에 낙타들의 행렬이 멈췄다.


 캐러밴은 부랴부랴 천막을 치고 짐들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은 천막 안에 불을 피워야 할 것 같다는 말에 오이카와는 부지런히 천막들을 돌아다니며 불을 피웠다.


맨 끝에 친 천막에도 불을 피우고 나온 오이카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사막에 비라니.


아까만 해도 모래가 가득 끼어 텁텁했던 공기가 깨끗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닥을 보니 모래도 색이 조금 더 진해져 있었다. 아예 강도 흐르고 초원도 있다던 동쪽 사막이면 모를까 서쪽 사막 중에서도 특히나 삭막한 곳에 비가 내리는 모습은 꼭 거짓말, 아니지.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


얼마간 더 비 내리는 사막을 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그의 천막으로 들어갔다가, 안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하말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토비오쨩이랑 이와…카스토르쨩 못 봤어요?”

“두 사람은 방금 정찰 나갔을걸.”

“…나한테 말이라도 하고 나가지.”


아니지, 혹시 둘이서 말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거 아냐?! 요즘 왜 나만 빼놓고 둘이 붙어 다녀?! 토비오쨩은 내 옆에 딱 붙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물론 내가 몬스터 잡는 데 도움이 안 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데려가서 마스코트라도 시키면 되잖아! 귀엽고 잘생긴 마스코트!


한창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 오이카와의 귓가에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쬐고 있는 알이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가 항상 어깨 위에 올려두던 새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 폴짝폴짝 뛰며 짹짹대고 있었다. 


“알? 어디 아픈 거야?”

“…자주 이래요.”


하말은 끓는 물이 들어있는 작은 통 안에 마른 풀 몇 가지를 잘게 부숴 넣고 손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쓴 내가 확 올라오는 그 약초 물을 알의 입가에 가져갔다.

약초 물이 많이 쓴 모양인지 알은 오만상을 찌푸리다가 코를 막고 물을 꿀떡꿀떡 삼켰다. 많이 쓴지 다 마시고 난 후에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알을 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전에 각설탕을 먹지 않고 가져온 것을 기억해내곤,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다행히 비에 젖지 않았는지 녹지 않고 네모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각설탕이 손에 잡혔다.


“이거라도 먹을래?”


사촌 동생이 쓴 약을 먹고 난 후엔 꼭 사탕을 입에 물고 있던 것이 떠올라 각설탕을 내미니 알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며 설탕을 집었다. 알이 설탕을 입안에 넣는 걸 보고 있던 타르프는 코를 훌쩍이며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비 맞으면 감기 걸려.”

“난 튼튼하니까 괜찮아요.”


소녀는 그녀를 따라 나온 오이카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물을 받으려고 꺼내둔 냄비들만 계속 응시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알도 원래는 저렇게 몸이 약하지 않았는데.”


천막 안쪽에선 기침 소리가, 그들 옆으론 냄비 위로 빗방울이 통통 떨어지는 소리가 소녀의 목소리에 섞였다.


“알은 원래 우리 마을에서 노래를 제일 잘하는 애였어요.”

“…말 못 하지 않아?”

“예전엔 말도 하고 노래도 잘 불렀어요.”

“그런데 지금은 왜…?”


타르프는 작은 손을 꼭 주먹 쥐었다.


“…알의 부모님이 알한테 독초를 먹여서 그래요.”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였다.


“왜 부모님이 자기 자식한테 독초를 먹여?”

“…알이 벙어리의 별 밑에서 태어났다고 신관이 그랬거든요.”

“그 시데라티오 의식? 그걸 받은 거야?”


타르프는 잠시 입술을 깨물고 있다 말했다.


“숲에서 길을 잃고 몬스터에게 쫓기던 신관을 알네 부모님이 도와준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신관이 답례로 혼자서지만 시데라티오 의식을 해줬는데…”

“…벙어리의 별이 피었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알은 벙어리로 태어나지 않았잖아요? 노래도 잘 불렀고. 그게 문제였어요. 알이 앞으로 벙어리가 될 만한 위험한 일을 겪게 될 거라 생각한 알의 부모님은 그 위협을 피할 수 있도록 독초를 먹여 알을 미리 벙어리로 만든 거예요. 그게 알의 운명이니까.”


오이카와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 운명의 별은 절대적이었다. 신전은 저주받은 자신을 죽이려 들었고, 알의 부모는 자식에게 독초를 먹여 벙어리로 만들었다.


“독초를 먹고 크게 앓은 후로 알은 잔병이 많아졌어요. 그리고 뭣보다도 좋아하던 노래를 못 부르게 된 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어요.


타르프가 한숨을 쉬었다.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아….”

“다친 새가 알의 방 창틀에 쓰러져있지 않았더라면 알은 정말 죽어버렸을 거예요.”


알은 아무래도 다친 새를 치료해주기 위해 죽는 걸 관둔 모양이었다. 

그녀는 옛일을 더듬는 듯 먼 곳을 보며 말했다.


“누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새는 날개를 심하게 다쳐있었어요. 알이 치료해주긴 했지만 지금도 못 날아요.”

“…그러고 보니 그 새가 나는 걸 본 적 없구나.”


오이카와는 방금도 폴짝 뛰어다니기만 할 뿐 날개를 펴지는 못하던 새를 떠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타르프가 다시 입을 연 건 안쪽에서 마른기침 소리와 새 소리가 동시에 들린 뒤였다.


“…새를 치료해주면서 알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새가 날 수 있게 될 때까진 살 거래요. 그리고 자기도 새가 되고 싶대요. 날개를 다쳐서 날지 못 하는 새 말고 노래도 하고 날 수도 있는 새.”


누가 그런 헛소리나 하라고 글을 가르쳐 준 줄 아느냐고 중얼거리면서 타르프는 눈에 비가 들어간 것 같다며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빗물 때문일까. 그녀의 속눈썹에도, 목소리에도,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알한테 설탕을 줘서 고마워요.”





∥9월 10일 푸루스


한창 자랄 때인 아이들이 그렇듯, 오이카와도 밥을 먹고 뒤돌아서기가 무섭게 다시 출출해져 입에 넣을 것을 찾곤 했다. 

식사를 마치고 마법을 공부한다고 방에 돌아와 책을 뒤지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간식 시간까지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얌전히 기다리기엔 입이 심심했다.


“…몰래 주방에 들어가 봐야지.”


하녀들이 간식을 만들고 있을 터이다. 완성되면 몰래 한두 개 정도는 집어와도 되겠지. 오늘 간식은 뭘까? 과자여도 좋고 단 빵이면 더 좋은데. 


오이카와는 입맛을 다시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주방 문 앞에 섰다.


“…공작부인이 돌아가셨다면서?”

“이번에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에그, 우리 오이카와 도련님 불쌍해서 어쩌나. 그나마 매번 선물이라도 챙겨주시던 게 공작부인이셨는데.”

“…부모님도 버린 오이카와 도련님을 몰래 챙겨주다 그렇게 되신 건 아니고?”

“얘! 너는 어쩜 못하는 말이 없어!”

“오이카와 도련님이 저주받은 건 사실인데 뭘.”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들으면 어때서?”

“그래도….”

“공작부인께서 아프신 것도, 이와이즈미님께서 이런 촌구석에 내려와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도 전부 오이카와 도련님 때문이잖아.”

“그래도 그 어린 도련님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저주의 별 밑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지.”


달콤한 빵 냄새에 섞여 공기 중을 떠도는 하녀들의 말이 오이카와의 귓속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잠시 멍하게 있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탈탈 흔들면서 제가 방금 들었던 말을 종합해보았다. 


공작부인은 아팠던 것 같다. 그런데 공작부인이 누구지? 매년 나에게 선물을 줬던 사람? 그건 멀리 산다는 우리 부모님이 보낸 거 아니었어? 나 때문에 아팠다는 건 무슨 뜻이야? 저주라니?


오이카와는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생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머릿속이 도무지 정리되질 않았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달리던 소년은 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아저씨!”

“오이카와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 행동거지만큼은 바르던 오이카와가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자, 편지를 쓰고 있던 이와이즈미 레이는 인상을 쓰면서도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내가 저주의 별 밑에서 태어났다는 게 정말이에요?”

“네? 누구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으신 겁니까?!”

“정말이냐고요!”

“그, 그건…”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걸 본 오이카와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정말이구나.”

“오이카와 도련님.”

“사실 매년 선물 보내줬던 거, 우리 부모님이 아니라 공작부인이었죠?”

“….”

“그런 공작부인이 아팠던 것도, 그리고 결국 돌아가신 것도 전부 나 때문이죠?!”

“도련님!”

“아저씨가 이런 촌구석에서 조용히 사는 것도 다 나 때문이고!”

“오이카와 도련님!”

“왜요?!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내가 저주받아서 그런 거잖아요!”

“오이카와 토오루!”


소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뺨이 얼얼했다.


“으…”


오이카와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깨물고 씩씩대다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레이 아저씨가 그를 부르는 것도 무시한 채 제 방으로 돌아온 소년은 문을 잠그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잘 말려 달콤한 햇빛 냄새가 나는 시트에 소금기를 머금은 물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자신이 7월 20일마다 예배당에 갇혀있어야 했는지.


“…저주받았으니까 그렇지.”


물기 섞인 말을 내뱉고, 오이카와는 서글퍼져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저주의 별 밑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지.


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아팠다. 그리고 하녀에게서 들은 말은 더 아팠다. 

오이카와는 한참을 웅크린 채로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으….”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해가 저물면서 방 안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는 시각이었다.


오이카와는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눈가를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도 않았건만 배가 고팠다. 소년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문을 슬쩍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녀들이 물그릇 따위를 들고 복도를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어라, 오이카와 도련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어요? 간식 시간에도 안 보이시고.”

“방에 있었어.”

“그럼 들어가 계세요. 식사는 방으로 갖다 드릴게요.”

“왜?”

“이와이즈미 도련님께서 홍역에 걸리셨어요. 옮으면 안 되니까 오이카와 도련님은 방에 계시는 게 좋겠어요.”


오이카와는 잔병 하나 없이 건강하던 이와이즈미 도련님께서 설마 이 나이에 홍역에 걸릴 줄은 몰랐다고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이와쨩 마, 많이 아파?”

“지금은 열이 올라서 아마 많이 아프실 거예요.”


하녀의 말에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치맛자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들어가세요. 조금 있다 식사 가져다 드릴게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으로 돌아온 오이카와는 또 침대로 기어들어가려다 말고 망토를 걸쳤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공작부인도 아팠잖아. 이와쨩이 아픈 것도 다 나 때문이야. 전부 나 때문이라고.


해가 지면서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오이카와는 까만 망토 하나만 뒤집어쓴 채로 밤이 내려앉은 숲으로 향했다. 요즘 자주 가서 익숙할 줄 알았건만 한밤의 숲은 아가리를 쩍 벌린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무섭고 낯설었다. 낮에는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던 들짐승들마저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며 그를 노려봤다. 오이카와는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망토를 뒤집어썼다. 새들이 푸드덕댈 때나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이카와는 작고 힘없는 짐승처럼 몸을 움찔거리며 얇은 망토 속으로 숨었다. 한참을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빼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날짐승들이 사납게 울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퍼덕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번쩍이는 안광이 정신 사나운 선을 그렸다.


“으….”


오이카와는 다시 시선을 내리고 주린 배를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배고프면 어쩔 건데. 난 먹을 자격도 없어. 남들을 불행하게만 만드는걸. 차라리 들짐승들한테 먹히는 게 낫지. 근데 저주의 별이라고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진데 난 어떤 저주를 받은 거지?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뭐 이런 건가? 그런 거겠지? 그래서 다들 불행해진 거겠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제가 무슨 저주를 받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갑자기 짐승들의 소리가 뚝 그쳤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뒤에서 커다란 짐승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직 은 늑대들이 올 시기는 되지 않았으니 멧돼지나 곰이겠지.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도망가던 새들이 그의 발치에 깃털을 하나 떨어뜨렸다. 그 까만 깃털을 주우려던 오이카와는 어느새 제 바로 옆까지 온 짐승에 놀라 뒤로 넘어졌다.


“으악!”


달빛에 비친 짐승을 본 오이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슬금슬금 몸을 뺐다. 

멧돼지나 곰 따위가 아니었다. 유니콘의 숲에 사는 성수 중에서도 우두머리급인 비덴스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성수들은 대부분 풀을 뜯어 먹고 살기에 아래쪽 숲까지 내려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비덴스는 뿔의 노란 꽃을 피울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육식을 하러 유니콘의 숲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날 사냥감으로 점찍은 건가?


오이카와는 다가오는 비덴스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 날 잡아먹고 싶으면 맘대로 해! 어차피 난 주, 주, 죽어도 별로 상관없거든?!”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치긴 했지만 정말로 비덴스가 눈앞까지 오니 몸에 덜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법이라도 써서 쫓아낼까? 아니야. 어차피 나 같은 건 없어지는 편이 낫잖아. 오이카와는 눈을 질끈 감고 말을 더듬었다.


“자, 잡아먹으려면…빨리 잡아먹어…어차피 나, 난 저주받아서…”


또, 또.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서 눈물이 나왔다.


“…없어지는 편이 나아….”


오이카와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망토를 꼭 쥐고 울었다. 이제 비덴스가 날 잡아먹겠지. 

몸을 움츠리고 있는 소년의 뺨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날카로운 이빨이 아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 비덴스가 그의 뺨을 핥아주고 있었다. 꼭 울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보자 비덴스는 얌전히 앉더니 오이카와의 다리를 머리로 가볍게 툭툭 쳤다. 등에 타라는 것 같았다.


“…나보고 타라고?”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비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이카와는 눈치를 보며 그 등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비덴스는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혹여 등에 태운 오이카와가 떨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비덴스는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푸루스의 단풍이 든 숲을 지나, 새하얀 나무들만 자라는 유니콘의 숲 안쪽까지.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길을 걷던 비덴스가 강이 흐르는 흰 꽃밭에서 멈춰 섰다. 별빛이 내려앉아 환한 꽃밭은 향긋하고 상쾌한 향이 비강에 스며드는 곳이었다.


“무슨 꽃이지? 이거 자주 맡던 향인데….”


비덴스의 등에서 내린 오이카와는 희고 작은 꽃이 다닥다닥 피어있는 줄기를 톡 건드렸다. 꽃이며 잎사귀에서 향이 사르르 피어나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거 사탕에서 나던 향인데…아, 민트구나!”


입을 크게 벌리고 민트 향기를 잔뜩 들이키며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혀 위에서 단 사탕이 녹아내리면서 텁텁하고 쓰디쓴 것들을 씻겨주는 것 같았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을 강물로 씻어내고 나니 비덴스가 민트 잎을 우물우물 씹는 게 보였다. 그는 비덴스를 따라 작은 잎 하나를 입에 넣고 씹어보았다. 사탕 같은 단맛은 없었지만, 배가 고파서인지 그럭저럭 씹고 있을 만했다. 오이카와는 잎을 삼키고 나서 입으로 크게 숨을 쉬는 걸 반복했다. 공기가 입안에 들어갔다 나갈 때마다 입안이 상쾌해졌다. 


해가 뜨자 비덴스는 놀다 망토를 둘둘 말고 잠이 든 그를 깨워 등에 태우고 다시 마을 근처의 숲까지 데려갔다. 오이카와는 꽃밭까지 오는 길을 외우기 위해 오는 내내 그 등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흰 나무들 대신 단풍이 들기 시작한 숲에서 오이카와는 또 어디론가 가버리는 비덴스의 뒷모습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기운을 차린 오이카와는 발이 가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비덴스가 보여준 흰 꽃 덕분일까, 죽고 싶단 생각은 꽤 가셨지만 역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어라?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요?”


그는 어느새 머리카락이 까만 아이와 항상 만나던 장소에 와 있었다.


“토비오쨩이야말로 매일 이 시간에 나왔던 거야? 아침에 안 졸려?”


몇 시간 만에 겨우 보는 인영이 반가웠지만 오이카와는 내색하지 않고 커다란 나무 밑에 풀썩 주저앉았다. 토비오도 쪼르르 달려와서는 그 옆에 앉았다.


“오늘은 마법 꼭 알려주세요.”

“싫다니까? 너 어차피 중급 마족이라 마법 못 써.”

“저번에 마을에 온 모험가 아저씨는 중급 마족이었는데도 마법 썼는데.”

“그건 드문 경우고.”

“저도 드문 경우일 수도 있잖아요.”


오늘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토비오의 말에 오이카와는 눈썹을 치켜들며 따졌다.


“토비오쨩은 나한테 할 말이 맨날 그것밖에 없어?”


불만 섞인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배에서 요란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음…그럼 배고프십니까…?”

“…보, 보면 모르냐!”


부끄러워진 오이카와는 새빨개진 얼굴로 토비오에게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놨다.


“어,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왜요?”

“…나 집 나왔어.”


오이카와는 침울한 표정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와쨩이 나 때문에 많이 아파….”

“오이카와상이 때렸어요?”

“안 때렸거든! 날 뭘로 보는 거야 진짜!”


오이카와는 토비오에게 버럭 소리를 치고는 씩씩대기 시작했다.


“홍역 걸려서 아픈 거거든!”

“난 또.”

“뭐가 난 또 야?! 토비오쨩 너무하네! 정말!”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리며 대놓고 토라진 티를 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홍역 걸리면 많이 아플까?”

“당연하죠.”

“으으…”

“오이카와상? 우십니까?”

“안 울어….”


오이카와는 축축해지는 눈가를 가리기 위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다 나 때문이야….”

“오이카와상이 홍역 옮겼어요? 근데 오이카와상은 홍역 안 걸렸던 것 같은데….”

“내가 옮긴 건 아닌데, 그래도 내 탓이야…. 이와쨩, 아파서 죽으면 어쩌지?”

“그럼 오이카와상 때문 아닌데.”


토비오의 단호한 말에, 울먹이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흰 꽃 같은 아이는 언제나처럼 천진하고, 또 확신에 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 바보야,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담담하게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토비오 말처럼 나 때문이 아니면 좋으련만.


-공작부인께서 아프신 것도, 이와이즈미님께서 이런 촌구석에 내려와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도 전부 오이카와 도련님 때문이잖아.


소년은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상처를 핥아줄 어미 같은 건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나 말이야, 저주받았대.”

“저주요?”

“응. 무슨 저주인지 아직 잘은 모르는데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지나 봐….”


기어이 눈물이 또 흘렀다. 


토비오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야.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그럼 울어도 눈치 못 챌 텐데.


“오이카와상”

“응?”

“‘저주’가 무슨 뜻이에요?”


토비오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던 오이카와는 그 말에 긴장이 탁 풀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 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고 말았다.


“네? 뭐예요? 알려주세요.”


아이는 이제는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할 때처럼 아주 재촉까지 하고 있었다.


“…토비오쨩 진짜 바보구나?”

“아닌데!”


토비오는 불만스러운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바보는 오이카와상입니다!”

“내가 왜 바보야?!”

“홍역 걸린 거 가지고 죽네 마네 하잖아요!”


토비오는 마치 ‘이건 몰랐지?’라고 말하듯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홍역 걸려도 안 죽어요. 며칠 앓고 나면 다 낫는 데다가 다시는 홍역에 안 걸려요. 아빠가 알려줬는데 뭐랬더라…면…면역? 뭐 그런 게 생긴다고…”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토비오를 보고 있던 오이카와는,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눈을 비비면서도 웃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면역력 말하는 거지? 단어도 제대로 모르니까 토비오쨩 바보 맞네.”

“바보 아닌데…”


토비오는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래서 저주가 무슨 뜻인데요?”

“…몰라도 돼.”

“몰라도 되는 거예요?”

“어차피 알려줘도 금방 까먹을 거잖아. 토비오쨩은 바보니까!”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소년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주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꼬맹이 앞에서 혼자 설레발을 치며 청승을 떨었던 게 왠지 웃기게 느껴졌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우는 대신 웃었다.


“아, 웃었더니 더 배고프다.”


제가 생각하기엔 별로 웃길 것도 없건만 혼자서 웃어대고는 “이게 다 토비오쨩 때문이야!” 라고 제 탓을 하는 오이카와를 보고 토비오는 인상을 썼다. 그래도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토비오는 가방 안에 가져온 빵을 꺼냈다.


“이거라도 드실래요?”

“…먹을 게 있었으면 아까 말했어야지!”

“아까는 오이카와상이 갑자기 울려고 하셔서…”

“아, 안 울었거든!”


오이카와는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리면서도 토비오가 건넨 빵을 집어 들었다.


“근데 이거 네 밥 아냐?”

“제 점심인데요.”

“그걸 내가 먹어버려도 돼? 그럼 넌 점심때 뭐 먹으려고?”

“어…그러게요…?”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인지 토비오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너 진짜 바보구나.”


오이카와는 혀를 차면서 빵을 반으로 나눠서 절반을 토비오에게 내밀었다.


“자, 반 줄게. 고맙지?”

“감사합니다.”


원래 제 것인데도 고마워하며 가방에 빵 반 조각을 넣는 아이를 보니 또 피식 웃음이 나와서 오이카와는 허겁지겁 빵을 먹으면서도 내내 입가에 웃음기를 달고 있었다. 토비오는 빵을 먹는 오이카와 옆에 붙어서 코를 킁킁거렸다.


“이거 무슨 냄새예요?”

“궁금해?”

“이건 알려주실 거예요?”


그리 크지 않은 빵은, 그마저도 절반으로 나눈지라 겨우 간에 기별이 갈 정도였지만 오이카와는 더 불평하지 않고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래. 따라와 봐. 내가 좋은 거 보여줄게.”


오이카와가 무언가를 순순히 알려준다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토비오는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등을 쫓아 잎사귀에 고운 물이 들고 있는 숲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꽃밭.”


길을 전부 외웠는지 막힘없이 걷는 오이카와의 걸음에서 시원한 향이 피어올랐다. 아직 작은 토비오에겐 오이카와의 걸음걸이가 무척 크게 느껴졌지만, 토비오는 오이카와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대신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그를 따라갔다. 날씨가 선선한 탓인지 오이카와가 걸으면서도 중간중간 그를 돌아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어디까지 가요?”

“유니콘의 숲까지.”

“거기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무서운 동물들도 살지 않나요?”

“괜찮아.”


오이카와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도.”


시야에 흰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토비오는 처음 보는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을 본 오이카와는 꽃밭을 보여주면 토비오가 얼마나 더 놀랄지 기대하며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먼저 뺨에 떨어지는 게 있었다. 

가을의 찬 빗방울이었다. 

괜찮아. 지나가는 비겠지. 아니면 이슬이거나. 오이카와는 토독토독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애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빗방울은 그치기는커녕 더 굵어만 졌다. 차박차박 소리가 나는 풀 길을 걷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토비오는 까만 머리카락에서 투명한 물방울들이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데도 군말 없이 걷고 있었다. 눈에 빗물이 들어가는지 자꾸만 눈을 깜빡이는 그 모습을 본 오이카와는 작게 혀를 차며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오이카와상?”


축축한 천 끄트머리가 뺨에 닿았다. 오이카와는 벗은 망토를 천막처럼 토비오와 제 머리 위로 펼치고 말했다.


“비 그칠 때까지 저기 나무 밑에 잠깐 있다 가자.”


그러나 나무 밑도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망토는 금세 물을 잔뜩 먹어 축축 쳐졌다.


“비 안 그치네요.”

“그러게.”


오이카와는 토비오를 한 번, 그리고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한번 보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네? 그러면 알려주신다고 한 건요?”

“나중에 알려주면 되잖아.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나중에 언제요?”


토비오는 못내 아쉬운 듯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


“비 그치면.”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까 비 다 그치면 다시 보자.”

“약속한 거예요!”


토비오는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하고 나서야 오이카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으슬으슬한지 작게 몸을 떠는 토비오를 보고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가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오이카와는 얼른 오라는 표시로 단풍잎 같은 토비오의 손을 잡았다. 닿은 손에서 머리끝까지 전류가 쫘악 흘렀다. 가끔 토비오를 볼 때면 느끼는 저릿한 감각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걸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게요.”

“응? 어? 어, 그, 그래.”


그 상태로 얼마나 걸었을까. 토비오가 제 손을 놓아버리자 오이카와는 얼굴을 들었다 다시 숙이며 대답했다. 뭔가 아쉬웠다.


“잠깐만 토비오쨩!”


오이카와는 걸어가 버리는 토비오를 불렀다. 토비오가 멈춰서 그를 돌아봤다.


“비 그치면 보는 거다? 알았지? 항상 보던 거기에서!”

“네!”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말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잠깐 사이에 토비오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오이카와는 방금까지 잡고 있던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걷기 시작했다. 비가 그치면 또 그 꽃밭에 갈 생각에 소년은 저주에 대한 것도 까맣게 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레이 아저씨에게 크게 혼이 났다. 

오이카와에게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치던 그는 나중엔 왈칵 눈물을 터트리며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허튼 생각 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덩치가 산만한 레이 아저씨를 끌어안고 다음 날 눈이 퉁퉁 불 정도로 울었다. 

다시는 멋대로 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날부터 오이카와는 틈이 날 때마다 창문 너머 하늘을 쳐다봤다. 가을인데도 비는 며칠째 그칠 생각을 않고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홍역에서 나은 후에도 먹구름은 가시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방에 멋대로 쳐들어가 “홍역은 애들이나 걸리는 건데 이와쨩은 어린애예요?”하고 이와이즈미를 놀리다가도 창문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보곤 “두고 봐! 비를 그치게 하는 마법을 개발할 거야!”라고 큰소리로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그쳤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오이카와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집을 나와 숲으로 달려갔다. 오늘이야말로 민트 꽃이 가득 핀 꽃밭을 토비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항상 아이와 만났던 장소에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토비오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숲을 붉게 물들이던 단풍이 다 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와도 토비오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해 겨울, 눈이 특히나 많이 내리던 날에도 숲에서 눈이 파랗던 까만 머리카락의 아이를 기다리던 오이카와는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그 전까지 가벼운 감기에만 걸려본 오이카와는 심한 독감에 걸리고 나서야 열이 많이 오르면 몹시도 아프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걸리는 흔한 감기인데도, 고작 감기인데도, 그런데도 온몸이 땀이며 눈물에 흠뻑 젖을 정도로 아팠다.


독감이 나은 뒤 오이카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머리를 빗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뻣뻣한 편인 머리카락이 며칠 동안 누워만 있어서 심하게 엉켜있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제법 길어지셨네요.”

“그러게. 계속 길러볼까?”


오이카와는 빗으로 엉킨 부분을 풀어내려 애쓰며 대답했다. 그러나 땀에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해서 소금기까지 어려 있는 머리카락은 빗으로 풀려 해도 두피가 당겨 아프기만 할 뿐이고, 정작 엉킨 부분은 풀리지 않았다.


“제 빗으로 한 번 빗어보실래요? 제가 아끼는 빗인데 잘 빗어지거든요.”

“응.”


오이카와는 하녀가 건네는 빗을 받아들고 힘을 주고 엉킨 부분을 빗었다. 

그러나 엉킨 게 풀리기는커녕 와지끈 소리와 함께 빗살이 똑 부러지고 말았다. 


“미, 미안해…부숴버렸어….”


손안의 부러진 빗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오이카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흐윽…나는 그냥…그냥 엉킨 걸, 흑, 풀고 싶어서…”

“오이카와 도련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빗은 새로 사면 돼요.”


오이카와가 자라는 걸 보며 늙어온 하녀조차 오이카와가 왜 저리 슬피 우는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엉켜버린 게, 그리고 풀리지 않는 게 무척 서러운가보다. 

계속 울던 오이카와는 그녀가 자신을 다정하게 달래자 부러진 빗을 내려놓고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더 큰소리로 악을 쓰며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약속했으면서! 약속했으면서!!”


그 날 기어이 엉킨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오이카와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더는 울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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